1784년 2월 22일, 뉴욕항. 한 척의 배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름은 중국황후호(Empress of China). 360톤급 상선이었고, 목적지는 광저우(廣州)였다. 이 배가 특별했던 이유는 크기나 속도가 아니었다. 독립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달, 파리 조약으로 미합중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 된 직후에 띄운 미국의 첫 대(對)중국 무역선이었기 때문이다. 출항 날짜가 조지 워싱턴의 52번째 생일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배는 갓 태어난 나라의 첫 상업적 시도였다.
화물칸에는 무엇이 실렸는가. 기록이 남아 있다. 납, 모피, 면직물 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 가지 식물이었다. 인삼이었다. 약 30톤. 배 전체 화물 가치의 상당 부분이었다.
독립국 미국의 첫 수출품이 인삼이었다는 사실은, 미국사에서는 꽤 알려진 이야기지만 한국사에서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장면 안에는 앞선 두 편의 이야기와 정면으로 엇갈리는 한 가지 사실이 숨어 있다. 중국황후호가 싣고 간 인삼은 조선산이 아니었다. 북미 대륙의 숲에서 캐낸 것이었다.
이야기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1716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조제프프랑수아 라피토(Joseph-François Lafitau)가 오늘날 캐나다 퀘벡 지역에서 한 가지 식물을 찾아냈다. 그는 베이징에 있던 동료 선교사 피에르 자르투(Pierre Jartoux)가 보낸 편지와 그림 한 장을 갖고 있었다. 자르투가 만주에서 본 인삼을 그려 보낸 것이었다. 라피토는 그 그림을 들고 북미의 숲을 뒤졌다. 그리고 이로쿼이(Iroquois)족 여성들에게 비슷한 풀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숲에 그런 풀이 있다고.
라피토가 찾아낸 것은 훗날 화기삼(花旗蔘, American ginseng, Panax quinquefolius)이라 불리게 된다. 학명의 종명 quinquefolius는 "다섯 잎"이라는 뜻이다. 만주 인삼(Panax ginseng)과는 다른 종이지만, 같은 속(屬)에 속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로쿼이족이 이 풀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뿌리를 약으로 써왔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풀은 상품이 아니었다. 라피토가 도착한 순간, 이 풀은 숲의 약초에서 수출품으로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라피토가 도착한 것이 아니라 자르투가 베이징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한 순간이었다. 중국 시장의 수요가, 만주의 숲에서 북미의 숲으로 한 번 튕겨 전달된 것이다.
그 뒤로 약 70년 동안, 북미산 인삼은 꾸준히 광저우로 흘러갔다. 영국 상선들이 실어 날랐고, 식민지 시절 북미 주민들에게는 현금 작물이었다. 대니얼 분(Daniel Boone)이 오하이오강에서 인삼을 싣고 가다 배가 뒤집혀 큰 손실을 본 일화가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다. 미국 동부의 숲에서는 인삼 채집이 하나의 생계 활동이었다.
그리고 1784년, 막 독립한 미국이 중국을 향해 첫 배를 띄울 때, 화물칸을 채운 것이 바로 이 숲의 뿌리였다.
여기서 앞선 두 편의 구조가 한 번 더 흔들린다.
일본은 조선 인삼을 수입하기 위해 전용 은화까지 주조했다. 중국은 조선 인삼을 사기 위해 연행사의 팔포를 가득 채웠다. 두 바다 모두 조선 인삼을 원했고, 조선 인삼에 값을 치렀다. 그런데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조선 인삼을 수입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땅의 숲에서 비슷한 뿌리를 찾아 중국 시장에 조선과 나란히 뛰어들었다. 미국은 소비자가 아니라 경쟁 생산자로 인삼 무역에 들어왔다.
그 결과 미국 시장 안에서 "한국산 인삼"은 오랫동안 독립된 품목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며 북미산 화기삼은 거꾸로 한국과 중국으로 역수출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도 위스콘신산 화기삼은 한국 한약재 시장의 한 축이다. 한국 야생 산삼이 미국 시장에 독립 품목으로 등장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고, 그나마도 중국계 이민자 사회의 한약재 유통망 안에서였다.
인삼에 대해 미국은 값을 치르지 않았다. 자기 값을 받으러 다른 바다로 건너간 쪽이었다.
청자는 정반대였다.
고려청자가 미국에 건너간 시점은 인삼보다 훨씬 늦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의 동아시아 미술 수집 열풍이 일면서였다. 그런데 이 수집 경로는 대부분 일본을 한 번 거쳤다. 미국인 수집가들은 서울이나 개성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이 간 곳은 도쿄와 교토였다. 그곳의 일본인 골동상에게서 청자를 샀다.
대표적인 인물이 디트로이트의 사업가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다. 그는 1890년대부터 동아시아 미술품을 모았고,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며 컬렉션을 늘렸다. 그의 소장품은 훗날 워싱턴 D.C.의 프리어 갤러리(Freer Gallery of Art)가 되었다. 오늘날 스미소니언 산하 미국 국립 아시아 미술관의 전신이다. 그 안에 고려청자가 있다. 프리어가 그것을 산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하버드의 동양학자 랭던 워너(Langdon Warner), 보스턴미술관의 큐레이터들, 클리블랜드미술관의 초기 수집가들도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그들이 청자에 지불한 값의 기준은 일본 골동계가 이미 만들어놓은 값이었다. 미국 시장의 청자 값은 "일본이 매긴 값 + 태평양 운임 + 서구 미술사의 재해석"이라는 삼중 구조로 형성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야 한다. 20세기 내내 미국 미술사학계는 한국 도자를 독립된 카테고리로 다루지 않았다.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한국 도자는 "중국 도자의 아류"이거나 "일본 다도의 부속품"으로 전시되었다. 고려청자가 독자적 범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70~80년대 이후다. 한국학 연구 기반이 마련되고, 한국 정부와 기업의 미술관 후원이 본격화된 뒤였다. 물건이 바다를 건넌 지 반세기가 넘어서야 시선이 독립된 셈이다.
그동안 청자는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의 눈은 청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청자를 일본 것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두 물건을 나란히 놓고 보면 미국이라는 바다의 성격이 드러난다.
인삼에 대해 미국은 경쟁 생산자였다. 한국 인삼은 미국 시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도착할 자리가 이미 북미산으로 채워져 있었다. 청자에 대해 미국은 재수출 소비자였다. 한국 청자는 미국에 도착했지만,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도착했다. 미국이 치른 값은 일본이 먼저 매긴 값이었다.
한 나라가 한 물건에는 값을 치르지 않고, 다른 물건에는 다른 나라가 이미 매긴 값을 치렀다. 미국은 두 물건 모두에 대해 값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미국이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늦게 도착한 손님은 이미 차려진 상 앞에 앉는다. 새 상을 차릴 수 없다.
세 바다를 모두 건너왔다.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은 청자의 기술 원본이자 인삼의 소비 원본이었다. 이미 자를 갖고 있던 바다. 일본은 청자의 가격 발명지이자 인삼의 기술 탈취지였다. 자가 없던 자리에 자를 새로 만든 바다. 미국은 청자의 재수출 소비지이자 인삼의 경쟁 생산지였다. 이미 만들어진 자를 뒤늦게 집어 든 바다, 혹은 자기 자를 따로 만들어 같은 시장에 나선 바다.
세 바다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두 물건의 값에 관여했다. 그리고 세 경우 모두, 값이 매겨진 자리는 조선 땅이 아니었다. 값은 언제나 물건이 건너간 바다 쪽에서 결정되었다. 조선의 산과 조선의 가마는 물건을 내어놓는 곳이었지, 물건의 값을 쓰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의 보물"이라 부르는 물건들의 값표가, 사실은 세 바다 건너에서 나누어 쓰였다는 것. 이것이 세 편의 이야기가 내놓은 결론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도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값이란 대체 무엇인가. 물건 안에 있지 않고 물건 바깥의 구조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 구조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세 바다의 이야기가 보여준 것은 값이 어디에서 오는가였지, 값이 무엇인가는 아니었다.
이 질문은 역사의 질문이 아니다. 존재의 질문이다. 그래서 다음 자리에서 다시 묻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