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의 출처] 값은 물건 안에 없었다

by 한경수

조선 후기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가 청자 한 점을 깨뜨렸다고 하자.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흙덩이 하나가 두 조각 났을 뿐이다. 같은 청자가 1910년 경성의 어느 일본인 수집가의 서재에서 깨졌다면, 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 오늘 서울옥션 경매장에서 같은 청자가 깨진다면, 뉴스가 된다. 보험사가 움직이고 변호사가 호출되고 사회면에 사진이 실린다.


물건은 같다. 구조만 다르다.

그리고 손해의 크기는 물건이 아니라 구조가 결정한다.

이 단순한 장면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면 이상한 자리에 닿는다. 값이란 물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리다. 우리는 보통 "이 청자의 값은 얼마인가"라고 묻는다. 마치 값이 청자 안에 숨어 있는 속성인 것처럼. 그런데 방금 본 장면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값은 청자 안에 없다. 청자를 둘러싼 구조 안에 있다.


경제학은 이것을 수요와 공급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수요와 공급이 성립하려면 먼저 그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틀이 있어야 한다. 조선 땅속의 청자는 그 틀 밖에 있었다. 값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값이라는 자(尺)를 갖다 댈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이 전환을 상품화(商品化)라 부른다. 어떤 것이 상품이 되는 사건은, 그 물건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도착하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 시선은 어디서 오는가. 사회학자들은 장(場)이라 부르는 것을 말한다. 수집가와 감정가와 경매사와 비평가가 만드는 좁은 원. 이 원 안에서만 어떤 물건의 등급이 정해지고, 등급이 정해져야 값이 따라붙는다. 원이 바뀌면 등급이 바뀌고, 등급이 바뀌면 값이 바뀐다. 물건은 그대로다.


장은 또 누가 만드는가. 여기서 권력이 나온다. "볼 가치가 있는 것"과 "볼 가치가 없는 것"을 가르는 선은 대개 힘 있는 소수가 긋는다. 서긍(徐兢)의 붓, 이토 히로부미의 손, 찰스 프리어의 지갑. 앞선 세 편의 이야기는 결국 이 선 긋기의 기록이었다. 선 안쪽에 들어간 물건만 값을 얻었다.


네 층이 차곡차곡 쌓인다. 값은 수요에 의존하고, 수요는 틀에 의존하고, 틀은 시선에 의존하고, 시선은 권력에 의존한다. 맨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값은 물건에서 멀어지고 관계의 배치에 가까워진다. 물건은 값의 원인이 아니다. 물건은 구조가 값을 걸어두기 위해 필요한 못일 뿐이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한 구절이 다시 올라온다. 화엄(華嚴)에서 말하는 인드라망(因陀羅網). 하늘에 드리운 그물의 매듭마다 구슬이 걸려 있고, 구슬 하나하나가 나머지 모든 구슬을 비춘다. 어느 구슬도 혼자서는 빛나지 않는다. 빛은 구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슬과 구슬 사이의 비춤에 있다.


청자 한 점의 값도 같은 자리에 있다. 서긍의 눈, 이토의 수집실, 프리어의 배, 도굴된 개성의 고분, 심지어 조선 사람들의 무관심까지 — 이 모든 구슬이 한 자리에 모여야 "수십억 원"이라는 숫자가 성립한다. 하나만 빠져도 숫자는 달라진다. 하나만 더 빠지면 숫자는 아예 사라진다.


그래서 "가격은 구조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은 반만 맞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격은 구조 그 자체다. 물건은 구실일 뿐이다.


이 자리에서 한 가지 함정을 조심해야 한다. 논리를 끝까지 밀면 "그러니 값은 허구(虛構)다"라는 결론에 미끄러지기 쉽다. 그런데 이건 틀렸다. 구조 의존적이라는 것과 허구라는 것은 다르다. 연기(緣起)로 발생한 것도, 발생한 동안은 실재한다. 청자의 수십억 원은 허구가 아니라 조건부 실재다. 조건이 무너지면 사라지지만, 조건이 있는 동안은 진짜로 작동한다. 보험금이 나가고 세금이 매겨지고 사람이 다친다. 가짜 돈이 아니다. 다만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아야 할 뿐이다.


이 구분을 놓치면 글은 냉소로 기운다. 지키면 통찰로 남는다.


여기까지 오면, 이 이야기는 더 이상 청자와 인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마주치는 모든 숫자의 이야기다. 부동산 시세, 주식 가격, 연봉 협상액, 논문 피인용 수, 학교 순위, 병원 만족도. 이 숫자들을 믿을 때 우리는 대개 그 숫자를 떠받치는 구조를 함께 믿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숫자만 보고 구조는 보지 않는다. 구조가 흔들리면 숫자도 흔들린다. 구조가 바뀌면 숫자는 거짓말이 된다. 숫자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숫자를 참으로 만들어주던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믿으면 틀리는 숫자의 가장 깊은 뿌리가 여기에 있다. 숫자는 구조의 그림자다. 그림자만 보고 몸통을 보지 않으면, 해가 기울 때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청자 한 점의 값이 어디서 왔는가를 묻던 세 편의 여정은 이 자리에 와서 끝난다. 값은 물건 안에 없었다. 값은 구조 안에 있었고, 구조는 시선의 배치였고, 시선의 배치는 연기였다.


바다 건너에서 값이 왔다는 말은, 바다 건너에 구슬 하나가 새로 매달렸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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