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들의 출처] 값을 이미 알던 바다 — 중국

by 한경수

1123년,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 개경에 한 달간 머물렀다. 휘종(徽宗) 황제가 파견한 국신사(國信使) 일행의 제할관(提轄官) 자격이었다. 돌아간 뒤 그는 본 것을 그림과 글로 정리해 황제에게 바쳤다. 책의 이름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마흔 권짜리였다.


그 안에 고려청자를 언급한 한 대목이 있다. 도기(陶器) 항목에서 서긍은 이렇게 적었다. "근래에 만듦새가 정교해지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近歲以來 製作工巧 色澤尤佳)." 청자의 비색(翡色)에 대해서도 짧게 덧붙였다. 비색이라는 말 자체가 원래 월주요(越州窯) 청자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서긍은 고려의 청자에도 같은 단어를 쓴 것이다.


이 한 줄이 오늘날 고려청자 연구서의 거의 모든 첫 장에 인용된다. 한국 도자사의 가장 권위 있는 문헌 기록이 한국 사람이 남긴 것이 아니라 천 년 전 중국 사신이 남긴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자주 잊힌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가야 한다. 12세기 초의 중국은 자기(磁器)의 종주국이었다. 월주, 여요(汝窯), 정요(定窯), 경덕진(景德鎭). 세계 최고 수준의 가마들이 중국 전역에 있었다. 그 나라의 사신이 변방의 자기를 보고 "근래 만듦새가 정교해졌다"고 적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세계 최고의 비평가가 어느 무명 작가의 작품을 두고 한 줄 칭찬을 남긴 것과 같다. 그 한 줄이 그 작가의 평생을 결정한다.


고려청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서긍의 한 줄은 값이 아니었다. 평판이었다. 그런데 평판은 값보다 먼저 오는 것이고, 평판이 선 자리에만 값이 매겨질 수 있다. 900년 뒤에 일본인 수집가가 경성의 골동상에서 청자의 값을 부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물건이 이미 오래전에 중국 사신의 붓끝에서 "정교하고 빛깔이 좋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서긍이 그렇게 적었음에도, 고려청자는 중국으로 대량 수출되지 않았다. 송·원·명·청 어느 시기에도 청자는 중국 시장에서 주력 상품이 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중국은 이미 포화 시장이었다. 자기를 사러 갈 필요가 없는 나라, 오히려 자기를 파는 나라였다. 평판은 주었지만 시장은 주지 않았다.

일본과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일본은 자기 생산이 늦어 조선과 중국의 자기를 수입했다. 그래서 값을 치를 시장이 있었다. 중국은 생산 대국이었다. 그래서 값을 치를 시장은 없었고, 대신 평판을 내려줄 권위가 있었다. 일본은 청자에게 값을 주었고, 중국은 청자에게 이름을 주었다.


인삼은 정반대의 경로를 밟았다. 중국은 인삼에 대해서는 시장이었다. 그것도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시장이었다.


명(明)대부터 조선 인삼은 중국으로 흘러갔다. 청(淸)대에 들어서는 수요가 더 커졌다. 청 황실은 만주 지역의 야생 인삼을 황실 전용으로 관리했는데, 17세기 후반부터 그 야생 인삼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만주의 숲이 비어갈수록 조선의 인삼값이 올라갔다. 연행사(燕行使)라 불리던 조선의 대중(對中) 사행단이 북경을 오갈 때, 공식 조공품 목록과는 별도로 사행원들이 개인적으로 휴대하는 인삼이 있었다. 이 개인 무역분(팔포, 八包)의 수익이 사행 한 번에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인삼이 조선 땅에서 캐낸 그대로 건너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랜 운송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썩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개성상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삼을 쪄서 말리는 가공법을 개발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홍삼(紅蔘)이다.


홍삼은 조선 땅에서 조선 사람들이 먹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중국까지 가는 긴 길을 견디기 위해, 그리고 중국 소비자들의 취향 — 보관성, 약성의 농축, 색의 선호 — 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홍삼이라는 상품은 중국 시장이 만든 상품이다. 조선 땅에서 태어났지만, 그 형태를 결정한 것은 조선이 아니었다.


개성상인의 자본은 이 홍삼 무역에서 쌓였다. 조선 후기 가장 큰 민간 자본 축적의 한 축이 중국 시장을 향해 맞춰 설계된 가공품 하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적 전통"이라는 말의 결을 조금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의 모양이, 한국 바깥의 시선에 맞춰 다듬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국 편의 구조가 드러난다.

청자는 이미 자기를 알던 자리에 갔다. 그래서 값은 주지 않았고 평판을 주었다. 평판은 값보다 먼저 와서 값의 조건을 만들었다. 인삼은 이미 인삼을 알던 자리에 갔다. 그래서 값을 주었고, 값을 받는 쪽이 물건의 형태를 시장에 맞춰 바꿨다. 홍삼은 중국의 눈이 만든 조선의 물건이다.


앞 편에서 일본이 두 물건에게 "값이 매겨질 자리"를 발명해준 시장이었다면, 중국은 두 물건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자(尺)를 갖고 있던 시장이었다. 자가 이미 있는 자리에서는 물건이 자에 맞춰 다듬어진다. 자가 없는 자리에서는 자를 새로 만드는 일부터 시작된다. 일본에서 일어난 것이 후자였고,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 전자였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물건은 스스로 값을 결정하지 못했다. 값을 결정한 것은 언제나 물건 바깥이었다. 바다 건너의 평판이었고, 바다 건너의 수요였고, 바다 건너의 취향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바다가 하나 남아 있다. 가장 늦게 도착했고, 가장 기묘한 방식으로 두 물건을 맞이한 바다다. 그 바다는 청자에 대해서는 수집가였지만, 인삼에 대해서는 경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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