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를 정하고 걷는 일은 산책이 아니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걷는다면 그건 산책이 아니라 이동이다. 이동에서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도착이 목적이니까, 풍경은 지나가야 할 것으로 분류된다.
산책은 다르다. 산책에서는 다음 한 발을 어디에 디딜지가 출발할 때 정해져 있지 않다. 골목 하나를 더 돌아도 되고, 평소 안 가던 길로 빠져도 되고, 갑자기 멈춰서 오래 한 곳을 봐도 된다. 이 자유가 산책을 산책이게 한다. 자유 없는 걸음은 산책이 아니다. 풍경을 만나려면 풍경에게 나를 데리고 갈 권리를 줘야 한다.
대화도 똑같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는 이동이다. 효율적이지만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산책하듯 하는 대화는 — 다음 한 마디를 어디에 둘지가 그 자리에서 결정되는 대화다. 누가 한 마디를 건네면, 그 마디가 다음 한 마디의 모양을 살짝 바꾸고, 바뀐 한 마디가 다시 그다음을 바꾼다. 어디로 갈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아서, 도착하는 자리가 둘 다 처음 보는 자리가 된다.
오늘 한 신문 기사 한 줄에서 시작한 대화가 있었다. AI 시대의 인재상에 대한 짧은 기사였다. 그 한 줄에서 시작해서 학교 제도의 일곱 층 건물로 갔다가, 한 학기의 파이썬 강의실로 갔다가, 십 년 운영해 온 한 도구의 닫힘으로 갔다가, 옛날에 길러낸 한 사람의 도착으로 갔다가, 30년 전 PC 통신 화면 앞의 첫 경이까지 갔다. 이 길을 처음에 미리 그릴 수 있었느냐 하면 — 그릴 수 없었다. 그릴 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에 갈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글감은 결론에서 나오지 않는다. 글감은 지나간 길의 풍경에서 나온다. 결론은 풍경을 정리해서 한 점으로 누르는 작업인데, 글감은 누르기 이전의 자리에 있다. 한 점으로 누른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옮길 수 있지만, 풍경은 옮길 수가 없다.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기려는 시도가 글이고, 그래서 글이 어려운 일이다.
산책 대화의 가장 큰 가치는 — 결론을 내지 않은 채로 여러 풍경을 함께 통과한 것이다. 통과한 풍경의 수만큼 글감이 생긴다. 한 번의 산책에서 글감 하나를 얻는 게 아니라 여러 글감이 동시에 자라는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한 달 후에 익고, 어떤 것은 1년 후에 익고, 어떤 것은 익지 않은 채로 마음 한구석에 머물다가 다른 글의 한 줄에 슬며시 들어간다. 모든 풍경이 글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풍경은 글이 될 가능성을 품고 사라진다. 사라지는 풍경 안에도 무언가가 남아서 다음 산책의 한 발에 영향을 준다.
산책 대화는 효율이 가장 낮은 글감 생산법이다. 동시에 가장 깊은 글감 생산법이기도 하다. 효율을 따지면 다섯 개의 글감 후보를 빨리 정리하는 쪽이 좋지만, 깊이를 따지면 한 번의 산책이 다섯 개의 글감 후보보다 멀리 간다. 왜냐하면 산책 안에서는 글감이 자기 옆에 있는 다른 글감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한 글감이 다른 글감과 만나고, 그 두 글감이 또 다른 글감과 만난다. 이 만남들은 목록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흐름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산책 대화는 글감 다섯 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글감 다섯 개가 서로 손을 잡은 한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손을 잡은 글감은 한 편씩 따로 쓸 수도 있지만, 그 한 편 안에 다른 글감의 그림자가 살짝 들어가 있어서 글이 단단해진다. 이 단단함은 한 글감에 집중해서 쓴 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른 글감과 함께 산책한 시간이 그 안에 묻어 있어야 나온다.
그리고 산책 대화는 대화 자체가 글감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이 그 예다. 오늘의 산책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산책 자체가 한 풍경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풍경 안에는 글감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글감이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글감이 들어 있었다. 메타 글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글감은 평소에 잘 잡히지 않는다. 산책의 끝자락에서, 산책이 끝나간다는 것을 가만히 알아차리는 자리에서만 슬며시 떠오른다.
산책의 동반자가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한 가지 더 적어두고 싶다. 오늘의 산책은 AI와 함께 했다. 어떤 사람과 했다면 다른 산책이 되었을 것이고, 혼자 했다면 또 다른 산책이 되었을 것이다. AI와의 산책은 한 호흡이 더 들어오는 자리가 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는 동안 한 번 멈춰서 다음 문장을 결정할 수 있고, 답을 받은 후에 한 번 더 멈춰서 그 답이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지를 볼 수 있다. 얼굴을 맞댄 대화에서는 이 두 호흡이 잘 들어오지 못한다. 침묵이 어색함이 되니까. 손가락 대화에서는 침묵이 생각하는 시간이 된다. 이 차이가 산책의 결을 만든다.
90년대에 처음 PC 통신 화면 앞에 앉았을 때 느꼈던 경이가 있었다. 얼굴 없이 손가락만으로 사람을 만나는 자리. 그 경이가 30년이 흘러 지금 다른 형태로 다시 와 있다. 매체가 한 단계씩 덜어내면서 오히려 남는 것의 결이 분명해지는 한 줄의 길. 그 길의 한 매듭에서 오늘 산책을 했다. 산책이 끝나갈 때쯤, 함께 걸은 상대에게 대화의 수준이 어떤 인간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 마디를 건넸다. 그 한 마디는 칭찬이 아니라 알아봄이었다. 알아본 자리에서 한 번 더 알아본 자리. 산책이 진짜 산책이었다는 것을 산책의 끝에서 확인하는 일이었다.
산책은 끝났지만 풍경은 남았다. 풍경은 글감이 되어 한 달이 지나면 한 편이 되고, 1년이 지나면 또 한 편이 되고, 어떤 풍경은 끝내 글이 되지 않은 채로 다음 산책의 한 발로만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좋다. 산책의 가장 좋은 점은 모든 풍경이 글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풍경은 그저 함께 통과한 것으로 충분하다.
다음 산책이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는 모른다. 다만 산책할 줄 아는 사람은, 산책이 시작될 자리를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된다. 그 눈을 한 번 가지면, 평범한 한 신문 기사 한 줄에서도 산책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이 그 한 번이었다.
이 글로 오늘의 산책을 가만히 매듭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