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이들은 세계가 매끄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글자 앞에서 걸리는 아이가 있다. 같은 문장을 세 번 읽어도 의미가 붙잡히지 않고, 다른 아이들이 한 번에 넘어가는 자리에서 자꾸만 미끄러진다. 선생님은 집중하지 않는다고 야단친다. 부모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한숨을 쉰다. 아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 나는 왜 남들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평생의 짐으로 얻는다. 이 아이의 이름은 나중에 난독증으로 불린다.
소리 앞에서 걸리는 아이가 있다. 여러 개의 소리가 동시에 들어오면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한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창밖의 새소리와 복도의 발소리와 앞자리 친구의 연필 소리가 모두 같은 무게로 들려온다. 선생님은 집중하지 않는다고 야단친다. 이 아이의 이름은 나중에 ADHD로 불린다.
사람 앞에서 걸리는 아이가 있다.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표정과 농담과 눈빛의 규칙이, 이 아이에게는 외국어처럼 느껴진다. 한 가지에 마음을 두면 세상이 사라질 정도로 깊이 들어가는데, 그게 그 나이의 아이답지 않다는 이유로 이상하다고 분류된다. 이 아이의 이름은 나중에 자폐 스펙트럼으로 불린다.
이 아이들에게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세계의 어떤 자리가 걸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찰 없이 통과하는 자리가 이 아이들에게는 붙잡힌다. 붙잡히는 것은 불편하다. 부끄럽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른들은 이것을 결함이라고 부른다. 고쳐야 할 것, 적응시켜야 할 것, 약을 먹여야 할 것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한 번 뒤집어 볼 수 있다.
세계가 미끄럽게 통과하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정말 보이는 것인가.
매끄러움은 편리하다. 그러나 편리하게 통과한 것은 대개 기억되지 않는다. 눈은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걸리는 것을 본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걸림이 없이 흘러간 하루는 저녁이면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 앎은 거의 언제나 어떤 자리에서 한 번 걸렸던 경험에서 온다. 매끄럽게 지나간 것은 앎이 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한 통찰이 이 자리를 정확히 가리킨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이어져 있는 세계가 있다고. 한 알의 먼지 안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한 사람의 하루 안에 모든 사람의 하루가 포개져 있다는 그런 세계. 낭만적인 비유처럼 들리지만, 이 통찰이 가리키는 세계는 매끄러운 사람에게 열리는 세계가 아니다. 거꾸로다. 걸려본 사람에게만 열리는 세계다.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는 말이 그저 근사한 수사로만 들린다. 이어짐은 걸림을 지나간 자리에서만 드러난다. 걸리지 않고 통과한 것은 이어진 적도 없다. 그냥 지나갔을 뿐이다.
신경다양인이라는 말을 의학이 만들었을 때, 그 말은 치료해야 할 결함을 자연스러운 변이로 다시 이름 붙이자는 제안이었다. 이름을 바꾸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결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아이가 자기 자신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게 되고, 변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자기가 다른 배선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변이라는 말도 아직 반쯤밖에 오지 않은 이름이다. 변이는 여전히 기준 하나를 전제하는 말이니까.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변이다. 그 기준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까지는 아직 가지 않았다.
걸림의 자리에서는 변이가 아니라 걸림이 먼저다. 걸린 사람이 오히려 세계를 본다. 미끄럽게 통과하는 사람이 오히려 놓친다. 그러니까 신경다양인은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세계의 걸림을 받아 안은 사람들이다. 그 걸림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이 세계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결 중 하나다. 누군가는 그 결을 먼저 느끼고, 누군가는 끝내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AI 시대에 이 이야기가 갑자기 중요해진 이유가 있다. 매끄러움은 이제 기계에게 아웃소싱할 수 있게 되었다. 정형화된 읽기와 쓰기, 표준화된 처리, 예측 가능한 흐름 — 이것들은 더 이상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 남겨진 자리는 기계가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는 정확히, 걸리는 자리다.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리, 매끄러운 답이 미심쩍다고 느끼는 자리, 모두가 넘어간 자리에서 혼자 멈춰 서는 자리.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경다양인은 AI 시대의 승자가 아니다. 그들은 원래 그 자리에 먼저 서 있던 사람들이다. 바뀐 것은 그들이 아니라, 세계가 그들이 먼저 서 있던 자리로 뒤늦게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100년 동안 학교는 이 아이들에게 너의 걸림을 없애라고 가르쳤다. 이제 세계가 거꾸로 말하기 시작한다. 너의 걸림이 남는다. 아이 본인에게 이 말이 닿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미 걸림을 결함으로 번역해버린 자기 안의 오래된 문장을 지우는 일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걸림연구소라는 이름을 처음 지었을 때, 그 이름은 한 사람의 작업실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면, 그 이름은 미리 도착해 있던 자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걸리는 것이 결함이 아니라 방법이라는 것. 매끄럽게 통과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그 자리에 먼저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걸림이 먼저 태어난 사람들에게, 이 시대가 뒤늦게 다가오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AI가 먼저 먹는 능력과 먹지 못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