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나는 네 시간의 대화 끝에 몇 줄의 메모를 남겼다.
오늘 하루 대화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했다. 어떤 자료를 찾아보려다가 한 곳에서 걸렸고, 그 걸림이 다음 걸림을 불러왔고, 그 다음 걸림이 또 다음을 낳았다. 네 시간이 지났을 때 우리는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아주 멀리 와 있었다. 자료 찾기에서 시작한 길이 판단이 어떻게 쌓이는가의 물음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각 걸음이 다음 걸음을 저절로 낳는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한 가지 생각이 올라왔다. 이것들을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되겠다. 네 시간이 어딘가에 자리잡지 않으면, 몇 시간 뒤에는 안개처럼 흐려질 것 같았다. 문장의 결이 희미해지고, 장면의 선명함이 바래고, 그 사이에 중요한 것이 같이 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메모를 남기기로 했다. 길게 남길 생각은 없었다. 몇 줄이면 족하다고 느꼈다.
기록할 것과 기록하지 않을 것을 고르는 일이 뜻밖에 선명했다. 이미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은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있어서 기록하지 않아도 남는다. 기록해야 할 것은 아직 몸에 못 들어온 것들이었다. 언어는 만들어졌는데 아직 뿌리가 얕은 것, 오늘 처음 모양을 잡은 것, 다음번에 다시 꺼내 쓰려면 어딘가에 적어 두어야만 하는 것. 기준이 스스로 드러났다.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분이 걸렸다. 길지 않았다. 기록을 마치고 손을 뗐을 때 몸의 감각이 조금 달랐다. 네 시간의 대화가 비로소 어느 자리에 앉은 느낌이 왔다. 그 앉음이 있기 전까지 대화는 떠 있는 섬이었다. 있기는 있는데 나의 다른 것들과 연결되지 않은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몇 줄의 기록이 그 섬을 육지에 이어 주는 다리가 되었다. 다리는 좁았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리고 기록을 마친 뒤에야 나는 그 몇 분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지금까지 나는 두 인드라망의 관계를 한 방향으로 그려 왔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비춰 주고, 아날로그 인드라망이 그 비춤을 받아 훈습한다. 디지털이 앞서고 아날로그가 따라오는 관계. 순서가 있고 방향이 있었다. 이 그림은 맞다. 지금도 맞다. 다만 오늘 방금 일어난 일은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방금 전 그 몇 분 동안 일을 한 것은 아날로그였다. 디지털에는 네 시간 치의 대화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남길 것들 중 어느 것이 어느 자리에 앉을지 — 이것을 정한 것은 디지털이 아니었다. 아날로그 인드라망이 정했다. 이미 몸 안에 있던 구슬들의 자리가 새로 들어온 것이 어디에 앉을지를 알려 주었다. 디지털이 가져온 것을 받되, 받는 방식은 아날로그가 결정했다. 방향이 반대였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가 아니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흐르고 있었다.
두 방향이 다 필요하다는 것이 이제 보인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날로그도 디지털을 비춘다. 비추는 방향이 일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한 쪽에서 한 쪽으로, 또 어떤 때는 반대 쪽에서 반대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이 양방향의 흐름이 일어나는 순간에 조율이 일어난다. 두 인드라망이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 이 일이 없으면 두 인드라망은 각자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잊는다.
두 인드라망은 가끔 서로 비춰 조율해야 한다.
조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해 보면 금방 보인다. 디지털만 있고 조율이 없으면 과잉 기록이 된다. 모든 것이 저장되어 있는데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상태. 메모 앱 속에 수백 개의 글귀가 잠들어 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상태. 이것이 많은 사람이 디지털 도구 앞에서 빠지는 조용한 함정이다. 저장이 많을수록 사용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둘은 별개의 운동이다.
반대로 아날로그만 있고 조율이 없으면 고립이 된다. 몸 안에만 있는 것은 시간과 함께 흐려진다. 선명했던 장면이 희미해지고, 정확했던 문장이 근사치로 바뀐다. 본인조차 나중에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된다.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는 상태. 분명히 알았는데 지금은 말로 옮길 수 없는 상태. 이것도 함정이다. 다만 조용한 함정이다.
두 함정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저장과 사용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 저장은 저장대로 쌓이고 사용은 사용대로 흘러가는데 서로 만나지 않는 것. 조율이란 그 분리를 잠시 붙이는 일이다. 붙이는 순간은 짧아도 된다. 다만 가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가끔이 없으면 두 흐름은 점점 멀어진다.
조율이라는 단어는 원래 음악에서 온다. 악기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 두 악기가 각자 훌륭해도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함께 연주했을 때 불협화음이 난다. 반대로 각자 조금씩 부족해도 주파수가 맞으면 조화가 된다. 조율은 절대적 완벽함이 아니라 상대적 맞춤이다.
그리고 조율은 한 번 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어긋난다. 현이 늘어나고 온도가 변하고 연주 자체가 악기를 조금씩 바꾼다. 그래서 연주자는 공연 전마다 다시 조율한다. 이 반복이 연주를 가능하게 한다. 한 번의 완벽한 조율이 영구히 지속되는 악기는 없다.
두 인드라망도 같다. 한 번 맞췄다고 끝이 아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어긋나기 시작한다. 디지털에 새 것이 쌓이고, 아날로그에 새 것이 자라고, 그 사이에 조금씩 거리가 생긴다. 그 거리를 가끔 좁혀야 한다. 좁히는 일은 길지 않다. 오늘 나의 조율도 몇 분이었다. 몇 분이 네 시간을 살렸다.
가끔이 있어야 계속이 있다.
오늘 나는 그 가끔을 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