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서 책을 거의 다 버렸다.
37년을 가르쳤으니 책장은 두 개의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통계 교과서가 한 벽을 차지했고, 다른 벽에는 분야가 다른 책들이 섞여 있었다. 불교, 동양 사상, 과학사,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언어학. 강의록, 학회지 별쇄본, 국제 학술대회 자료집. 어떤 책은 스무 해 넘게 같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버리는 일은 손으로 했다. 머리로 한 것이 아니다. 손이 한 권씩 들었다 놓았고, 어떤 책은 손이 그냥 지나쳤다. 그날 책장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가르고 있는지 잘 몰랐다. 다 버린 뒤에 남은 책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남은 책 중에 한 권이 있다. 영국에서 30년 가까이 대체의학을 검증한 한 의사가 쓴 책이다. 사이먼 싱이라는 과학저술가와 함께 썼다. 한국어판 제목은 『똑똑한 사람들이 왜 이상한 것을 믿을까: 대체의학의 진실』이다. 침술, 동종요법, 약초, 카이로프랙틱이 차례로 다루어져 있고, 각 장의 끝에 저자들이 임상시험 메타분석을 근거로 효능 여부를 적어 두었다. 인삼은 위약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이 책이 왜 남았는지를, 나는 그날 잘 몰랐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은 에드자르트 에른스트(Edzard Ernst)라는 독일 출신 의사다. 젊을 때 뮌헨의 한 동종요법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동종요법을 배웠고 침술을 배웠고 약초를 배웠다. 대체의학의 옹호자로 출발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옹호하는 것을 자기 손으로 검증해 보고 싶어서, 1993년 영국 엑서터 대학으로 옮겨 세계 최초의 보완의학(Complementary Medicine) 교수가 되었다. 그 자리에서 30년을 일했다. 1000편이 넘는 논문을 썼고 40권이 넘는 책을 냈다.
30년의 검증이 끝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700개의 치료-질환 쌍을 검토했는데, 좋은 근거가 뒷받침되는 것은 그중 7.4%였다. 100 중 7. 자기가 한때 옹호했던 것의 대부분이 7 안에 들지 못했다.
이것은 비판자의 책이 아니다. 한때 안에 살았던 사람이 안의 벽들을 자기 손으로 두드려 본 기록이다. 비판은 밖에서 할 수 있지만, 두드림은 안에 있어 본 사람만이 한다.
나도 한때 한의학을 옹호하는 자리에 있었다.
대학에 자리를 잡은 1980년대 후반의 한국에서, 한의학은 자명한 풍경이었다. 동의보감이 있었고, 한의원이 있었고, 가족 누군가는 침을 맞았고, 어머니는 한약을 달였다. 그 풍경 안에 살면서 그 풍경을 의심하는 일은 어색했다. 의심이 없었던 것은 내 안에 의심의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는 의심은 의심이 아니라 어색함이다.
도구는 천천히 손에 들어왔다. 통계학이 한 도구였다. 표본과 대조군을 가르고 무작위 배정을 생각하고 신뢰구간을 읽는 일이 익숙해지는 동안, 같은 눈으로 다른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익숙한 것에도 같은 잣대를 대 보게 되었다. 잣대는 자기가 가리키는 곳을 가리지 않는다. 잣대를 가지면 어디에든 댈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도구는 더 늦게 왔다. 한국어판 스켑틱(Skeptic) 잡지가 창간되었을 때는 몰랐으나 어쩌다 20호 잡지를 사서 읽어보다, 과월호도 모두 읽게 되었다. 잡지가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외국의 사례였다. 동종요법, 초능력, 음모론, 의사과학, 대체요법. 처음에는 남의 풍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호를 읽다가 알았다. 남의 풍경 안에 내 풍경이 들어 있었다. 동종요법 자리에 인삼을 놓아 보아도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침술 자리에 부항을 놓아 보아도 같은 모양이었다. 잣대는 국경을 가리지 않았다.
의심은 한 번에 오지 않았다. 한 해 한 해, 한 호 한 호, 한 권 한 권, 천천히 자리를 옮겨 갔다. 어느 자리에서 돌아섰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돌아선 자리는 점이 아니라 긴 띠였다.
은퇴하던 날 책장 앞에서 손이 그 한 권을 남긴 이유를, 그날의 나는 몰랐다. 그 책은 영국 의사의 책이었고, 한국의 한방 화장품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책장의 다른 통계 교과서들과 같은 자리에 꽂힐 책도 아니었다. 그런데 손이 그 책을 남겼다.
며칠 전 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어떤 한의대 교수가 한방 화장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인삼이 첫 번째 원료였다. 기사 안에 "수천 년 전통"이라는 말이 있었고, "SCI 논문 100편"이라는 말이 있었고, "과학입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인삼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 무엇인가가 켜졌다.
켜진 것은 그 책이었다. 책장의 한 자리에 10년 넘게 자리를 차지하던 책. 인삼은 위약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던 그 책. 그제야 알았다. 그 책이 왜 남았는지.
그 책은 나와 같은 길을 먼저 걸은 사람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옹호에서 검증으로, 검증에서 회의로 가는 길. 그 길의 모양을 한 영국 의사가 임상시험으로 그렸고, 나는 통계학과 잣대로 그렸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가 30년을 검증하는 동안 나는 30년을 가르쳤다. 길은 평행했다. 그 평행한 길의 한 자리에 그의 책이 한 구슬로 놓여 있었다.
손이 그 구슬을 남긴 이유를 머리는 나중에 알았다. 손이 더 정직했다.
한 구슬이 빛나려면 다른 구슬이 비추어야 한다. 평소에는 빛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모른다. 어떤 사건이 옆에서 일어나야 그 자리가 다시 켜진다.
켜는 것은 새 구슬이 아니다. 새 구슬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켜지는 것은 이미 있던 구슬이다. 신문 기사 한 편이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이 아니라, 30년 전에 책장에 꽂혀 있던 한 권 위로 잠시 전기가 흐른 것이다. 전기는 잠시 흐르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잠깐의 빛이 그 구슬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그 구슬이 왜 거기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나는 이 책을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다른 책들이 다 떠난 자리에서, 이 한 권만은 같은 자리에 꽂아 둘 것이다. 어느 날 또 다른 사건이 옆에서 일어났을 때, 이 구슬이 다시 한 번 켜질 수 있도록.
다음 편에서는 또 다른 구슬 하나에 대해 적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