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연구소]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

by 한경수

파스칼이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갈대 비유에 한 박자 머물면 위안이 된다. 흔들리는 일이 잘못이 아니고, 다만 일어나는 일이라 받으면 된다.


그런데 그 위안이 사람에게는 끝까지 허락되지 않는다.

갈대는 흔들린다. 사람도 흔들린다. 둘 다 바람을 만들지 않고 멈추지도 못한다. 거기까지는 같다.

갈리는 한 자리가 있다. 갈대는 자기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사람은 안다. 그 앎이 흔들림에 한 겹을 더한다. 그 한 겹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자리이자, 사람이 결코 가벼워질 수 없는 자리다.


흔들리는 동안 사람은 자기가 왜 흔들리는지를 묻는다. 묻지 않으려 해도 어딘가에서 물음이 일어난다. 침묵하려 해도 침묵이 한 종류의 응답이 된다. 무관심도 한 종류의 답이다. 사람은 자기 흔들림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 침묵도 말이 되어 버리는 자리에 사람이 있다.

이것이 숙명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자리다. 선택할 수 없는 자리. 벗어날 수 없는 자리. 동물에게 없고 사람에게만 있는 자리.


같은 숙명을 두 결로 받는 사람이 있다.

어두운 결로 받는 사람은 평생 이 짐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는다. 어쩌면 한 번도 찾지 못한다. 묻지 않는 자리, 생각이 멈춘 자리,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그리워한다. 그 자리는 갈대의 자리이고, 사람에게는 끝내 닿지 않는다.


정직한 결로 받는 사람은 이 짐을 자기 자리로 알아본다. 알아본다는 것이 짐의 무게가 사라지는 일은 아니다. 다만 짐을 진 사람과 짐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에 도달한다. 짐과 자기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 그 사실에 도달한 사람에게 무거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무거움이 자기 자신의 다른 이름이 되어 무거움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흔히 잘못 만나는 자리가 있다.

어떤 가르침은 사람에게 갈대가 되라고 권한다. 흔들리지 마라, 마음을 비워라, 평안을 얻어라. 그 권유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람이 자기 숙명의 무게를 잠시라도 내려놓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깊은 가르침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심명(信心銘)의 첫 줄,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은 흔들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흔들림 안에 있는 가림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가림은 일어난다. 일어나는 가림을 미워하지 않는 자리가 도와 어긋나지 않는 자리다. 흔들림을 막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을 미워하지 않는 자리.


깊은 가르침은 사람을 갈대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사람으로서 흔들리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한 글자 차이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의 일생이 갈리는 차이다.


사람의 흔들림은 갈대의 흔들림보다 한 겹 더 무겁다. 흔들림 자체에 흔들림에 대한 생각이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흔들림을 두 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을 사람의 일로 만든다. 갈대의 흔들림은 자연의 일이고, 사람의 흔들림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흔들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뜻이 아니다. 흔들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곧 사람이 짊어진 자리다. 짊어진다는 동사가 무겁게 들리지만 사람은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 내려놓으려는 시도가 또 하나의 짊어짐이 된다.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 왜 자기가 흔들리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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