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못 보는가] 잣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by 한경수

역사책을 읽다가 노예제를 당연히 받아들였던 시대의 기록을 만난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던 사회의 풍경을 본다. 식민지를 운영하면서도 그것을 문명이라 불렀던 제국의 문서를 읽는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속으로 말한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이 한 마디는 꽤 성숙한 말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 시대의 잣대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 잣대는 지금의 잣대와 달랐고, 그들은 자기 시대의 공기 속에서 숨 쉬었다. 역사가들은 오래전부터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보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경계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스며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과거의 잣대가 당시의 산물이라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잣대가 지금의 산물이라는 것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옛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잣대는 시대의 산물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그 말을 돌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잣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정의는 정의이고, 공정은 공정이고, 인권은 인권이다. 언제,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자리에서 이 단어가 지금의 모양이 되었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한쪽에는 너그럽고, 한쪽에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두 방향은 사실 같은 경첩의 두 날개다. 과거의 잣대가 만들어진 것이라면, 현재의 잣대도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를 너그럽게 보는 시선이 정당하다면, 현재를 의심하는 시선도 정당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거의 언제나 한쪽 날개만 편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는 안 보인다. 과거는 바깥이다. 바깥은 관찰할 수 있다. 현재는 안이다. 안은 공기다. 과거의 잣대는 유물처럼 보이지만, 현재의 잣대는 공기처럼 보인다.

한쪽 날개만 펴면 어떤 풍경이 생기는가.

과거는 점점 더 야만으로 보인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보다 어리석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계속 위로 올라왔다는 느낌이 자연스러워진다. 도덕적 우월감이 당연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잣대는 점점 더 보편처럼 보인다. 지금의 정의가 과거에도 정의였어야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정의일 것 같다. 자기 시대의 잣대를 보편으로 놓는 습관이 굳는다.

역사를 지금을 향한 계단으로 읽고, 지금을 계단의 꼭대기에 올려놓는 읽기다. 역사가들은 이 읽기를 오래전부터 경계해왔다. 그러나 일상의 눈은 여전히 이 읽기를 따라간다.

과거를 보호하는 시선과 현재를 의심하는 시선은 한 동작의 두 얼굴이다.

한쪽만 펴면 경첩이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에 너그럽고 현재에 엄격해야, 혹은 현재에 너그럽고 과거에 엄격해야, 적어도 대칭이 맞다. 지금 우리는 반대로 굴고 있다. 과거에 너그럽고 현재에도 너그럽다. 잣대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쪽으로만 기운다.

왜 이 의심이 드문지는 이해할 만하다.

현재의 잣대를 의심하는 일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의심하는 일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과거 사람들은 반박하러 오지 않는다. 교과서 속의 그들은 침묵한 채 우리의 판단을 받는다.

현재를 의심하면 옆 사람이 돌아본다. 같은 잣대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지금 너는 우리 편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날아온다. 자리를 흔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자리가 흔들린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한쪽 눈은 게으름이 아니라 조용한 방어다. 같은 자리에 계속 서 있기 위한 방어.

오해를 막기 위해 한 줄 덧붙인다. 의심은 부정이 아니다. 현재의 잣대를 의심한다는 것은 그것을 무너뜨리라는 뜻이 아니다. 잣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일이다. 출처를 아는 잣대는 여전히 잣대로 쓰되, 자기를 영원이라고 믿지 않는다.

두 날개로 보는 연습은 크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과거 사람들에게 내가 쓰는 너그러움을, 지금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한 번 건네보는 일. 그들도 지금의 공기 속에서 숨 쉬는 사람이다. 하나의 시대 안에 여러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를 향해 던지는 의심을, 지금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한 번 돌려보는 일. 단 한 번이면 된다. 자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하는 것만으로도 잣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잣대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잣대를 쥔 손이 보이기 시작한다.

손이 보이면 그 손이 누구 손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지 묻게 된다. 묻는다고 해서 손을 놓지는 않는다. 다만 손이 자기를 잣대 자체라고 믿는 일은 줄어든다.

손을 보지 않는 시선이 가장 오래 속는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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