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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까비 Aug 09. 2020

'이제 집에 가자' 죽으러 간 프랑스에서 귀가하다

삶을 내려놓았던 서른 살 여자, 진짜 죽을 뻔했던 프랑스 여행기 12


(여행 4일차: 베르사이유의 장미)



전날 기절한 덕에 엄청 푹 잤다.

휴양지에서 잘 자고 일어난 아침은 평화롭고 행복하지만, 많이 보고 돌아다니려고 온 여행지에서 잘 자고 일어나면 뿌듯하다. 자존감이 오른다고나 할까. 해 뜨기 전에 일찍 나왔다. 어스름하고 찹찹한 아침 공기가 피부에 닿는데 기분 좋은 차분함이 든다.


오늘은 두 번째 시골을 향하기 전에 파리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왠지 내가 더 애정할 것 같은 오르세 미술관을 여행 막바지에 남겨두고 오늘은 루브르에 가기로 했다.

숙소가 있던 11구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있는 지하철 역 ‘Palais Royal Musee du Louvre'는 몇 구역되지 않아서 금방 내렸다.


파리 지하철은 신기한 것이 방금 전역을 출발했고 몇 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음 역에 또 멈춘다. 구간이 무지 짧다.


 

평소에는 1시간은 족히 기다린다던 루브르 박물관의 입구. 테러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나는 1분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루브르는 평소 같으면 입장에만 1시간은 걸려야 할 텐데, 나는 3분도 안 되어 들어갔다. 지하철에는 그래도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실감을 못했는데, 루브르 입구에서는 테러의 여파를 여실히 보았다. 너무 금방 들어가는 것 같아 왠지 허전해서 루브르의 명물인 유리 피라미드 안에서 밍기적대다가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진입하기 전 마지막에 루브르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안에서 밖을 한 번 찍었다.
당시 나의 마음이 반영이 된 것일까. 몇 찍지 않은 작품 사진에는 해골과 시신을 옮기는 수도승들이 남아있다.
집에 떼어가고 싶었던 계단.


여행을 다녀온 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때 보았던 작품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사진을 좀 더 찍었으면 새록새록 기억 났을 법도 한데. 소매치기들의 온상인 루브르라 혼자 온 나는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많이 찍지는 못했다. 혼자 사진, 특히 셀카를 찍는 여자는 관광객 티가 너무 나니까. 프랑스에서는 어딜 가든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았고, 그나마 찍은 사진들도 주변 사람을 의식해 내가 빠르게 걷거나 심지어 달려가면서 찍어서 초점이 잘 안 맞는다.


한편 신기했던 건 그렇게 사람이 없어 대기 없이 입장했는데도 내부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있어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어 보지 못했다.


1초에 한 작품씩 보아도 몇 년을 볼 만큼 작품이 많은 루브르라기에, 통 크게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자고 마음을 편히 먹었다. 사실 애초에 큰 계획을 갖고 간 여행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기억이 나는 건 내가 무진장 좋아했던 기분만이 아직도 남아있다.


중세를 꿈꾸어 그곳을 찾아다니는 나도 이상하게 이토록 화려한 귀족의 삶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따로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나는 미술을 무지 좋아한다. 전공은 전자공학인데 ‘미술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은 200여명 전체 수강생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를 받았다. 원래 미술과 철학을 좋아하긴 했다. 예술대학 학생들이 전부인 ‘현대사회와 기호학’이라는 과목도 엉뚱하게 공대생인 내가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사진에 큰 관심이 없는 이유가 실사 사진보다 미술을 훨씬 좋아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실사보다 애니메이션이 훨씬 좋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현실을 상상하게 만들 때,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공간이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비너스 상이 발견되었을 때 비너스 상에는 꽤 많은 정액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다. 인체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그리스 미술의 영향이라고 배웠다.


점심도 안 먹고 루브르를 계속 돌아다니다 한 6시간 정도 흘러서 다리가 아팠다. 사실 다리가 많이 부었는데도 루브르에서 행복해하는 내가 다리 아프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피카소 같은 대가들의 습작을 모아 전시했다는 갤러리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스케치 하다 만 작은 노트들이 모여있는 갤러리에서 나는 구석에 앉아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박물관의 귀퉁이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는 루브르의 외관이 보이고 저 너머 튈르리 정원도 보이는 것 같다. 여기서 오래 생각에 잠겼다.  


다리가 아파 이 구석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는 왜 그토록
가본 적도 없는 프랑스를 그리워했을까. 아니, 나는 왜
그만 살겠다는 마음을 앞두고
프랑스로 왔을까.



막상 와서 느낀 프랑스는 자유, 박애, 평등의 나라인지 잘 모르겠다 싶었다. 평등은 어쩌면 북유럽 국가들이 평등의 근처라고 할 만한 세계에 그나마 닿으려 하는 중일 것이다. 철학이 좋아 왔다가 박사학위를 포기했다는 한인택시 기사님 이야기로는 그렇게 평등한 나라 같지도 않다. 박애...이방인인 내게 가는 곳마다 말을 걸어준 것은 오히려 나중에 간 스페인이었다. 시골로 갈수록 프랑스 현지인들은 무뚝뚝하고 시니컬하게 느껴졌다. 자유? 여행객이 현지인의 자유를 알 방법은 모르지만, 프랑스가 대단한 자유의 나라인지는 그리 와닿지 않았다.


미술을 좋아하는 내게 프랑스는 덕질하기 좋은 곳이지만, 유럽 어디나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품을 담고 있는 곳은 넘친다. 예술이라면 요즘은 베를린이나 런던만큼 ‘핫’한 곳이 없을 터. 음식이라면 너무너무 맛있었지만, 중국 음식도 좋아하는 내게 음식만으로 찾아올 곳도 아니다. 고대 로마의 흔적과 중세도시라면 프랑스만큼이나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나의 로망이 가장 서린 곳은 레반트,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있는 곳과 소아시아인데.




왜 였을까.



생각의, 생각의, 생각을 파고 내려가다,

루브르 박물관을 나와 길거리를 거닐다

프랑스 국기를 보고 문득 알았다.


시간이 흐른 흔적을 알 수 없어서 허무함을 주는 정물화.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작품.




베르사이유의 장미. 이것이다.



나는 책을 일찍 접하고, 만화책은 더 일찍 읽기 시작했다. 여섯 살에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이 ‘베르사이유의 장미’다. 만화방에서 빌린 것만 50번 정도는 되었고, TV애니메이션으로 정주행만 20여 번을 보았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외에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과 일본 만화는 꽤 보았지만 이것만큼 뇌리에 박힌 작품은 없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던 배경 음악은 가사가 없는 곡도 몽땅 외웠다.


중학생 때는 엔딩 타이틀과 흡사한 곡을 중세 프랑스에서 파이프오르간으로 연주하는 나를 꿈에서 보기도 했다. 꿈에서 나는 오스칼과 앙드레처럼 혁명을 주도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성당의 연주자였다. 말 한마디 없이 이들의 슬픈 운명을 예감하고 그 슬픔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꿈에서도 진짜 나 혼자 비장했다.




어렸을 때야 만화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마련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지금도 손꼽히는 고전 명작인 건 틀림없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 제일 처음 본 만화였다는 이유만으로 2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나를 연고도 없는 이 곳에 발 딛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여기에 오게 만들었지.... 했는데 얼핏 알 것 같다.





Blue, White, Red가 펄럭거리는 깃발을 들고 단호한 눈빛을 한 시민군 대장 오스칼.

어렸던 나는 그 모습을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 담아 두었나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오스칼의 모습이 겹친다.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공부, 명예, 돈, 인기 이런 시시한 것들 말고.



세상이 변하는 데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어떤 것.

내가 이 일로 죽게 되어 먼 훗날 나를 기억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도,

내 목숨을 걸 만큼 가슴 떨리는 일.

‘이것을 하다 죽었다’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어서

나는 그토록 허무했나보다.



동안 그것을 찾아 헤매었다.

길지 않은 나의 서른 살 이전의 삶 전체가 그랬다.

하루 종일 음악만 듣고 살았던 ‘라디오 키드’였던 학창 시절이 있었고, 세상에 무엇인가를 전하겠다고 공부만 했던 적도 있었다. 오스칼과 앙드레의 그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을 하겠다며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희미한 연애를 이어가기도 했다.



얻으려 했던 것은 얻지 못했다.

애타게 찾고 싶던 것도 아직 찾지 못했다.


이 모든 결과가 나를 프랑스로 데려다 놓았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울한 것이 아니라 편안했다.

애초에 신은 인간에게 대단한 것을 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분 나쁜 텅 비어있음 아니라 머릿속을 깨끗이 청소한 느낌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 1층의 명물. 거꾸로 세워진 유리 피라미드.


원래 이렇게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허무하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아주 편안하고 개운한 상태였나보다.




해가 질 녘이 되어서 나는 숙소로 귀가했다.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누리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왔다.

루브르에 연결된 지하도에 있는 록시땅에서 한국에 돌아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핸드크림과 립밤을 샀다.


여행 올 때만 해도 돌아가서 누군가에게 줄 선물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면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마음에 들었던 루브르 박물관에서 역까지 가는 지하 실내 길. 대리석이 너무 이뻤다. 여기에 있는 록시땅 가게에서 돌아가서 선물할 핸드크림과 립밤 세트들을 싸게 여러 개 샀다.



나는 그렇게
출국할 적에 나와는 달라져 있었다.



스크린 도어가 드물은 프랑스 지하철역에 웬일인지 보였던 스크린도어가 신기해서 촬영했다.
7호선은 끝에서 두 갈래로 갈리는데 한 쪽은 Ivry 행이고, 숙소가 있는 Villejuif 행을 나는 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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