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의 INNOSPARK, 2010년 6월호
사진에 보이는 6개의 물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 제품은 IDEA (Industrial Design Excellence Awards), iF (International Forum design awards)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상으로 꼽히는 레드닷 (Red Dot design award)의 포장 디자인 부문에서 2009년에 상을 받았고, ‘ISABRELLA’라는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정답은 ‘우산’이다.
우리나라 쇼핑몰에서도 이 제품을 3,200원에서 15,300원 사이의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데, ‘무알콜 와인병 우산’ 또는 ‘와인병 모양 우산’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가방에 넣었을 때 물이 새지 않는다는 장점과 와인병을 닮은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인기상품 순위에 오르는 등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인터넷 쇼핑몰에서 새로 등록된 신상품들의 디자인을 살펴보거나, 광고전 수상작들을 훑어보곤 한다. 특히 상품들을 구경할 때에는 가격 순으로 정렬해 최고가의 상품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보기도 하고, 관심이 가는 상품은 전문가 수준의 블로거들이 올린 리뷰를 꼼꼼히 읽어 보기도 한다.
노트북 앞에 앉아있기조차 싫을 때에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 근처의 큰 문구점에서 윈도쇼핑을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긴장을 풀고 다른 이들의 신선한 아이디어와 정성이 담긴 상품과 광고를 즐겁게 감상하고 나면 업무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내는 데에도 한결 수월함을 느끼게 된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즐거움을 느끼기 바라면서 ‘우산’과 관련된 몇 가지 디자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잠시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즐기시기 바란다.
어릴 적 동네에서 우산으로 칼싸움 좀 했던 분이라면 ‘사무라이 칼 손잡이 우산’이라는 이름의 이 우산이 제격이다. 국내의 한 쇼핑몰에서 ‘무사의 우산’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된 적이 있다.
자신의 존재감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분이라면 이 우산을 추천한다. 맑은 날 넓은 광장 한 복판에서 이 우산을 쓰고 서있으면 구글 어스 Google earth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거나 보행 시 쉽게 피로를 느끼는 분이라면 50달러에 판매되는 이 우산이 좋겠다. 비올 때에는 우산에 걸터앉을 수 없고, 반대로 날이 맑을 때에는 우산을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단점만 빼면 훌륭한 우산이다.
이 우산은 기상예보를 매일 챙겨 보는 것이 귀찮은 분들께 추천한다. 우산을 꽂는 사각 박스에 내장되어 있는 Wi-Fi(Wireless Fidelity: 무선 데이터 전송 시스템)가 기상 정보를 자동으로 받아 우산 손잡이의 LED 불빛의 세기로 날씨를 알려준다. 즉 우산 손잡이가 파랗게 변할수록 강수 확률이 높다는 뜻이므로, 손잡이가 파란색으로 변했을 때에만 우산을 챙겨 나가면 된다.
최첨단 네트워크 기술이 적용된 이 우산은 출시 여부가 불명확하므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사진 속 용기는 길쭉한 생김새로 볼 때 우산 꽂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큰 용기 아래쪽에 붙어 있는 작은 용기의 쓰임새는 무엇일까?
이 사진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린다. 작은 용기는 화분이고, 우산을 꽂는 큰 용기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작은 용기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어, 비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작은 화분에 담겨 있는 식물에 물을 줄 수 있다. 어쩌면 이 우산꽂이를 갖고 계신 분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일부러 우산에 묻은 빗물을 털지 않고 들어오실지도 모를 일이다.
화분이 좀 더 크기를 바라신다면 이런 우산 걸이도 괜찮겠다. 이 정도 모양이면 만들기 어렵지 않으므로 조금만 시간을 들여 손재주를 부리면 DIY (Do It Yourself, 손수 만들기)도 가능하겠다.
마지막 우산은 앞서 살펴본 것들에 비해 아이디어가 너무 간단하다.
골프채에 우산을 결합시켜 ‘골프채 우산’을 만들었다. 와인병에서 우산이 튀어나오는 놀라움도 없고, 날씨를 알려주는 기능도 없다. 그저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 우천 시 낙뢰의 위험 때문에 골프장에 나가지 못 한 아쉬움을 사무실 안에서 이 우산으로 달랠 수 있다는 장점 정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간단한 우산을 제작한 세바스찬 에라주리즈(Sebastian Errazuriz)라는 사람이 런던과 뉴욕 등지에서 40여 회 이상 전시회를 연 유명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이것은 에라주리즈가 디자인한 넥타이이다. 넥타이가 사람 키의 두 배 가까이 될 만큼 그 길이가 어마어마하다. 사진에서처럼 겨울에 목도리 대용으로 목에 감고 다니면 좋을 듯하다.
곰돌이 인형을 좋아하는 여성분이라면 에라주리즈가 만든 이 코트는 어떨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온효과도 탁월할 듯싶다.
디자이너 에라주리즈가 단순히 기이한 모양의 작품들만 만든 것은 아니다.
1973년 전군 총사령관의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1990년까지 17년 동안 무력으로 칠레를 통치했던 피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 1915~2006)는 쿠데타 직후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에 위치한 칠레 국립경기장(Chile’s National Stadium)에서 민중 가수인 빅토르 하라를 비롯해 3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하게 된다.
독재자 피노체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2006년, 칠레 태생의 에라주리즈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경기장 한가운데에 10미터 크기의 목련나무(magnolia tree)를 심고 축구경기를 하게 된다.
에라주리즈가 최근에 만든 작품은 비행기 꼬리에 거대한 배너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배너에는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애초에 “We are all going to die”라는 문구로 하려다 미 연방항공청(FAA; Federal Aviation Administration)의 경고를 받고 내용을 수정했다고 한다.
우리 인생에서 확실한 게 결국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 하나뿐이라면, 그 나머지는 온통 불확실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렇게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을 좀 더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비밀은 에라주리즈가 쓴 “Death is the only certainty in life”라는 문장에서 ‘확실함, 확실성’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인 Certainty에 숨어 있다.
우선 CERTAINTY에서 E와 R, T와 A의 앞뒤를 바꾸면 CREATINTY가 된다.
여기에서 N을 과감하게 찢어 I와 V를 만들고, 이 I와 V의 앞뒤를 바꾸면 CREATIVITY가 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확실함 Ccertainty을 만드는 비법은 창조성 Creativity에 있다.
이러한 알파벳 놀이가 일견 유치해 보일 수 있으나 대가 大家로 존경받는 분들도 은근히 이 놀이를 즐긴다.
그 예로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컴퓨터 공학자인 존 마에다 John Maeda는 그의 저서 ‘단순함의 법칙 The Laws of Simplicity’에서 단순함 SIMPLICITY이라는 단어에 재직 중이던 MIT의 세 글자가 차례대로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의 SIMPLICITY라는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MIT는 굵은 실선으로, 나머지 알파벳은 점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굳이 이러한 알파벳 놀이로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창조성 Creativity으로 인생의 부족하고 불확실한 부분을 채워 나가고 확실하게 만들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창조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창조적인 글들을 꾸준히 읽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오랜 시간 집중해 책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다른 이들의 ‘창조적 결과물’을 관찰하는 방법도 좋겠다. 제품의 외양을 꼼꼼히 살펴보며 디자이너의 의도를 읽고 형태와 재질이 주는 기능상의 편의를 알아가는 것도 좋고, IT 기기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디자인을 알아보기 위해 이것저것 테스트해 보는 것도 좋겠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디자인이 있다면 "나라면 이렇게 만들 텐데..."라고 상상해 보고 이를 메모해 두는 습관까지 있다면 더욱 좋은 '창조성 훈련'이 될 것이다.
이렇게 키운 창조성이 빛을 보려면 무엇보다 ‘나만의 창조적 결과물’을 내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에라주리즈의 골프채 우산과 같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아이디어가 유명한 작품이 될 수도 있으니 주위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든 일단 결과물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이란 거듭 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잃지 않는 능력이다.”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두려움을 떨치고 열정적으로 실패해 보자. 무르팍에 딱지가 마를 날이 없을 만큼 넘어지고 또 넘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보다 멋지게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노디자인 INNODESIGN의 CEO이자 산업 디자이너로 명성이 높은 김영세 씨가 그의 저서 ‘다음 세대를 지배하는 자, 이매지너(Imaginer)’에서 ‘디자인’을 정의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Design’이라는 말에 담긴 뜻 - 김영세
디자인(design)을 풀어 보면 ‘de+sign’이다.
즉, 기호(sign)의 구조를 파괴하다(destruct)라는 뜻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 변화를 추구하다(making change)는 뜻이 될 것이다.
다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www.meetsebastian.com/sebastian-errazuriz-design-art-duck-lamp-white-taxadermy-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