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젠테이션을 시원하게 망치는 10가지 방법
프레젠테이션을 하기에 앞서 청중들은 어떤지 슬쩍 본다. 그들은 나에게 특별한 호의나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다. A는 멍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다. B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대고 앉아있다. C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다. D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료를 뒤적인다. 그들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내 프레젠테이션에 관심이 없다'는 불편한 진실뿐이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된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렇게 불편할 수 있다니. 긴장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목소리는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웅얼거리고, 떨리는 마음에 발음이 씹혀 어버버 한다. 이제 내용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음 화면에 나올 내용이 생각나야 지금 말하는 것과 연결할 텐데, 머릿속이 하얗다. 20분이 2시간 같다. 어차피 망한 거, 빨리 끝나기라도 하면 좋겠다.
누구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망친 경험을 갖고 있다. 집에서 아무리 이불킥해봤자 소용이 없다. 프레젠테이션은 이미 망했고, 돌이킬 수가 없는 과거일 뿐이다. 프레젠테이션을 망치는 삽질들을 살펴보자.
청중의 시선을 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자. 나는 화면만 보며 글씨를 읽거나, 화면과 프린트된 요약본을 번갈아 보거나, 천장 혹은 바닥을 보며 말하거나, 허공에 시선을 두고 말한다. 청중들은 생각한다. "뭐 하자는 걸까?"라고. 시선의 마주침은 없던 신뢰도 생기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시선을 피하면 지는 거다.
[해결책]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가지자. 준비한 내용에 대해 이 순간 지구상에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청중들은 처음 보는 화면이고, 처음 듣는 말이다. 프레젠테이션 한 시간 전부터 마음속으로 <나는 지구 최고 전문가다>를 주문처럼 되뇌어라. 뻔뻔하다 싶을 만큼 자만심을 가져라.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한 공간인 회의실이나 교실에는 강연대가 비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강연대가 있으면 뭔가 마음이 편하다. 하반신이 가려져 있어서인지, 강연대에 손을 얹을 수 있어서인지, 노트북이나 프린트된 자료를 올려둘 수 있어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프레젠테이션의 압박감을 줄여준다. 하지만 강연대 뒤에 숨는 것은 좋지 않다. 강연대가 없더라도 한 자리에 오래 서있는 것은 좋지 않다.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길수록 소심한 동선은 청중들의 지루함을 유발한다.
[해결책] 강연대 바깥으로 나오기도 하고, 청중 쪽으로 다가가기도 해야 한다. 단, 청중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부담을 줄 수 있고, 침도 튈 수 있으므로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말자. 앉아있는 청중이 서있는 내 얼굴을 편안한 각도로 볼 수 있도록 일정 거리는 유지해야 한다.
평소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청중 앞에만 서면 조리 있게 말하는 게 불가능하다. 침묵이 흐르면 이상할까 봐 후딱 다음 말을 던져보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이상한 말을 해버렸다.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며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된다. 방언이 터진 건가? 내가 내 입으로 하는 말인데 내가 통제할 수가 없다.
[해결책]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다 보면 말이 꼬일 수밖에 없다. <죽어도 전달하고 싶은 단 하나의 핵심 메시지>를 정하고, 나머지는 핵심 메시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된다. 말을 빨리 하다 보면 실수가 늘 수밖에 없으니 전달 내용의 양을 최소화하고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자. 프레젠테이션은 쇼미더머니 무대가 아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한 화면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를 잔뜩 쓰는 경우가 많다. 정성을 들인답시고 배경에 사진까지 깔아 안 그래도 작은 글씨가 더 안 보인다. 청중이 글자를 못 알아보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렇게 만들기를 권한다.
[해결책] 한 화면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문제다. <One Page, One Message>라는 규칙만 기억하자. 위의 예시처럼 6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1장에 모두 담지 말고 6장에 나눠 담으면 된다. 그리고 글자 수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글씨 크기는 화면과 가장 먼 곳에서도 편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으로 키운다.
'삽질 4. 글자로 도배'의 조언대로 글자 수는 최소한으로, 글자 크기는 최대한으로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친절하게 관련 사진도 넣었지만 뭔가 정신없다. 한참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프고 어지럽다. 이런 걸 안구 테러라고 한다. 화면에 Simplification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화면 자체는 전혀 Simple하지가 않다.
[해결책] 고수는 사진을 잘 쓴다.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적절한 사진 한 장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을 찾고, 선택하는 능력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일종의 디자인 센스라고 할 수 있는데, Pinterest 등의 사이트에서 사진 보는 안목을 키워 이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 억지로라도 관심을 가져야 능력도 생긴다.
청중은 기본적으로 내 프레젠테이션에 무관심하다. 약간의 관심이 있다고 해도 15분 이상 집중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내 발음이 뭉개지고, 목소리도 작다면 더 빨리 망한다. 목소리에 높낮이도 없고, 말하는 속도의 빠르기도 일정하고, 일정한 톤으로 설명에만 집중하면 청중은 잠이 온다. 그 어떤 ASMR도 이보다 졸리게 할 수 없다.
[해결책] 청중의 눈빛과 표정을 잘 관찰한다. 지루해하는 느낌이 든다면 목소리를 조금 크게, 말 속도를 약간 빠르게, 그리고 몸짓과 손짓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자. 작은/느린 목소리를 지속하면 지루하고, 큰/빠른 목소리를 지속하면 청중의 고막에 피로감을 줄 수 있다. 작게 크게의 볼륨 조절과 느리게 빠르게의 완급 조절만 잘 해도 내 프레젠테이션의 역동성이 올라간다. 긴장과 이완의 교차로 청중의 관심을 끌어내자.
그 분야의 문외한에게 전문용어가 가득한 내용을 전달하거나, 반대로 전문가에게 기초적인 내용을 전달한다면? 혹은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글로벌 화장품 케이스 시장 동향을 설명한다면? 아마도 프레젠테이션 3분 만에 청중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청중이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듣고 싶은 내용'은 정해져 있다.
[해결책] 프레젠테이션 전에 다음에 대한 정보수집이 필수다. 청중의 배경지식 수준은? 청중의 최근 관심사는? 해당 집단/조직의 최근 상황과 이슈는? 프레젠테이션 참석 시 청중의 기대사항은? 청중이 선호하는 프레젠테이션 스타일은 딱딱하게 격식을 갖추는 것인지, 부드럽게 농담을 섞어도 되는지?
청중과 소통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려고 A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A는 멋쩍은 듯 살짝 웃으며 "글쎄요"라고 답한다.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 B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B는 약간 찡그리며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전체 청중에게 "혹시 이 질문에 답해주실 분 없으세요?"라고 묻는다. 침묵이 흐른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담당자에게 항의를 받는다. 우리 회사 분들은 공개적으로 질문하고 답하는 걸 불편해하는데 왜 자꾸 강요하냐고.
[해결책]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는 분들은 눈치가 빠르다. 다짜고짜 강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약한 걸 던져보고 반응이 괜찮으면 중간 걸 던지고, 중간 것이 안 먹힌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방식으로 청중을 몰입시킨다. 눈치, 센스, 간 보기 무엇이라 표현하든 청중의 표정과 몸짓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 능력은 다양한 청중들과 부딪히며 이것저것 시험해보는 과정에서 발달된다.
연륜도 있고 직책도 높아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은 분인데, 이상하게 프레젠테이션만 했다 하면 화면에 있는 글씨들을 그냥 읽거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못 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건 실무자들이 문서를 준비하고, 그분은 '에이~ 잠깐 발표하는 건데 뭐'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준비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인 내용 숙지조차 안 했다는 뜻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프레젠테이션 준비에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해결책] 화면을 자주 보지 않으면서도 발언에 막힘이 없고, 화면에 나온 내용은 복잡하지만 이를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한다면,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열심히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 MS Powerpoint에는 A4지 한 장에 PPT 여러 장을 인쇄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인쇄가 싫다면 파일 상에서 화면을 축소해 여러 장 보기를 해도 된다. 여러 장을 한눈에 보면서, 각 장에서 '꼭 해야 할 말 한마디'를 머리 속에 떠올리자. '앞 장에서 A라고 말하고, 뒷 장으로 넘어가면서 A와 연결해 B를 말하고...' 이런 식으로 <상상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된다. 이 과정을 수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머리 속에 내용 전체가 들어오게 된다. 최고의 운동선수들도 상상훈련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프레젠테이션에도 상상훈련이 효과적이다.
위의 9가지 삽질을 안 할 수 있다면 엄청난 프레젠테이션 능력자이다. 하지만 열 번째 삽질은 이런 능력자도 쉽게 망칠 수 있다. 열 번째 삽질은 공간과 설비에 대한 디테일을 챙기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 내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의 호환 문제, 빔 프로젝트가 오래돼서 화면 흐림, 연결 잭 안 챙겨 옴, 파워 선 안 들고 왔는데 노트북 배터리 부족, 포인터 충전량 부족, 사운드 체크 안 함, 폰트 깨지기, 와이파이 안 잡힘 등 디테일 하나만 깨져도 프레젠테이션은 엉망이 된다.
[해결책] 강박증 Obsession은 뭔지 모를 불안을 없애기 위해 어떤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질환을 말한다. 디테일을 챙길 때에는 강박증에 가깝게 챙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막을 수 있다. 또한 프레젠테이션 할 장소에 최소 30분 전에는 가서 세팅을 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오류가 있을 때 IT부서 담당자가 와서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도 확보하고, 사전에 내가 그 공간에 익숙해지고 동선을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망치고 후회하지 말고 조금만 더 부지런하자.
/ 직장인 업무 기본서, 업무전과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gizmodo.com.au/2013/04/the-eight-types-of-shovels-everyone-should-k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