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기말시험 결과가 발표된 날이었다. 떨어진 성적 순위를 보며 담임선생님이 체벌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미국으로 가족 이민을 계획 중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담임 선생님은 물론이고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말시험을 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위 친구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알량한 자존심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내 마지막 모습을 순수하게 자의적 선택에 의해 성적이 떨어진 학생으로 기억되는 게 나을지 몰라.'
당시 담임선생님의 체벌은 조금 특이했다.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 국민학교부터 중학교에 다니며 다양한 교사로부터 다양한 방식과 도구로 체벌을 받았지만 이 분의 체벌은 뭔가 특별했다. 체벌 부위가 손바닥도 엉덩이도 아닌 발바닥이었다. 그리고 그분 나름대로 발바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다른 부위를 때리는 다른 선생님들이 이해가 잘 안돼. 얼굴이나 손을 때리면 맞은 흔적이 남아. 그런데 발바닥은 아무리 때려도 흔적이 남지 않지."
책상 앞에 장시간 앉아 공부하는 남학생들의 혈액순환을 위해 발바닥을 때린다고 우겨도 수긍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정공법을 택한 담임 선생님의 발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무교육의 마지막 잔상이다. 물론 매일 발바닥을 맞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후로 미국으로 건너가며 더 이상체벌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뇌리에 박혔다.
유년 시절 내 한국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선생님과 마지막 추억이 고통이 동반된 것은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크게 원망하지도 않았다. 선생님은 자신의 칼로리를 태우면서까지 휘두르는 매질이 자기 학생들을 계몽하기 위한 조치이자 배려라고 굳게 믿으셨으니 말이다.
사실 중학교 선생님은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곤 매를 잘 들지 않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진한 파마머리를 뒤로 넘기며 매를 드실 때면 중년의 선생님이 오히려 힘에 부쳐 보일 때도 있었다. 매의 횟수는 떨어진 등수 대비하여 정해졌다. 학생들 대부분 나름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 덕분인지 통증은 신경을 타고 뇌로 극명하게 전달되었지만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은 없었다.
당시 반 학생 수가 40명 정도 되었다. 단순하게 전체 인원의 반은 등수가 떨어진다고 가정하고 평균 5대 정도 맞는다면 무려 100대에 달한다. 불혹을 넘긴 여성이 길이 30cm, 두께 3cm 목재 소재의 매를 100번 휘두른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노동력을 요하는 일이다.
선생님은 발바닥이라고 그냥 사정없이 내려치진 않았다. 발의 움푹 패인 중간부분 혹은 족저근막 쪽을 보통 조준하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굳은 계몽에 대한 의지와 달리 체벌 대상이 10명이 넘어가면 정확도는 점점 떨어졌다. 정상궤도를 이탈한 매가 착륙지점이 아닌 발꿈치 혹은 주변 부위로 낙하하였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오히려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스윙 속도는 낮아지고 매가 발바닥을 때리며 발생하는 음파는 도달거리가 점차 짧아졌다. 그래서 순서가 매우 중요했는데 매의 횟수를 기준으로 낮을수록 앞에 배정되었다. 2대 이하로 맞는 친구들은 짧고 강렬한 통증을 경험했다면 3대 이상 할당받은 친구들은 여운이 긴 고통을 경험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크게 불만이 없었는데 어느 날 앞쪽에 배정된 친구 한 명이 소신있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순서를 바꿔보면 어떨까요?"
역시 똑똑한 친구라 그런지 선생님의 스윙속도가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콜'을 외쳤고 그렇게 냉랭했던 교실 분위기는 잠시나마 환기되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바로 선생님 체벌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앞에 3대 이상 맞는 친구들 발바닥을 겨냥한 매가 발바닥에 닿자마자 빠르게 공중으로 복귀했다.
항공기 조종훈련 중 Touch-and-Go(터치 앤드 고)가 있는데 살짝 착지했다가 바로 다시 기수를 들어 재이륙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생님은 매를 마치 베테랑 파일럿이 초음속 항공기를 운행하 듯 무척 간결한 터치 앤드 고를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였는지 짧고 빠르게 강약조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2대 이하 맞는 친구들의 순서가 오자 마치 쇼트트랙 마지막 바퀴를 도는 것 마냥 막판 스퍼트를 내셨다.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던 친구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매를 드는 명분과 체벌의 강도에 대한 원칙이 있던 중학교 선생님과 달리 초등학교 때 담임의 체벌은 예측불허였다. 체벌의 횟수는 적었지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난데없이 매를 휘둘렀다. 학생이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지만 초등학생 손가락이 파랗게 부을 정도로 매질하던 초등학교 선생님은 여전히 기억 속에 감정 기복이 있었던 분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담임선생님처럼 평소 일관되게 엄하고 체벌의 원칙이 확고했다면 수긍했겠지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확실히 감정이 이성을 압도했던 날이 많았다.
매질로 뜨거워졌던 발바닥이 식고 몇일 후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저 난생처음 외국 그것도 미국에 간다는 생각에 무척 설레였다. 1973년 결성된 미국의 4인조 밴드 Journey의 'Open arms'라는 노래처럼 모두가 두팔 벌려 나를 환영해줄 거로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상상이 산산이 조각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