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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Apr 24. 2023

미국 취업 서류 탈락 후 유럽에서 쓴 유학생의 인생역전

평사원으로 입사해 글로벌 기업 임원이 된 강동윤의 이야기 (1)

7년 동안 유럽계 기업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스타트업과 중견기업을 거쳐온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직장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택한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불확실성을 조금 더 젊은 나이에 온몸으로 부딪쳐 가며 체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올해 초 콘티넨탈 타이어 독일 본사에서 근무하는 강동윤 상품 기획 총괄을 인터뷰하며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의 일과 회사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다.


인터뷰를 통해 낯선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그를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에 미국에 남아 취업을 했더라면 달랐을까?"

"만약에 유럽계 기업에 남아 계속 근무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에 해외로 파견될 기회를 준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면 이뤄졌을까?"


어쩌면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물론 유럽계 기업에 남아 근무했더라도 그 결과를 알 순 없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1916년 발표한 시 중 "The Road Not Taken(가지 않는 길)"이 있다. 시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길을 선택하기 전에 두 길을 비교하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여행자로서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을 살아간다. 그와 인터뷰를 하며 나는 깨달았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한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Q. 본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콘티넨탈 타이어 상품 기획 및 상품 전략, 법규 및 인증 업무를 총괄하는 강동윤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였어요. 졸업 후 콘티넨탈 타이어 입사 후 본사가 있는 독일 하노버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였어요. 그 후 일본이나 미국이나 독일 같은 여러 나라에서 16년 동안 승용차 및 경트럭용 타이어와 타이어 모빌리티 킷트의 기술 개발, 기술 영업, 영업 관리 등을 주로 담당했어요. 지금은 콘티넨탈 타이어의 상품 로드맵을 수립하고 기획하고 전략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



Q.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주위 지인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요?

저희 가족은 어릴 적부터 이사를 자주 했어요. 아버지가 순환 근무를 하셔서 지방이나 서울을 오갈 때마다 저도 전학을 했거든요. 그래서 낯선 곳에서도 잘 적응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서울 본사로 발령받으시면서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2학년때까지 성적은 교내 상위권을 유지했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거의 매년 반장이나 회장을 맡게 되었죠. 그래서 중3 때는 전교회장에 도전하려고 했어요.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집에 전화하려면 카드를 넣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교내에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말했죠.


“엄마, 나 전교회장 선거에 나갈 거야.”


아들의 결정을 대견하게 생각하실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어머니는 놀라시며 말씀하셨어요.


“동윤아, 전교회장 나가면 안 돼. 너 아빠 주재원 때문에 미국에 갈지도 몰라.”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주재원으로 미국에 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가 1999년도였는데 당시만 해도 미국으로 건너가는 게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검사나 외교관을 목표로 했던 당시의 계획이 그때 다 틀어졌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기회가 열린 거죠.


Q.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가족과 미국으로 건너가 저는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학업에 충실히 임한 결과 고등학교 3년 내내 전 과목 A를 받았어요. 점차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자 소위 미국 주류 사회라고 하는 백인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생겼어요. 그러려면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교실 맨 뒤에 앉아야 했어요. 미국 교실은 자율배석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교실 맨 앞에서 열심히 수업을 듣던 모습을 바꾸고, 교실 맨 뒤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웃거나 수다를 떨기 시작했어요. 성적만 잘 받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루는 이런 제가 위태롭다고 생각하셨는지 생물학 선생님이 수업 중 저를 교실 밖으로 따로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동윤, 넌 지금 저 교실 뒤편에 앉아있는 애들이 멋져 보이니? 넌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인데, 왜 그들처럼 행동해? 넌 큰일을 할 수 있는데, 저들과 어울리면서 쿨한 척 하다가는 인생을 망칠지도 몰라. 잘 생각해봐.”


선생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와닿았어요. 선생님은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시고 도와주시려고 하셨거든요. 그날 이후 마음을 다잡고 대학 과목 선이수제(Advanced Placement, AP) 과목들을 들으며 대학 진학을 대비했어요. AP는 고등학생들에게 대학 과목을 미리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고, 시험에 통과하면 대학 이수학점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였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선생님이 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추천해주셨어요.


Q. 미국 남부를 대표하는 명문 공대 조지아 공과대학교(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진학하였는데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사실 문과 성향이라 타 대학은 주로 경제학과나 기술경영으로 지원했어요. 집에서 가까운 조지아 공과대학교는 산업공학 프로그램이 워낙 유명했던지라 산업공학과를 지원하였죠. 조지아 공과대학교는 아이비리그 대학교에 비해 입학 문턱은 비교적 낮았지만, 실험, 리포트, 시험 등 학업량이 만만치 않아 4년 졸업률 31%, 6년 졸업률 76% 정도로 상당히 낮았어요. 실제로 1학년 당시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했던 친구들이 2학년이 되자 거의 반밖에 남지 않았죠.


대학교는 확실히 고등학교와는 달랐어요. 동시에 수백 명이 수강하는 수업도 적응이 쉽지 않았고 난이도 역시 높았어요. 고등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 모아두고 상대평가를 하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어요. 거기다가 고등학교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였지만 제가 대학에 입학하자 주재원 근무를 마치시고 부모님이 모두 귀국하셔서 혼자 이역만리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게 되었어요.



남들은 대학 시절을 인생의 꽃과 같은 황금기로 뽑는데 저는 대학교 생활이 힘들고 외로워서 하루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남들은 보통 수강 신청을 15학점 이내로 하는데 저는 한 학기에 21학점씩 수강하며 저 자신을 몰아세웠어요. 방학에도 여름학기를 들었어요. 여섯 학기째 방학 없이 공부하다 보니 몸이 많이 힘들었어요. 3학년 2학기 시험 당일에는 몸을 일으킬 수도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있었어요. 번아웃 증후군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해주는 풋고추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비벼 먹으면 깨끗이 나을 거야. 별 걱정하지 말고 비행기 끊어서 돌아오너라.”


부모님께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려고 전화했는데 그 말을 듣고 울컥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여름학기 휴학을 신청하고 가장 빠른 인천행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에 들어왔죠.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확실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통역병으로 2년간 군 복무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오직 졸업을 목표로 학업에 매달렸어요. 덕분에 남들은 4년 이상 다니는 대학을 저는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죠.



Q. 졸업과 함께 바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타이어 회사인 콘티넨탈 독일 본사에서 일을 시작하였는데 어떻게 가능했나요?

졸업을 앞두고 미국의 많은 기업에 지원하였어요. 한번은 취업박람회에 가서 기업 채용담당자와 순조롭게 취업 관련하여 대화를 이어갔는데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들어왔어요.


“Dongyun, are you authorized to work lawfully in the US?”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유학생이었던 저는 서류심사조차 넘지 못했어요. 유학생들이 미국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체감하니 그 벽이 더 높게 느껴졌어요. 학업에 충실하고 학점을 잘 관리하면 취업에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유학생이라는 핸디캡은 생각보다 치명적이었죠.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CPT(Curricular Practical Training) 등 외국인 유학생들이 단기간씩 비자를 연장해 가면서 일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신분이 불안한 상태에서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결국, 삼성엔지니어링, SK텔레콤 등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채용을 적극적으로 하는 국내 대기업을 위주로 지원하였어요. 운 좋게 두 회사 모두 뉴욕에서 진행한 2차 면접까지 통과하여 텍사스와 한국에서 각각 최종 임원면접까지 앞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큰 기대 없이 지원하였던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2차 면접 요청을 받았어요.


Ⓒ콘티넨탈 타이어


콘티넨탈이라는 독일의 타이어 제조 회사였죠. ‘익스플로어’라고 하는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순환근무를 통해 콘티넨탈의 다양한 사업부에서 풍부한 실무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또한, 그룹 내 고위경영자의 코칭과 멘토링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시야를 확대할 기회도 있어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2차 면접장에 갔더니 테이블에 뜬금없이 절단된 타이어가 있더라고요. 다행히 어느 정도 공부하고 가서 타이어의 구조와 윈터타이어의 특징에 대해 설명했는데 답이 흡족했는지 3차 면접에도 초대받았어요. 당시 미주지역 본사가 위치한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3차 면접을 진행했는데 비행기 티켓은 물론 호텔 투숙부터 렌터카까지 제공해줬어요.


처음으로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탄 비행기로 굉장히 뿌듯하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있어요. 호텔에서 하루 묵고 그 다음 날 면접을 장장 8시간 봤어요. 당시 저와 같이 면접을 봤던 분들은 전부 대학원생들로 저보다 학문적으로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수준이었지만 면접에 임하는 저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아무래도 독일 제조업 기반의 기업이어서 그런지 제가 군 복무를 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콘티넨탈에서 최종 합격을 통보받았고 입사를 제안받았어요. 독일어로 된 40장짜리 계약서가 특수 등기우편으로 날아와서 그것을 받아 든 심정은 엄청 짜릿했어요. 유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미국에서 취업하지 못했는데 외려 유럽계 글로벌 기업 본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독일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적극적이셨어요.


“한국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고 독일로 가. 가서 정 아니면 언제든지 다시 와도 돼. 한국에서 취업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Q. 콘티넨탈 본사에서 10개월 정도 근무 후 KDI 국제정책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어떠한 계기가 있었나요?

독일은 비가 자주 오고 겨울엔 항상 구름만 끼었어요. 오후 2시나 3시면 벌써 어두워지고요. 어두운 집에서 일찍 나와 비를 맞으며 출근하는 건 정말 힘들었어요. 인생의 즐거움이 없었거든요. 연구실에서 타이어를 잘라보고 고무랑 다른 원료들을 분석하는 일도 너무 싫었어요. 지루하고 지겨운 일이었죠.



멋진 정장을 착용하고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지나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어요. 공장에서 날아드는 타이어 분진 때문에 어머니가 취업했다고 해주신 흰 와이셔츠 소매가 검게 변해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종종 입사 동기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날은 그나마 대화도 많이 하고 사람 사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다시 집에 돌아오면 적적하고 외로운 생활이 반복되었죠.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유창한 영어가 통하는 나라를 두고 언어도 안 통하는 이 나라에 왜 온 걸까?”


힘들어질수록 한국에 전화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통화 시간도 길어졌어요. 그때는 선불카드를 사서 국제전화를 하던 시절이었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회사에 건강 문제로 퇴사하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들은 상사가 연구소장과 면담을 잡아주었어요. 연구소장이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동윤, 너 초반에 굉장히 열심히 하고 업무태도도 좋아서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왜 그만두려는 거니? 몸이 정 안 좋으면 계약을 파트타임으로 바꿔서라도 계속 다녀보는 게 어때?”


회사에서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근무 조건 변경이 가능하다고 배려해줬지만 저는 확고했어요. 다시는 독일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퇴사 후 한국으로 귀국했어요. 그 때 그 연구소장이 지금 콘티넨탈 타이어 총괄 부회장으로 선임된 것을 생각하면, 스물세살에 부린 객기로 인해 불이익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KDI국제정책대학원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경제학 박사인 친구가 KDI국제정책대학원을 추천해줬어요. 영어로 수업하고 좋은 교수님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가보니 교수님들도 좋았지만, 동기들도 모두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이 많았어요. 그곳에서 정책학을 석사로 전공하며 컨설팅 기업에서 취직했었죠. 지금의 아내도 KDI국제정책대학원에서 만났어요. 야간 수업 마치고 동기들과 주유소 앞 노포에서 오징어 물회에 소주를 마시던 시절이 종종 그리워요. 똑똑하고 재미있는 선배 동기들이랑 홍릉의 분위기에 취해서 미국에서 못 즐겼던 캠퍼스 라이프를 했었어요.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Q. 2011년 3월 다시 콘티넨탈 독일 본사로 가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생 때부터 컨설턴트가 되고 싶었어요. 전문가로 인정받고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대학원 수업은 다 들었고 논문만 쓰면 되는데 컨설팅 회사에 지원했어요. 외국계 회사였는데 콘티넨탈 타이어에서 받던 연봉의 절반도 안 되는데도 상관없었어요.


근데 일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도 퇴근 못 하는 날이 많았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어요. 똑똑한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건 좋았지만 꿈꿨던 삶이랑은 달랐어요. 외국계 회사라고 해도 기업문화는 국내기업이랑 비슷했어요. 일요일 저녁 제안서를 쓰다가 밤 11시쯤 가까스로 그린 장표 두 장을 가져가면 선배 컨설턴트에게 호되게 혼나기 일쑤였죠.


“이거밖에 못 해? 네 머리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야?”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글로벌 기업에서 인정도 받았는데 머리가 나쁘다고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어요. 너무 당혹스러워서 화조차 나지 않았죠. 대신 이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어요.



비록 폭언하는 선배 컨설턴트였지만 그분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하루는 편의점에서 비타500 한 박스를 사서 그분에게 내밀었어요.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는 제 바람과 달리 그분의 대답은 대리석만큼 차갑고 송곳처럼 날카로웠어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아요.


“대가리 나쁜 너나 많이 마셔. 야, 이거 한 박스 다 마시면 좀 인사이트 있는 슬라이드가 나오려나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SKY를 포함하여 저명한 대학의 MBA 출신의 컨설턴트들이 후배들을 대하는 모습은 제가 기대했던 이상과는 아주 달랐어요. 처음에는 제가 독일에서 근무 경험에서 비롯된 괴리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어요. 물론 당시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주고 멋진 장표를 그려내던 선배들과 인연을 맺게 해준 감사한 직장이었지만,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감수하면서 컨설팅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던 중 독일의 콘티넨탈 타이어가 생각이 났죠. 당시 결혼을 고민하던 시기였고, 여자친구한테 물었죠.


“독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떨까?”


독일에 가게 되면 당시 여자친구는 다니던 직장을 퇴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답을 주었어요.


“그래, 한번 가보자. 내가 최대한 옆에서 도울게.”


제가 고민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가 흔쾌히 동의해줘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죠. 물론 제가 돌아가겠다고 해서 콘티넨탈이 다시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일단 물어보기로 했어요. 며칠 후 독일 콘티넨탈 타이어 인사팀에서 회신이 왔어요. 다행히 제가 일신상의 사유로 퇴사하였고 당시 저의 경력에 맞는 자리를 채용 중이어서 일사천리로 복귀할 수 있었죠. 퇴사 후 국내 대학원을 졸업하고 컨설턴트로서 쌓은 경험을 모두 경력으로 인정해줘서 오히려 상향된 처우로 재취업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가 적극적으로 당시 결정을 지지해줬고 마침 콘티넨탈에서도 채용을 진행 중이어서 가능했어요. 지레 겁부터 먹고 회사에 물어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무척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이번 글에는 미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인해 취업에 실패 후 독일에서 취업한 과정을 설명했다. 다음 글에는 그가 콘티넨탈 해외 지사에 파견되어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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