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건물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구조가 다른 방에 비해 조금 더 넓은 것을 제외하면 사실 크게 다를 게 없다. 심지어 사용된 건축 자재도 같다. 하지만 그곳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잔뜩 긴장한다. 그리고 퇴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각자 다른 이유로 근심이 가득하다. 이곳은 바로 대표이사실이다.
대표이사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들이 겪은 일을 말해준다. 오늘도 어김없이 대표이사의 방을 나서는 한 임원이 있다. 그 임원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빨개진 얼굴로 보아 불편한 대화 혹은 일방적인 피드백을 받은 듯하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 그의 팀원이 호출되었다. 불운한 기운이 감도는 임원방에 입장하는 그녀의 무거운 걸음에서 앞서 임원이 대표이사실 앞에서 보였던 긴장감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방에 들어간 그녀는 몇십 분이 지나도 나올 기미가 없었다. 방음이 완벽한지 그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곧 그녀가 임원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미세한 차이가 느껴졌다. 전과 다르게 눈은 충혈되었고 눈 밑 화장이 그 주위보다 조금 연했다. 마치 파도가 모래해변을 덮치며 모든 흔적을 지운 것처럼 말이다.
임원이 대표이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팀원인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가한 것 같았다. 군생활에서 마주했던 내리갈굼을 직장에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방에서 한참 대화가 오가던 중 나중에는 이런 얘기까지 나왔다.
"상무님, 하시는 일의 중압감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이렇게 저한테 화를 내시면 저는 너무 힘들어요."
"그래요? 그럼 나는 어디에 풀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동안 그분에게 동료로서 개인으로서 갖고 있던 최소한의 존중과 신뢰가 흔들렸다. 사람이 무슨 실타래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을 푼다는 것일까.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당한 모멸과 수모를 팀원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이고 비인간적인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탑재할 수 있었을까? 그런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인 생각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 임원으로 추대받는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날 정도였다.
그렇게 분노를 삭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면 원인 제공자에게 자신이 느낀 불편한 감정과 생각들을 말하고 함께 논의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아닐까. 애꿎은 사람을 불러놓고 똑같이 대우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같은 곳으로 출근하는 이상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남을 대할 때 나 자신을 대하듯 하라는 것은 경영윤리학의 기본 중 기본이다. 같은 기업에 일하는 동료이자 직원을 욕받이를 대하듯 화를 쏟고 함부로 하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얘기하고 ESG를 언급하며 착한 기업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비열하고 부끄러운 장면이다. 단순히 '님’ 문화를 도입한다고 해서 수평적인 조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직 구조를 상하로 억지로 눌러서 체계를 뭉갠다고 없던 존중과 배려가 생기지 않는다. 사실 대표이사가 그런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본이 되어야 하는데 정작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을 포스터로 만들어 사무실 곳곳에 붙인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이런 위선과 낙후된 기업문화 때문에 직장인들로 하여금 이직 혹은 퇴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누구도 타인의 화를 받아내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유치원생도 그렇게 행동을 하면 훈육을 통해 행동교정에 들어간다.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 경력이 있는 사람이 한 단계 성장하고 인정받고 싶다면 주위의 사람부터 존중으로 대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나 또한 그렇게 당했으니 똑같이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치졸하고 비겁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