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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May 16. 2024

"인사팀이 적어주는 대로 질문하고 싶지 않아요."

"질문이 하나 더 있어요."

십여 년 전, 사회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유년시절을 해외에서 보낸 경험과 영어 실력 덕분에 외국계 기업 취업이 국내 기업보다 수월했다. 그렇게 외국계 기업에 인턴으로 입사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팀에서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왔다. 해외 VIP가 서울 사무실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가량 컨퍼런스 형태의 미팅이 진행될 예정이며, 사전에 직원들의 질문을 접수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 정신없이 바쁜 나로서는 질문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 VIP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으며, 우리 법인에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인사팀에서 나에게 특정 질문을 지정해 보내왔다. 내가 영어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본사 임원에게 질문을 맡기고 싶어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내심 불편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인사팀에서는 부담스러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는 굳이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내 마음에 와닿지 않는 부탁을 그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다른 분이 내 대신 그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저 손만 들고 몇 마디 말을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내 뜻과 맞지 않는 질문을 내가 준비한 것처럼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바로 본사 임원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미리 준비된 질문 리스트를 벗어나, 현장에서 즉석으로 질문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마치 정해진 각본대로 진행되는 딱딱한 분위기가 그를 갑갑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결단 덕분에 몇몇 직원들은 사전 검토를 거치지 않은 자유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임원은 마치 영업의 귀재처럼, 날카로운 질문에도 순발력 있게 대응하며 적절한 비유와 유머를 섞어가며 답변을 이어나갔다. 그의 모습에서 풍겨오는 자신감과 여유로움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내 머릿속에는 선명한 대조가 그려졌다. 한편에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로 무장한 글로벌 임원의 모습이, 다른 한편에는 경직되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국내 임직원들의 모습이 마치 두 개의 다른 세계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같은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 문화의 혁신이 시급해 보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새로운 외국계 기업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치 데자뷰처럼 과거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본사 임원이 국내 법인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인사팀에서는 나에게 다가와 임원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업무에 몰두하느라 여유가 없었고, 딱히 궁금한 점도 없었기에 거절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인사팀은 다른 직원이 제출한 질문을 대신 읽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수동적인 업무 방식을 극도로 불편해하는 성격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질문을 살펴보았다. 질문의 내용은 민감하거나 도발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다지 흥미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본사 최고위 임원에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나는 인사팀의 요청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가 나에게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본사 임원과의 미팅 당일, 그는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을 열었다. 첫 번째 질문자로 지목된 나는, 사전에 전달받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임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매우 차분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인사팀은 이제 다음 질문자에게 마이크가 넘어갈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들의 예상을 깨는 발언을 했다.


"질문이 하나 더 있어요."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미팅룸은 숨 막히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 가운데, 나는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본사에서 베트남에 새로운 공장을 세우면서 약 1,400억 원을 투자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200명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하던데, 현지 정부에서는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베트남에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 정작 국내 시장에는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고 혁신을 주도하기에 최적의 테스트베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후 국내 시장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시며, 어떤 투자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질문을 하기로 결심한 후, 나는 임원의 행보를 면밀히 추적했다. 그리고 그가 국내에 오기 전 베트남을 방문한다는 사실과 그 목적이 신규 공장 설립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우리 법인 대표가 본사의 국내 투자 확대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이 직접 상사에게 이런 민감한 요구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발 앞서 나서기로 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다소 불편하고 껄끄러운 질문일지라도 말이다.



나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임원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입을 열었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 법인에서든 이처럼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젊은 직원을 만나게 되는 것 같네요."


그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고 답변을 이어갔다. 국내 시장에는 이미 상당한 투자를 해왔기에,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이가 일할 수 있었고 이 훌륭한 사무실도 얻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향후 추가 투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당장은 명확한 답변을 하기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사실 그에게서 선뜻 긍정의 답변을 듣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내 임직원들이 품고 있는 기대와 염원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다. 미팅이 끝난 후, 국내법인 대표는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며 정말 훌륭한 질문이었다고 칭찬했다.


물론 그날 이후로 인사팀에서는 다시는 나에게 질문을 부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가 내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이 경험은 내게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작은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조직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변화와 혁신은 늘 도전과 마찰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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