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과 실천 사이: 테헤란로에서 배운 리더십의 본질
사무실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이미 분주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나와 만나기로 한 창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아침에 운동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직원들이 열정적으로 업무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대표이사는 여유롭게 운동을 즐기고 돌아왔다. 외국계 기업에서만 근무하다가 처음으로 스타트업에 합류해 만난 창업가였기에, 나는 리더십에 대한 내 기준이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투자금으로 겨우 버티며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과연 이것이 리더가 보여주어야 할 모습일까?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자들, 예를 들어 초기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나 에어비앤비의 브라이언 체스키는 오히려 직원들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근하여 팀과 소통하고, 회사의 성장 전략 수립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런 잡다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을 때쯤 그가 불쑥 던진 한마디가 내 귀에 들어왔다.
"저는 큰 그림을 그릴 겁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큰 비전을 세우고 회사를 성장시키겠다는 포부겠지. 하지만 그의 말투와 태도에는 마치 이미 대성공을 거둔 듯한 과도한 자신감이 배어났다. 실제 행동은 뒤따르지 않는 허황된 포부, 성실함과 실행력은 찾아볼 수 없는 자만심만 가득했다. 이런 리더십이 과연 이 회사를 어디로 이끌지, 깊은 우려가 밀려왔다.
'큰 그림'이라는 그의 표현은 분명 야심 찬 포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현실적인 계획과 구체적인 실행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스타트업 세계에서는 비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끈기인데 말이다.
이런 모습은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기업의 리더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곳의 리더들은 겸손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중시했다. 화려한 비전을 말하기보다는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으로 팀을 이끌었다.
자연스레 이전 기업에서 배웠던 리더십의 핵심 가치들이 떠올랐다. 'Walk the talk', 'Practice what you preach',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이 격언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진정한 리더십의 본질을 담고 있었다.
'말한 대로 행동하라',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라', '말보다 행동이 더 큰 소리를 낸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리더는 단순히 비전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솔선수범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비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계 기업에서의 경험과 테헤란로의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겸손과 실천을 중시하던 그곳과 달리, 테헤란로는 마치 자아도취의 열병이 만연한 듯했다. 'Fake it till you make it(성공할 때까지 성공한 척하라)'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미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단기적으로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 수는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건전한 기업 문화를 해치고 실질적인 성과 창출을 저해할 위험이 크다. 진정한 성공은 그럴듯한 말이 아닌 꾸준한 노력과 실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탠퍼드 대학의 로버트 서튼 교수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문화를 연구한 저서 "The No Asshole Rule"에서 과도한 자신감과 독선적인 리더십이 기업의 성장을 오히려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연구는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겸손하고 열린 태도를 지닌 리더들이 이끄는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성과를 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려했던 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투자 유치 이후, 대표이사는 더욱 권위적으로 변했고 소통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의견 충돌은 잦아졌고, 그가 내 능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그를 이 회사라는 배의 선장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우리의 배는 예견된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던 '큰 그림'은 허황된 꿈에 불과했고, 우리는 작은 스케치 하나 완성하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내게 값진 교훈을 남겼다. 이제 누군가 '큰 그림을 그리겠다'라고 호언장담할 때면,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한다. 진정한 리더십은 그림을 구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색을 칠하고, 액자를 만들고, 그림을 세상에 선보이는 전시회까지 기획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과정에 리더가 솔선수범하여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큰 꿈을 꾸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노력과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림은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 그리고 겸손한 자세가 있어야만 진정한 걸작이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테헤란로의 그 아침에 배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되새길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