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인후 Dec 03. 2024

미팅 중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던 투자자

한 스타트업 창업가가 마주한 벤처 투자의 민낯

2024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설렘과 긴장감을 안고 한 투자사와의 미팅에 참석했다. IT 아웃소싱 프로젝트의 실패율이 94%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를 혁신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겪고 있는 프로젝트 관리의 고충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투자자들도 이 가치를 알아봐 주리라 기대했다.



"30초 안에 설명해보세요" - 시작부터 틀어진 미팅


"사업계획서는 이미 검토했으니, 30초 안에 핵심만 말씀해 보세요."


투자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로질렀다. 그의 말투에는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다는 듯한 무례함이 묻어났다. 우리가 수개월간 준비한 자료들은 그에게 그저 스쳐 지나간 서류 더미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자금 조달이 절실했던 우리는 침착하게 핵심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IT 아웃소싱 프로젝트의 성공률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혁신적인 플랫폼이라는 점, 이미 여러 기업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30초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 우리의 가치를 담아내려 애쓰는 동안, 그의 표정에서는 어떤 관심도 읽을 수 없었다.


잠시간의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오갔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1,000에서 5%가 성장하면 얼마죠?"


순간 당황스러웠다. 마치 불시에 치러지는 수학 시험 같았다.


"50입니다."


천의 5%를 계산한 내 답변에 그가 즉각 고개를 저었다.


"1,050이죠."


그의 의도는 1000 × 1.05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질문이 불명확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은 채, 마치 초등학생을 가르치듯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매주 5%씩 일년간 성장하면 얼마인 줄 알아요?"


"글쎄요. 52승을 적용하면 되겠지만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1년이면 12,643이 되요."


그는 마치 대단한 통찰을 전달하기라도 한 듯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자신이 준비한 진짜 펀치라인을 날렸다.


"천 명의 유료 고객을 확보하고 매주 5%씩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면 그때 투자를 고려하겠습니다."


그토록 긴 수학 수업은 결국 이 한 마디를 위한 것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각본이 있었던 것처럼, 그는 이 결론을 향해 대화를 이끌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매주 5%씩 성장하면 투자가 필요할까?


그가 언급한 천 명의 유료 고객, 매주 5%의 성장률. 이것은 더 이상 벤처 투자가 아닌 은행 대출 심사장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벤처 투자의 본질은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적인 기업의 성장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미 검증이 완료되고 리스크가 전혀 없는 사업에만 투자하겠다는 그의 태도는 '벤처 캐피탈'이라는 간판이 무색했다. 매주 5%씩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이라면,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벤처 투자일까? 오히려 더 낮은 금리의 일반 금융권 대출이 더 매력적인 선택이 되지 않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대표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이미 천 명의 유료 고객을 확보하고 매주 5%씩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면... 굳이 벤처 투자보다는 일반 대출을 찾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요?"


그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더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기업의 가치를 국내 시장만을 기준으로 500-600억으로 한정 짓더니, IPO 시 투자 수익률이 17배에 그쳐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시드 단계에서 벌써 IPO까지 계산하고 있다니,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님, 그렇게 IPO까지 내다보고 계시다면, 시드 투자에서 그치지 마시고 시리즈 A에서도 과감하게 투자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지분 희석도 덜하고 최종 수익률도 더 높아질 텐데요."


우리는 진심을 담아 글로벌 시장 진출 가능성과 향후 추가 투자를 통한 수익률 제고 방안까지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굳게 닫힌 시야는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찾던 것은 단순한 자금 공급자가 아닌, 우리의 비전을 이해하고 함께 성장할 파트너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저 투자 수익률 계산기에 불과했다.



"그들의 '우리'와 우리의 '우리'" -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개의 시선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해져가는 그 순간, 나는 최근 만났던 다른 벤처캐피탈 대표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경직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희가 최근에 다른 투자사 대표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시드 단계의 스타트업에게 벌써 IPO를 논하는 건 마치 갓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마라톤을 완주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갔다.


"그분 말씀으로는, 시드 투자자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다음 라운드인 시리즈 A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다음 단계의 투자자들이 우리 기업의 비전에 공감하고 함께하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도 자신이 속한 투자사보다 규모가 크고 인지도가 있는 투자사의 이야기가 언급된 것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투자사는 그 투자사고, 우린 우리예요."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은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네, 그렇죠. 우리도 우리입니다."


마치 오래된 메아리처럼 그의 말을 되돌려주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스타트업과도 같지 않습니다. 복제된 비즈니스 모델도, 베낀 기술도 없죠. 그렇기에 우리는 천편일률적인 잣대가 아닌, 우리만의 고유한 가치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마치 대표님의 투자사가 다른 투자사와는 다르다고 하신 것처럼요."


회의실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서로가 '우리'라고 했지만, 그 '우리'의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의 '우리'가 기존 질서에 안주하겠다는 선언이었다면, 우리의 '우리'는 그 질서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투자 실패가 축복이 되는 순간" - 깨달음의 시간


예상대로 투자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이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결말이었다. 우리의 비전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투자자와 주주로 맺어지는 것은, 마치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두 사람이 같은 차를 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때마다 우리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주주가 있다면? 의사결정은 지연되고, 기업 문화는 왜곡되며, 결국 후속 투자 유치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 부적절한 투자자와의 파트너십은 단순한 불협화음을 넘어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이 될 수 있다.


호기심에 이끌려 그 투자사의 최근 이력을 조사해봤다. 아이러니했다. IPO에 그토록 집착하던 그들은 최근 3년간 단 한 건의 IPO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투자 집행 실적도 미미했다. '우린 우리'라며 호언장담하던 그들의 실체는 공허했다. 어쩌면 그들에겐 투자할 자금조차 바닥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과도한 성장 지표를 요구하던 그들이, 정작 스스로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씁쓸한 웃음을 자아냈다.



이번 경험은 분명 실망스러웠다. 때로는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실패는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남겼다. 자금이 아무리 절실해도, 우리의 가치와 비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것. 당장의 투자 유치 실패는 어쩌면 올바른 파트너를 찾아가는 여정의 필요한 한 걸음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더 분명히 안다. 모든 투자금이 좋은 투자금이 아니며, 모든 투자자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때로는 투자 유치의 실패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단순히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아니다. 우리의 비전을 함께 그려나갈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와의 만남,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찾아 나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No'들은, 어쩌면 우리를 진정한 'Yes'로 인도하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