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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Oct 16. 2024

"한 달 전 보낸 자료를 오늘 처음 본다고요?"

긴박한 25분 만남, 그 이면의 준비 없는 현실과 허울뿐인 기대

6월 초의 삼성역 코엑스 행사장, 초여름의 따스한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또다시 넥스트라이즈의 웅장한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매년 이맘때면 이곳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도전의 장이 되어왔다. 마치 스타트업계의 올림픽과도 같은 이 축제에서, 나는 수많은 꿈 꾸는 창업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미래를 그려왔다.


밀려오는 인파를 따라 행사장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과 함께 활기 넘치는 에너지가 온몸을 감쌌다. 메인 무대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열정적으로 강연 중이었고, 그의 통찰력 있는 조언이 행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국내외 스타트업계의 거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테크 기업의 CEO, 유명 엔젤 투자자, 그리고 성공한 시리즈 창업가들까지. 마치 스타트업 세계의 별들이 한자리에 집결한 듯했다.


넥스트라이즈,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이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잠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6월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이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오늘, 이 거대한 무대 위에서 나의 작은 꿈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넥스트라이즈, 그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닌 미래를 향한 우리의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초여름의 햇살처럼 밝고 뜨거운 꿈들이 이곳에서 꽃 피우길 기대하며, 나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곧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올해의 하이라이트, 투자사와의 1:1 밋업. 3000건이 넘는 밋업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은 축복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한 달 전, 밤잠을 설쳐가며 국문과 영문으로 사업계획서를 다듬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열정과 기대감이 다시 한번 가슴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딩동!" 날카로운 종소리가 행사장을 가르며 밋업의 시작을 알렸다. 마치 군대의 구령대처럼 정확히 25분마다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창업가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나갔다. 행사장은 거대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냉정하게 돌아갔다.


넥스트라이즈,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다음!" 스태프의 외침에 나는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귓가에서 쿵쾅거렸다. '25분 만에 우리의 열정과 비전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문이 스쳤지만,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밋업 테이블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미리 외워둔 좌석에 도착하자, 인상 좋은 젊은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의 미소에 잠시 안도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안녕하세요, 사실 제가 여기 사업계획서를 읽어보지 못했어요.”


그 한마디에 당혹감을 숨기기 어려웠다. 한 달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한 우리의 열정과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느낌이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실망감을 겨우 꾹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심사역님이 먼저 밋업을 요청하셨는데, 무엇을 보고 신청하신 거죠?"


그 순간만큼은 정말 궁금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엑셀에 기재된 기업명과 사업을 소개하는 한 문장만 보고 선택하였어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사업계획서를 보지 않았다니. 도대체 왜 미팅을 요청한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채, 나는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그는 최근 펀드 조성 준비로 바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치솟는 분노를 억눌렀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기에, 그의 변명을 더 듣는 건 나중으로 미뤘다.



25분.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의 꿈과 비전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막막해졌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우선 저희 사업계획서를 빠르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마치 고지대에서 달리듯 숨 가쁘게 회사의 창립 배경,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그리고 우리만의 독특한 해결책을 설명했다. 그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우리 사업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전에 알았어야 할 내용을 이제야 파악한 것이다. 그의 태도에 내심 혀를 찼지만, 표정 관리를 하며 예상 가능한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이 분야에 투자할 수 있는 펀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기업 내 관련 부서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떨까요?"


실망감을 누르며 나는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린 내용을 명함에 적힌 이메일로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25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듯, 나는 가방에서 내가 공저한 책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미소 지으며 책을 받았다.


황당한 밋업이었지만, 나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고 믿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곧바로 사업계획서를 첨부한 이메일을 보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쓰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결국 진행 상황을 묻는 후속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을 받았다.


"해당 이메일 주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메일 반송 메시지를 보는 순간, 충격과 함께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바빴던 이유는 그가 말했던 펀드 조성이 아닌 자신의 이직 준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퇴사를 앞둔 상황에서 새로운 스타트업을 진지하게 검토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그가 갑자기 해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누군가를 해고하는 데도 분명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있을 터.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을 리는 없다고 믿고 싶었다.


이 모든 추측들 사이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노력이 허공으로 날아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퇴사 이유가 무엇이었든, 최소한의 직업윤리는 지켜졌어야 했다. 단 한 통의 이메일만으로도 이 모든 황당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일반 기업에서도 담당자가 바뀌면 간단한 인사와 함께 새로운 담당자를 소개하는 것이 관례다. 하물며 스타트업의 미래가 걸린 투자 업계에서 이런 기본적인 매너조차 지켜지지 않다니.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그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지목해 밋업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관련 부서 소개까지 본인이 제안했었다.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업계의 관행'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이다.


이번 넥스트라이즈 경험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상호 존중과 효율적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투자자가 한 달 전에 제출된 사업계획서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미팅에 임한 것은 이미 짧은 25분이라는 시간을 더욱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창업가의 시간과 노력을 경시하는 태도로 보였다.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시간은 그 무엇보다 귀중한 자산이다. 특히 초기 단계의 기업에게 25분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최근 참가했던 경기 스타트업 서밋은 상호 존중과 효율성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밋업에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사전에 자료를 꼼꼼히 검토해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미리 한 번이라도 정독을 한다면 1시간이 아니라 30분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이러한 준비 덕분에 기본적인 설명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핵심적인 논의와 심도 있는 질문이 오갈 수 있었다.


경기 스타트업 서밋,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이 대조적인 경험은 스타트업 생태계의 발전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투자자와 창업가 모두가 서로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고 효율적으로 소통할 때, 생태계 전체가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사전 준비, 집중된 논의, 그리고 상호 존중은 개별 미팅의 질을 높이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발굴과 성공적인 사업화를 촉진한다.


이러한 원칙이 실천된다면,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진정한 '린 스타트업'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 이는 더 많은 혁신과 가치 창출로 이어져 경제와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밋업의 질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창업가는 충실한 사업계획서를, 투자자는 사전 검토를 통해 상호 존중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 넥스트라이즈 같은 대규모 행사도 미팅 건수보다는 각 미팅의 의미와 생산성에 주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스타트업 생태계의 진정한 발전은 상호 존중과 효율적 소통에서 비롯된다. 투자자와 창업가가 서로의 노력을 인정하고, 충분한 준비로 생산적인 미팅을 이끌어내는 문화가 정착될 때, 우리는 더욱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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