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7월의 어느 날 저녁, 사무실 앞 번화가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나와 동료들은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섰다. 최근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인해 이런 늦은 저녁 식사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동료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다.
"거래처예요. 잠깐만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아마 단순한 문의겠지'라고 생각하며 주변 상점들의 네온사인을 헤집고 한 식당에 먼저 들어섰다. 10분이 한참 지나 동료가 통화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왔다. 고기 굽는 소리와 연기로 가득한 식당 안에서 그의 표정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데 동료가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일을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저도 같이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 거래처와의 화상 미팅 준비를 했다. 동료는 내가 함께하는 것에 대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혹시 너무 강하게 나가실까 봐 걱정돼요. 상대방이 꽤 예민한 상황이에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미팅이 진행되면서, 거래처 담당자의 무례한 태도에 점점 짜증이 났다. 그는 우리 동료의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시 설명해 보세요."
동료가 다시 차분히 설명을 시작하자 거래처 담당자는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리 사장님이 어떻게 이해하시겠어요? 다시 설명해 보세요!"
거래처 담당자의 말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동료를 마치 부하직원 다루듯 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게 충분한 답변이 된다고 봐요? 저희 대표가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을 하라고요!"
동료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같이 일하는 동료 OOO입니다."
순간 화상 통화 속 모두가 놀란 듯 침묵했다.
나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이사님, 제가 옆에서 들었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둘게요. 우리는 갑을 관계가 아닙니다. 귀사는 채무자이고 저희는 채권자입니다. 지금 논의해야 할 건 귀사의 미지급액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동료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하실 권리는 없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덕분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사님, 듣고 계시죠?"
그가 이전과는 다르게 나지막이 답했다.
"네..."
나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사님,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볼게요. 귀사의 사장님께 현재 상황을 보고하셔야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지금 계속 듣다 보니, 저희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렇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정작 이사님께서 직접 보고하실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저희가 이사님께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요? 저희가 그냥 이사님이 보고하는 사장님에게 말씀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거래처 담당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제야 나는 상황의 본질을 깨달았다. 거래처 담당자는 자신의 상급자에게 현재의 채납 상황을 설명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그 부담을 우리에게 떠넘기려 했다. 문제는 그런데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책임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너무나도 비생산적인 질문들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내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거래처 담당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갑자기 그가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미팅은 급작스럽게 마무리되었다. 화상 통화가 끊기고 회의실에 남은 우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동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상황이 정리된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료의 표정에는 여전히 걱정이 남아있었다.
"근데 좀 걱정돼요. 그 이사님, 얼마 전에 공황장애로 힘들어하셨거든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우리 팀의 배려 깊은 태도에 감명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래도 가장 큰 피해자는 우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아꼈다. 며칠 후,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동료가 나를 찾아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날 거래처 이사님이... 당시 만취 상태로 미팅에 임하셨대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분노와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정말요? 그런 상태로 미팅을... 우리가 걱정하고 배려했던 게 무색하네요."
동료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저도 너무 당황스러워요. 평소 공황장애가 있던 분이라 그분의 건강과 정신 상태를 걱정했는데 말이죠."
이 사건은 업계의 불편한 현실을 다시 한번 직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업계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관행이라 받아들여선 안 된다.
갑을 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한쪽의 권력 독점과 다른 쪽의 종속적 지위를 전제로 하는 이 낡은 구도는 이제 과감히 버려야 한다. 비즈니스는 평등한 주체들 간의 거래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다른 이가 무조건 따르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와 가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교환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누구든 이제 '을'의 입장에서 벗어나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물어볼 것은 물어보고, 받아야 할 것은 명확히 요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비즈니스 관계다. 더 이상 일방적 배려나 눈치 보기는 없다. 오직 명확한 소통과 공정한 거래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변화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낡은 관행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금부터 대등한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선언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업계에 진정으로 필요한 혁명적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