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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May 10. 2020

"프로젝트 한번 담당해볼래?"

신입사원, 600명 전 직원 대상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다.

2012년 어느 나른한 오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난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뜨는 숫자들과 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속한 재부 부장님이 부서 가까이 위치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회의실 밖으로 향하지 않고 오직 그의 눈만 마트 계산대의 스캐너처럼 부서원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고 이내 내 차례가 되었다. 평소 아이컨택이 몸에 밴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며 응수했다.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위아래로 휘저으며 말했다.


"OO씨, 잠깐 회의실로."


그렇다. 당시 직급 대신 이름으로 불리던 신입사원이었다.

당시 회사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회의실에 들어갔다.


Pixabay 님의 사진, 출처: Pexels


"OO씨, 프로젝트 한번 담당해볼래?"


지금 담당업무도 헤매는데 나보고 프로젝트를 해보라고? 부서원들 중에 내가 지정되기까지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리들에게 할당하기엔 업무 중요성이 낮거나 시간 소요 크거나 둘 중 하나 이리라.


"신입사원인 OO씨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스위스 본사와 커뮤니케이션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프로젝트야. 해보지 않을래?"


신입사원에겐 출퇴근도 큰 경험니다. 반항심 가득한 눈빛으로 목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업무를 가려가며 할 처지가 못됐다. 정작 무슨 프로젝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체 그렇게 외국계 회사의 600명 이상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의 매니저가 되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그래, 신입사원인데 뭐 얼마나 어려운 일 시키겠어. 어찌 되겠지. 일단 못 먹어도 GO.'


당시 결정이 후에 얼마나 해프닝을 불러올지 모른 체 나 스스로 쿨내를 뿜어댔다.


프로젝트를 살펴보니 '내부통제 자가평가'로 전 세계 법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도 통제가 안되는데 이 큰 기업의 내부통제라니. 20여 년 전 미국 뉴저지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예측불허 사춘기 소년이었던 내게 당시 미국인 교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James, you need to control your temper."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내 안의 화도 겨우 다스렸더니 이제 남의 화를 다스려야 할 차례가 왔다.


의외로 내부통제 자가평가는 단순했다. 프로젝트 총괄인 내가 답해야 하는 자가평가 질문지를 600여 명의 직원 중 담당자들에게 할당하면 그들이 현재 업무방식을 토대로 질문에 답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기준을 충족시키는 업무방식이 아니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기준에 합당한 업무방식으로 바꾸거나 도입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월 300백만 원 버는 직장인에게 월 200만 원을 저축하기 위해서 무엇을 절약하고 있는지 그리고 절약 방법 혹은 결과가 적절치 않을 경우 해결방안을 강구하여 매달 200만 원 저축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계획서를 받아내는 것이다.


Bich Tran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이렇게 단순하지만 귀찮은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글을 600명을 대상으로 이메일을 배포했다. 다음 날 10명도 안 되는 직원분들이 프로젝트에 관련하여 문의하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적어도 이 분들은 내 이메일을 읽고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은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그 외엔 별 다른 진척이 없었다. 아무래도 신입사원이 총괄하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고민이 짙어가던 그때 이전에 BMW에서 인턴 하던 시절 매일 같이 전국 도의 딜러들의 판매대수를 보고하던 것이 생각났다. 이윽고 다음 날 나는 부서별로 진행상황을 %로 표기하여 전 직원 이메일을 배포했다. 물론 임원들도 모두 참조로 넣었다. 응은 폭발적이었다.


Burst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 최대한 빨리 작성할 테니 잠깐 자리에 와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분들.

두 번째, '넌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민감한 사항을 전 직원 이메일로 발송하냐는 분들.


우선 1:1 족집게 과외를 요청하신 분들은 성심성의껏 응대했다. 영문 독해가 어려우면 옆에서 번역해주고 온라인 평가툴이 익숙하지 않으면 정확히 어디를 클릭해야 하는지 알려드렸다.


부서별 공정률 배포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던 분들은 종종 나를 불러 본인에게 업무가 과다하다며 성토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화를 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하며 이렇게 신입사원은 또 하나를 배운다.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 시키는 거야?!"


Pixabay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수차례 재촉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한 분을 방문였는데 무턱대고 내게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참고로 입사 후 그 분과 처음 나눈 대화였다. 무방비 상태에서 훅 들어오는 칼날과 같은 독설에 나의 모든 신경이 굳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신입사원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이후 내게 남은 것 좌절감과 모욕감이었다. 많은 동료직원분들이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렇게 윽박을 지르다니. 내가 이러려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피 터지게 공부를 한 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무너진 멘털을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과장님, 바쁘셔도 추후 감사 검토사항이어서 필히 하셔야 합니다. 작성법은 제가 알려드릴게요."


내 안에 내재된 서비스 정신을 모두 끌어모아 미소로 응대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분을 '미완료'에서 '완료'로 재분류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관련 프로젝트로 여러 명을 재촉하였고 나 또한 수없이 많 불평을 들어야 했다.


어느 날은 외국인 임원이 내 직통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bongkarn thanyakij 님의 사진, 출처: Pexels


"Hello, can you come to my room immediately?"


이 분도 온라인 평가툴 관련하여 질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이전에 그와 독대한 적이 없었다. 그의 방 주위에 적막한 공기가 가까운 미래를 암시하였지만 내 분위기 인지 감수성은 비활성화된 상태였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그가 나에게 앉기를 권했다.


'오잉. 모니터를 같이 보며 사용법을 설명드려야 하는데 왜 앉으라고 하는 거지?'


의아했지만 난 그의 책상 건너편 의자에 마치 클라이언트인 것 마냥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Now, can you introduce yourself?"


'느닷없이 자기소개를 하라니? 마케팅으로 날 차출하려고 하나? 내가 커피 마케팅을 한다고? 커피도 안 마시는 내가?'


순식간에 여러 생각과 가능성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라졌다.


"Well, I am curretly stationed in Finance Department and responsible for monthly end closing..."


내가 속한 부서와 담당하는 업무를 나열하던 때였다.


"No, that's not what I am asking. I want to know about you."


업무 관련한 설명이 아닌 나를 소개하란다.

외국인 임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종 갑질인가?

그래 그깟 스무고개 내가 응대해주마.


"Basically, I grew up in United States graduating middle school, high school and..."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얘기를 했더니 그가 웃으면 말했다.


"OK, that explains why you are very much direct and stragihtforward."


Andrea Piacquadi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3대 수학 미스터리의 해법을 하나 찾은 것 마냥 아주 흡족해하며 말했다. 나의 직설적인 화법에 대한 답이 나의 유년시절에 기한다며 내 주위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을 마치 내가 오늘 태어나 청각이란 기능을 처음 장착한 듯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Technology is very beneficial and e-mails are very much convenient, but, sometimes, it is better to talk directly to a person."


기술의 진보로 인해 인류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짧게 설명하더니 이메일보다는 직접 대화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주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거지?'


외국인 임원에게 보고하는 매니저에게 내가 8번째 독촉 이메일을 보낸 것이 이 대화의 도화선이었다. 사실 이메일을 애용하는 것은 업무를 모두 기록하기 위해서인데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접근이라니. 남은 599명은 언제 다 만나지? 그래, 만나보자 만나봐!


"부장님, 안녕하세요. 내부통제 자가평가 때문에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


Photo by Christin Hume, 출처: Unsplash


그렇게 5분도 채 되지 않아 이해를 시켰고 그렇게 또 한 분을 '미완료'에서 '완료'로 재분류하였다. 이제 598명 남았다. 그 후, 모든 내용이 이메일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더 선호하시는 분들에게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더 적극적으로 시전 했다. 때론 직원들의 불평, 불만을 들어줘야 했지만 어느 분들은 자리로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다. 물론, 기록과 진행상황 공유 목적으로 이메일도 계속 배포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절대 줄지 않을 것 같았던 미완료자가 600명에서 0으로 줄었다. 본사에서 해외법인들에게 요청한 데드라인을 무려 한 달 앞서 프로젝트를 완수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 CFO가 기한보다 훨씬 일찍 완료한 것에 대해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


"Are you sure we completed this self-assessment correctly?"


정말 다 마친 거냐며 묻는 외국인 임원의 질문에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 찬 어조로 대답했다.


"슈어, (와이낫)~"


Photo by HIVAN ARVIZU, 출처: Unsplash


그렇게 내 직장생활 첫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처음이라 어설픈 면도 있었지만 처음이라 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컸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좋은 경험을 했다. 같은 이메일도 사람마다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 차이가 있다는 것도 배웠다. 무엇보다 600명이 넘는 전 직원 대상 프로젝트를 하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짧은 시간 내 알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는 이 프로젝트가 나중에 내 직장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더 큰 프로젝트를 맡을 때도 이번 프로젝트가 레퍼런스가 되었고 이를 통해 스위스 본사에서도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에게 낯설고 불편했던 이 첫걸음이 내 직장생활에서 가장 의미 있는 진보였다는 걸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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