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가는 것, 붙잡는 것

2019년 부엌에서 문득

by Extraordinary

우리는 태어나서 주어진 많은 잣대들에 저항하며 살아가는데, 그 중 하나를 꼽자면 '간사함'과의 투쟁이 있다. 사회적으로/관계적으로 간사해보이지 않으려고, 또는 자존감 아래 간사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많은 갈등을 한다.

심지어 혼자 있는 시간에도 그러하다. 방금 집에 쟁여둔 캔맥주를 땄는데 거품이 흘러내려 책상이 흠뻑 젖었다. 책상에 놓인 비싼 티슈를 쓰지 않으려고 굳이 거실의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서 휴지가 흠뻑 맥주를 머금을 때까지 열심히 닦으면서도, 내 손이 쥐고 있는 곳까지는 물이 머금도록 닦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어느 날 한적한 넓은 보도를 걸을 때 한껏 만족하면서도 그 옆을 운전하며 지나갈 땐 저 광활하며 쓸모없는 인도가 원망스럽곤 하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며 마음 한켠에는 본능적으로 표출되는 나의 간사함에 죄책감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참 간사해'라고 말하면 모두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지만 누군가를 지목하며 '너는 참 간사하다'고 말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하며 굳어진 안색으로 '내가 왜? 라고 반문할 것이다. 여느 동물이 그러하듯이, 살기 위해서 인간은 굉장히 많은 기로에 서서 '본능에 충실한 간사한 선택'을 하고, 그것의 불가피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간사했던 시간들'을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치장하고 '나는 동물 위의 사람임을 강조'한다.

온전히 간사해지지 않으려면 많은 본능적인 선택을 포기해야 하고, 내가 아닌 그 외의 그 주변의 내면에 대해 많은 이해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또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들수록, 나의 닳고 닳은 렌즈가 이해의 관점 측면에선 넓어진 듯 보이지만, 깊이의 가늠이 필요한 이해는 에너지의 소모가 부쩍 느껴진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윤동주의 시는,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몸둘 바를 모르는 것일까 - 그 당시 잦아드는 고국에 대한 절망과 무기력함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겠지만, 아래 구절에서 마치 나의 본능적인 간사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하다.

타들어가는 초의 심지를 보며 애태워야 할까, 촛불의 아름다움만을 누려야 할까.

풍화작용 중인 거울 속 자화상을 보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한다.

.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 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작가의 이전글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