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葬, 황야의 언덕배기에서, 까마귀와, 독수리와, 시다림하는 스님과,
새 옷처럼 산뜻하게 세탁된 바지를 입었다
그런데 뒷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넣었다 빼니
다 해진 종이조각들이 게워내듯 쏟아진다.
영문도 모른 채 그 곳에 꽂혀
잊혀졌다가
왜 그 곳에 있었는지조차 잊었다가
내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게
물살에 헤집어지고 빙글빙글 돌아서
적혔던 활자는 이제 깃든 바 없고
먼지처럼 부스려져 산골(散骨)만 남았다.
그것마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책상에 앉아
곱게 말려 있던 그림 도화지를 편다
도화지를 부여잡고 있던 고무줄은 무심히 툭, 퉁겨 날아가고
튀어 오른 도화지는 말려 있던 모양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반듯하게 펴보려 노력해봐도
그간 길들여진 세월의 자욱만 깊어져가며
널부러져 있었다, 쉬익거리며.
마음에 덮인 주단은 낡고 닳아 표피가 드러나고
말라붙은 듯한 굳은 살이 배긴 지도 모르게
내가 사는 세상의
7부 능선 어디쯤이라 믿는
지금 여기의 어딘가쯤까지
흘러흘러 살아서 왔다.
길들여짐에 익숙해져가며,
그걸 '탁월한 적응'이라고 했다 - 혹자는, 낙천적인 사람은, 별이 별을 만나는 꿈을 꾸는 사람은.
나는 살아남았다고 믿으며 들숨고 날숨고 살아왔지만,
이젠 구겨진 자국뿐인 도화지와
세탁기 속의 먼지꾸러미같은
속상한, 사실은 무기력한
무어라고 이름을 붙이기조차 비루한
그런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문득 그것을 내 生의 조각들이라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살아남은 것인지 죽어남은 것인지
차마 말해낼 수 없고
차마 말해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잘 쥐어지지도 않는 그것들을
그저 꽉, 쥐고있기밖에 할 수가 없어서
짓는 눈물조차 증발해 버릴 듯한 無力함에
그저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깜빡거리며
풍화작용하고 있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