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시간

by 노엘

부드러운 밤바람이 불었다. 회색 캐시미어 스웨터 한 장에 얇은 겨울용 셔츠재킷만을 걸쳤는데도 온화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영상이겠는데 싶어서 본 기온은 +3도였다. 어쩐지 춥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후에 식사 이야기가 있었고, 이동하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스튜디오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먹은 뒤에 오랜만에 집까지 걸었다.


가볍게 술을 한 잔 마시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오랜만에 걷는 연희동 밤길은 정겹고 포근했다. 인적이 드문 길에선 마스크를 벗고 깊은 호흡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새삼스레 행복한지, 하루 종일 촬영을 했으면서도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돌아오는 계절인데, 피부에 와닿을 때마다 그리웠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든다. 한산하고 고요한 거리엔 작은 가로등 불빛만이 밤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지난 상점들은 하나 둘 정리를 하거나 이미 불이 꺼져 있었고, 고개를 들어 벚나무를 보면 왠지 꽃이 피어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많이 웃은 덕분인지 발걸음은 가벼웠고, 오랜만에 슬프지 않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금세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전화를 받고 일어나서는 적확한 말들을 찾느라 한참 고생을 했는데, 꿈속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다시 눈을 뜬 건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해가 뜰 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멍하니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물론 중간에 휴대폰을 들어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아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 번 깬 잠은 다시 불러오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동안 많은 감정들이 무너져 있었다. '이제 와서 왜'하고 생각이 들 만큼 쉽지 않았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웠던 날들에도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랜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은 비껴갈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정서를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다져온 오타쿠의 기질인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만났던 여자아이가 해주었던 말이 있다. "사진을 보면서 늘 생각해, 오빠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예쁘게 보일까." 그 무렵의 나는 사진이 어떠한 결핍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한 마디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아주 큰 방향으로 전환시켜 주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나보다 그 여자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 분명 훨씬 더 아름답고 예뻤을 것이다.


사람들은 즐겁고, 세상은 자세히 바라보면 여전히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다만 너무 많은 것들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리라. 같은 시간을 살아야만 한다면, 나도 즐거운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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