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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워리 Jan 10. 2022

현실도피는 나쁜 게 아니야

나의 첫 유럽여행 회상기 01






  때는 2016년, 막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매년 제자들을 데리고 해외학회를 자주(적어도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나가는 능력 있는 분이셨는데, 학부생들에게도 '연구비 많이 따오는 부유한 실험실'로 꽤 유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해외학회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별생각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 같다.



  아니, 해외를 가고 싶어서 대학원을 진학하다니, 그게 말이 되나? 모르겠다.

교환학생이니 어학연수니 하는 그런 건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고, 영어에도 자신이 없어 혼자서는 선뜻 해외로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신입사원 채용 시 졸업자보다 졸업'예정'자를 더 우대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터라, 취준생들은 졸업유예도 많이 신청하고 커리어 쌓느라 바쁘다고들 했다. 기약 없는 취업전쟁에 뛰어들어 시간을 낭비하느니 석사과정 밟으며 교수님, 선배들과 함께 해외로 학회 다니는 모습이 당시의 나에겐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왜 그렇게 어렸나 싶다.



  아무런 고생도 없이 면접 한 번으로 수월하게 입학한 대학원. 그러나 석사과정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군대식 문화, 몇몇 선배들의 말도 안 되는 텃세, 살인적인 실험 스케줄, 주말도 반납하며 해야 했던 연구, 논문, 발표 연습... 대학원이 장난인 줄 알아? 어디 감히 놀고먹으면서 해외를 가려해? 라며 모두들 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딱 하루만 쉴 수 있었고, 토요일 저녁 퇴근할 땐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지만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그만두면 무얼 해야 하나, '대학원 중퇴'가 커리어에 흠집을 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무섭기로 유명했던 한 선배가 맡긴 실험이 내 실수 때문에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내가 그렇게나 가고 싶었던 '해외학회'를 마침 가있었던 그 선배는, 귀국하자마자 가만 안 두겠다며 내게 온갖 폭언을 했다. 우울함이 땅 밑까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해외학회' 한 번을 나는 못가보고 결국 반년만에 대학원 중퇴를 했다.



   그렇게 현실도피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에게 죄송스럽다. 잘하고 있던 본인 실험도 망쳐놓고, 뻔뻔하게 도망치다니. 하지만 나로선 그렇게 도망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쌓였던 과로와 스트레스가 극심했고, 대학원 공부가 이런 거라면 더는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해외학회? 다 필요 없어. 내가 내 돈으로 여행 가고 말지.

 


 쥐꼬리만 한 대학원생 월급이었지만 그래도 통장엔 차곡차곡 쌓아뒀다. 일주일에 하루밖에 쉬질 못하니, 돈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학부생 4년 동안 안 쓰고 모아둔 장학금과 합쳐보니 약 천만 원. 지금 돌이켜보면 그 돈으로 투자를 했어야 했는데 당시에 나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충동적으로 유럽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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