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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워리 Jan 14. 2022

런던에서의 7일

나의 첫 유럽여행 회상기 03


  





  혼자 하는 여행은 자유롭다. 가끔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거나, 멋진 곳을 배경으로 날 찍어줄 이가 없을 때는 아쉽기도 하지만, 굳이 동행을 구해 다니기보단 혼자 다니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러다 보니 한 도시에 하루 이틀씩 머무는 배낭여행자였던 나는 매일이 다채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날그날 머문 숙소에서 만난 사람과 즉흥적으로 다니기도 하고, 길을 걷다 만난 사람과 스몰토크를 나누고 그러다 식사를 하고, 맥주 한 잔 마시며 야경을 봤던 나날들. 주로 나와 처지가 비슷한 배낭여행자와 함께였는데, 조금 친해질 만하면 헤어지는 것이 여행 초반엔 퍽 아쉬웠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오히려 새로운 만남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해서 잘 안 맞는 사람들과는 미련 없이 헤어졌던 것 같다. 



  성별도, 인종도, 나이도 제각각인 사람들과 또 언제 이렇게 함께할 수 있을까. 되도록이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었다. 한국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그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 몇몇은 바로 얼마 전에 만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을 꼽자면 런던에서 만난 켄과 브뤼셀에서 만난 빈센트다. 내게 감정적으로 커다란 동요를 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그들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살-짝 아려온다. 오늘은 켄의 이야길 해보겠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

  



   40일 유럽여행의 첫 시작지를 런던으로 결정했다. 전 세계적인 대도시이며 영어를 사용하기에, 일주일 정도 여유롭게 머무르며 유럽 대륙에 적응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볼거리가 넘쳐나서 그 누구보다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빅벤 앞에서 사진도 찍고, 빨간 이층 버스도 타보고, 버킹엄궁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템즈강을 따라 산책했다. 남들이 보기엔 관광객 그 자체였겠지만 나름 런더너인 척 전시도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자연사박물관, 테이트 모던... 비싼 런던 물가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인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여행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여정이 거의 끝나가는 5일 차, 오후 한 시쯤이었을까. 나는 대충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이드파크를 거닐고 있었다.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해볼 만한 것은 모두 했다고 생각했기에 좀 쉬고 싶었다. 비가 내릴 것처럼 꾸물꾸물했던 날씨 때문에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고민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푸근한 인상의 흰머리가 희끗한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 사이 어디쯤의 백인. 드라마에서나 많이 접해본 강한 영국식 악센트가 실제로 귀에 꽂히니 신기했다. 그는 본인이 저널리스트라며 손을 건네 왔고 얼떨결에 악수까지 해 버렸다. 



영국 아저씨 켄




  그렇게 시작된 켄과의 인연.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는 마치 어른과 어린이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질문을 하면 간단한 대답만을 하는 정도의 대화. 능숙하지 않은 영어 실력에 꽤 애를 먹었다. 대화 주제가 생각나지 않아서 몇 마디 하다 금방 헤어질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와 반나절 동안이나 함께했다. 영어 말하기에 대한 욕구가 나도 모르게 폭발했나 보다. 어눌한 내 말을 그는 끝까지 경청해주었고, 덕분에 나도 자신감을 얻어 꽤 다양한 주제로 말문을 트게 됐다. 켄 덕분에 그 후에 이어질 30여 일의 여행을 별 탈 없이 성공적으로 마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단순히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는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을 느꼈다.


  하이드파크 안에 있던 노천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카페를 나와 코돌트 갤러리에서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을 보았다. 런던에 살지만 그는 이 갤러리를 처음 와 보았다며, 가이드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냥 내 여행에 당신을 끼워 넣은 것뿐이었는데, 그 한 마디는 참 따듯했다.

  



The admiralty pub에서 맥주 한 잔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나니 저녁을 먹기엔 살짝 애매한 시간이었다. 이번엔 카페 대신에 그가 잘 아는 펍으로 이동했다. The admiralty라는 지하 펍인데,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런던에서 펍 가보기> 또한 여행 계획에 있었지만, 이게 켄과 함께일 줄은 몰랐다. 무려 현지인과 펍을 가다니! 

  켄을 만나는 바람에 이날 하루 일정이 완전히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지만, 어쨌든 나의 여행이, 더 나아가 나의 삶이 다양한 경험들로 채워지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한국인만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음날도 만났다. 함께 그리니치 천문대를 가서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표준시를 밟았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서는 유명한 맛집 <burger&lobster>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평일에도 쉴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우리나라처럼 눈치 보며 연차를 쓰고, 큰맘 먹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아닌 자유로이 일하다 내가 원할 때 쉬는 그런 분위기가. 비록 이 때는 백수라서 직장인의 고충 따위 제대로 알 리 없었지만,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은 일단 내려놓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현재를 즐기되, 흘러가는 대로 두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아무튼 런던은 그래서 즐겁고, 자유로웠다.




테이트 모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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