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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엽 Jul 14. 2020

벌목꾼의 사진전

1. 키르케의 돼지들


“그녀는 마술 지팡이를 휘둘러 그들 모두를 돼지로 변하게 만들고, 돼지 우리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머리, 털 할 것 없이 모두가 꼭 돼지같이 되어 꿀꿀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만은 전과 다름없이 사람의 생각이었고 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중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의 영웅 오딧세우스는 왜 그렇게 트로이에서 이타카 집으로 가는데 오래 걸렸을까? 단 수십일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는 장장 10년의 항해가 된다. 이유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오딧세우스의 용기와 만용은 폴리페모스의 저주를 받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의 항해를 방해하며 12척의 배중 11척을 바다에 침몰 시킨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도착한 아이아이에 섬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라는 마녀가 산다. 그녀는 이 섬에 도착한 인간을 꾀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이 섬에 도착한 후 키르케가 준 술과 음식을 먹은 후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다. 문제는 이 돼지가 된 부하들이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면서 돼지라는 이 비동일성은 “나는 돼지이지만 돼지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해야하는 것이 비동일성의 고통이다. 이런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기억 자체를 포기하는 망각의 기법을 선택하고, 그 망각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이다”라고 비평가 도정일 이야기한다.1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장국현이라는 사진가다. 그는 주로 산을 돌아다니며 소나무를 찍는다. 2012년 그는 한 언론과 이런 인터뷰를 했다. “전 세계 최고 자연유산이 우리나라 산과 나무를 사진을 통해 보전하고 싶다. 제 사진을 본 관객들이 자연유산 보전에 관심이 생기면 좋겠다.” 같은 해 조선일보 9월 25일자에 “우리나라 산의 정기와 기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우리나라 산과 소나무 같은 정기를 내뿜는 것은 없어요. 라고도 했다. 그는 이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나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벌목을 하고 있었다. 그가 찍고 싶은 소나무 한그루를 위해 주변의 금강송과 활엽수를 톱으로 썰어냈다. 게다가 사진의 대상이 된 소나무마저 이쁘지않다며 큰 가지를 쳐냈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공간은 경북 울진군 산림 보호구역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나무들을 훼손할 수 없는 곳이다. 그는 결국 법원으로부터 2011년 7월부터 2013년 봄까지 세 차례 수령 220년 된 금강송을 포함한 금강송 11그루와 활엽수 14그루를 무단 벌목한 혐의(산림보호법 위반)로 기소돼 2014년 7월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명백한 범죄에 대한 실형이다. (캐나다의 경우 동일한 사례라면 약 100,000 달러의 벌금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는 이 나무 시체가 즐비한 풍경 속 금강송 사진으로 국립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열었다. 예당은 전시를 거절했으나 법원은 금전적 손해의 이유를 들어 그에게 전시할 정당성을 부여했고, 그는 속죄로 사진을 판매한 수익금을 기증해 가톨릭 성당에 파이프오르간을 마련해주겠다 했다. 그는 전시를 앞두고 KBS와의 인터뷰에서 “왜 그런 짓을 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내 정신이 그만 나가버렸다니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키르케의 돼지를 떠올린다. 망각을 선택한 돼지는 인간이 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망각의 방식으로 구원을 찾는다. 국가 전시장에서 화려하게 전시회를 하는 것으로 희망을 찾고, 성당에 파이프오르간을 기증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 그는 이 신자유주의 한국에서 망각한자만이 생존하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자신의 끈이 될 사람들에게 사진을 기증했고, 그들은 기꺼이 망각에 축배를 함께 나누었다. 그들이라면 전시를 칭송하는 언론사 간부들이거나 성당의 신부들이다. 그들의 망각 속에 잘려진 수많은 나무들은 장국현의 사진 속 부재의 증명으로 남는다.


2. 사진가는 숲으로 가지 못한다


다시 도정일은 이야기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길을 멈춘다. 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하고 그 곳으로 달려가게 한다.”2

하지만 더 이상 독자들이 그 숲으로 가지도 그 숲에 머물지도 않을 것임을 안다. 산성비 내리고 수목이 베어져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실을 누구보다 독자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해 시인과 독자의 정서는 일치하지 않고 양자 사이에 의지할 만한 공감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시인을 사진가라 칭해도 된다. 목에 비싸고 큼직한 카메라를 주렁주렁 매고 남한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진가들을 보라. 그들이 현장에서 건져 온 아름다운 사진들은 우리 눈길이 닺는 곳곳에서 화려하게 디스플레이된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그곳 옆에는 쓰레기가 쌓여있고, 개발이 진행 중이며 더 이상 낙원은 없다는 것을. 그리해 사진가들은 더욱 자극적인 이미지에 천착한다.

강원도 동강할미꽃은 주변이 사진 찍기 좋게 마구 파헤쳐진 후 얼마 안 있어 시들어 죽는다. 부엉이를 찍는다며 절벽의 나무며, 둥지며 훼손하고 자랑스레 생태사진 공모전에 응모한다. 사진기라는 근대의 발명품은 점점 진화해 누구의 손에든 들려지는 흉기가 된다. 그 흉기를 지닌 채 저항할 수 없는 자연에 앞에서 착취와 겁탈 왜곡을 자행한다. 자연은 그들 앞에서 해체되고 포장되어 가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상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인간 개발한 이 사진기라는 기술은 더 이상 자연에 감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제 산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에 놀라고, 찬양하며 그것으로 착취한 이미지를 전리품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밤새 SNS에 그 자연이 피 흘린 사진들을 올린다.

나는 장국현의 <천하걸작 한국영송 장국현 사진전>이 열리는 첫날 전시반대의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하지만 내심 이것이 그의 의도대로 열리길 기대했다. 예술의 전당이라는 벽면에 착취와 겁탈의 증거가 걸리고, 범죄의 장물이 장식되길 바랬다. 그리하여 관객들이 오늘날 카메라를 든 자들의 망각과 인간이어야 한다는 윤리가 어디쯤 도착했는가를 확인하길 다시 한 번 기대했다. 이 시대의 사진가들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망각한 돼지들은 결코 숲으로 갈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 물화된 인격은 아도르노의 말처럼 망각이다. 망각의 사진은 결코 인간을 희망할 수 없다. 윤리와 끓어오르는 욕망 사이로 벌겨 벗겨진 나무 사진 사이로 시선을 던질 모든 이들을 고민해야 한다. 사진가들은 왜 찍고 보여주는가?


1. <망각의 시학, 기억의 시학> -후기 산업사회에 대한 시적 대응. 도정일. 작가세계 1991년 겨울호

2.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도정일. 녹색평론 1993년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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