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창, 민병헌, 권태균, 이갑철
19세기 중엽.
이제 막 발명된 획기적인 과학 도구인 카메라는 광학과 화학의 최신 결정체였다. 당연히 이 카메라의 목적은 광자를 통해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는 일이었다. ‘포토그래피’라는 이름을 선사한 천문학자 존 허셜은 자연의 사물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진의 목적이었다. 이와 함께 박물관과 미술관의 형태가 완성되어가던 즈음 사진은 또 하나의 사명을 부여받으니, 바로 예술품의 복제였다. 베냐민의 말대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에는 아우라가 있고 이것은 무엇으로도 교환될 수 없다. 사진은 바로 이 오리지널의 가장 근사체로 복제해내는 탁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구본창의 백자 시리즈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의 대형 사진은 실물보다 무척 크게, 우리 눈이 볼 수 없는 디테일까지 선사한다. 이 사진의 백자는 조선의 미학을 잘 표현한 흔치않은 명작들이다.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를 가장 오래된 사진의 방식으로 재현한 구본창은 그리해 어쩔 수 없는 콜렉터가 되어버린다. 수집하고 분류하고 관찰해서 그 의미를 파악해낸다. 그리고 이 오직 한점의 예술품을 소유할 수 없는 여러 사람들에게 사진이라는 복제품을 통해 감상하게 하고, 소유하게 한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구본창의 백자 사진은 예술인가? 예술품을 찍은 예술사진은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보인다. 게다가 구본창의 사진보다 그 아이디어와 구체적 시도가 더 예술적이란 생각이 든다.
19세기 말.
사진 탄생 후 시간이 흘러 이제 카메라는 소수의 지식인과 과학자의 손에서 미술가들에게 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상사진과 풍경사진이 대중들에게 크게 성공하면서 평면회화를 그리던 미술가들이 사진판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사진으로 회화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픽토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린 회화주의 시대의 사진은 연초점, 질감있는 종이의 사용 등으로 회화를 흉내 내거나 뛰어넘어보려 했다. 대표적인 사진작가로는 회화주의 예술사진의 거장 헨리 피치 로빈슨, '자연주의 사진'이라는 새로운 방법론과 예술미학을 주창했던 피터 헨리 에머슨 등이 있다. 근대사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도 1887년 런던의 사진 살롱에서 에머슨에 의해 발탁된 후 픽토리얼리즘에 가담한 작가였다. 민병헌의 사진은 당시 회화주의 사진의 당대적인 표현이다. 사진의 여러 가능성 중에서 이 역사적인 부분에 심취해 자신의 사진 세계를 이어가는 작가다. 그는 흑백 필름으로 은염 프린트를 고집하는 스트레이트 사진가다. 암실에서 별다른 조작을 가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사진분리파 운동의 스티글리츠 계보를 잇는다고도 볼 수 있다. 콘트라스트가 약하고 계조가 넓다.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미세한 광선을 분리해낸다. 이로서 우리가 볼 수 없는 풍경을 재해석 한다. 사진이 갖고 있는 근대적 산물의 전위성을 제외한다면 민병헌의 사진은 분명 퀄리티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세기 초반.
사진이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미학의 존재로 태어난다. 기존의 배경(미술)과 무관한 독자성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시기 스티글리츠와 루이스 하인, 폴 스트랜드를 거쳐 워커 에반스에 와서는 다큐멘터리사진이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즉 연출되지 않은, 중립적인, 객관화된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기록(다큐)과는 달리 예술적인 추구를 하거나 사회변혁적 시도를 하는 사진가들의 철학이 담겨있었다. 특히 미국의 대공황기에 농업안정국(FSA)의 소속 사진가로 미국을 횡단했던 워커 에반스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에반스는 카메라를 들고 연출되지 않았지만 그만의 특유한 예술적 성취를 사진에 담았다. 아마도 그와 같이 어딘가 예정되지 않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피사체와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권태균이다. 그의 이 사진 고인돌 연작은 사진가가 목격자로서만 존재하는 그런 사진일 것이다. 고대인의 무덤에서 함께 존재하는 오늘의 농부는 있는 그대로 권태균의 철학을 표현한다. 역사성 앞에서 견디어 온 인간의 삶 말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 연대기 속 사람들은 우리 땅 농촌 어딘가에 존재한다. 때로는 아이러니를 때론 고단함과 절만을, 그리고 또 때론 희망을 역사 속 아카이브 한 장으로 담아내 정리하고 가끔 내보인다. 워커 에반스에게 사진은 소설같은 예술이었다면 권태균에게 사진은 역사에서 가끔 번뜩이는 객관의 예술인 것이다.
20세기 중엽.
현대사진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사람이 있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 이민자 로버트 프랭크는 1958년 기념비적인 책 <디 아메리칸스>를 발표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인종차별과 빈부차 어두운 골목 길 소수자들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이 거절된다. 철저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미국은 그들에게 불편했다. 결국 책은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델피르 출판사에서 간행됐고 공전의 히트작이 된다. 이듬해 부랴부랴 미국 출판사들이 들려들어 그의 책 <미국인>은 미국에서 출간될 수 있었다. 아마도 작가 이갑철에게 이 책과 프랭크는 표상이었을 것이다. 청년 이갑철은 이 책과 사진을 끼고 살았고, 남들이 객관성이라는 올무에 걸려 포토저널리즘에 뛰어들 때 사회를 남다른 방식으로 봤다. 80년대 한국은 혼돈과 모순 자체였고 이갑철의 주관적인 작품 <타인의 땅>은 로버트 프랭크에 대한 오마쥬였다. 그리고 선승들이 말하길 부처를 죽여야 부처에 이르듯, 선생을 죽여야 했다. 그의 90년대 작업 <충돌과 반동>은 그리해 한국적인 주관주의를 완성한다. 스타일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를 따르되 내용은 철저하게 그가 느낀 한국의 땅이었다. 사실 그의 작품들 속에 나타난 한국과 한국인은 동의할 수 없을 수 있다. 보는 이마다 사물의 실체는 다를 수 있고, 진실은 다가가는 방법이 다를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면서 내 방식도 세상에 존재함을 증명한다. 따라서 이갑철은 사진으로 증거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제시 할 뿐이다. 그의 사진에서는 지금도 귀기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