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침 뱉는 말
선진국 맞나?
29년 전 6월 중순,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니 꽤 쌀쌀한 날씨였다. 남반부 호주는 한국과는 정반대의 계절을, 6월부터 겨울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왔지만 낯설었다. 시드니 공항으로 마중 온 사람의 차를 어색하게 얻어 타고 지나치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항을 빠져나와 하숙집으로 이동하는 길의 이름은 그 당시는 몰랐지만 호주 겨울의 건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낡은 거리, 건물들이 썰렁하고 황폐하게 서 있었다. 첫날 이동하는 동안 거리는 서울과 너무 달라 보였고 호주가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가 맞는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창밖을 바라보며 어색한 차 안 공기와 바깥 풍경에 한숨 같은 낮고 긴 호흡이 나왔지만 소리 내지 않게 삼키며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살면서 차차 알아가자'
불편한 마중
인맥이 넓으신 아빠, 절친분의 둘째 아들이 호주에서 먼저 자리 잡고 살고 있으니 그 아들 집에서 먼저 조금 신세를 지면서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로 나는 아빠와 호주 가기 전부터 다툼을 했었다.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신세 진다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며 아빠와 부딪힌 것이었다. 아빠와 나는 자주 의견 차이로 부딪혔지만 이번에는 한국을 떠나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나는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그분을 만났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오니 마중 온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중 나온다는 사람을 기다리며 나는 결심을 굳혔다. 늦게 도착한 그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 나는 신세 지고 싶지 않다는 뜻과 시내 근처 호텔로 데려다 달라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정작 그분의 입에서는 한국에서 전해 들은 것과는 많이 달랐다. 자신은 집안 사정이 생겨 안되고 같이 다니는 교회 지인분 집으로 미리 하숙집을 구해 놨다고 했다. 나는 하숙은 싫다는 입장과 호텔로 가겠다고 했지만 그분이 미리 부탁해 두었기에 취소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뜻을 비추었다. 어쩔 수 없이 '하숙집을 취소하고 호텔 쪽으로 가고 싶다'는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입술을 깨물며 삼킬 수밖에 없었다.
참견받는 인생에는 항상 고충이 따른다.
이분은 공항에서 나를 픽업해서 바로 하숙집으로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과 전화번호만 건네주고 하숙집 앞에서 짐을 내려주고 약속이 있다는 어색한 변명과 인사만 하고는 바로 가버렸다. 한국 내에서 지방으로 간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호주로 갔는데 이분의 행동은 분명 차가은 선 긋기였다. 이렇게 이분은 행동으로 먼저 선을 그어왔고 나도 이 사람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인 아빠들끼리의 친분으로 생판 모르는 그들의 자식들이 어색한 시간을 잠시 가진 것이었다. 마중을 나온 이분도 분명 당신 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척만 하는 모습들이 하숙집으로 오는 내내 역력히 보였다. 절친이신 두 아버지들의 생각과 그 자제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 그분도 나도 서로 싫었던 것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날 나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 분에게는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연락처를 받고는 바로 없애버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분과 내가 한국에서 미리 전화통화를 한번 했었다면 서로 만나지 않았어도 간단히 질문하고 정보를 조금 받고 끝냈을 것이다. 그랬다면 처음 일주일 하숙집에도 들어가지 않아도 됐을 거고, 호주에 오자마자 노숙자 같은 느낌은 느끼지 않았을 거고, 감기로 호되게 일주일 넘게 아프며 몸을 축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인생의 첫발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서로 내 단추를 끼려 했던 것이었다. 두 분 아버지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픽업 나온 분 그리고 전혀 뜻하지 않았던 하숙집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시드니에 도착하자마나 처음 시작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를 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하숙집 주인들에게 이끌려 3일째 되는 일요일에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분을, 아버지 친구의 아들분을 한번 더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분은 '왜 연락하지 않냐''어디 아?'는 어색한 인사와 질문을 건네 왔다. 3일째 심한 감기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기에 누가 봐도 아파 보였던 때라 그분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괜찮다'는 간단한 대답을 하고 한국에서부터 준비해온 그분과 그분 가족에게 선물을 건네드렸다. 그것으로 호주에서 29년 동안 살면서 나는 그분을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으며 살고 있다. 솔직히 연락처도 첫날 버렸기에 없다. 그분이 호주에 여전히 나처럼 살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며 살고 있다.
노숙자의 마음을 이해한 시드니에서 첫날밤
체스우드에 위치한 하숙집은 하우스, 단독 주택이었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밖의 겨울 날씨보다 집안이 훨씬 더 추운 냉장실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겨울이라도 햇살 따스한 바깥공기와는 달리 집안은 어둡고 냉기가 가득했다. 호주에는 난방 시설이 따로 없다는 것을 하숙집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보낸 첫날밤은 혹독했다. 분명 집, 방안 침대에서 잠을 잤지만 마치 길거리에서 자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밤새 나는 추위에 떨었고 몇 번씩 일어나 옷가방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이불속은 전혀 데워지지 않았고 점점 차가워지며 체온을 뺏아가기만 했다. 밤새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제발 해가 밝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쩔쩔맸던, 뜬눈으로 지새운 하얀 추운 밤이었다.
아침이 되어 밖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싶었다. 밤새 추위와 싸우고 나니 목과 코가 꽉 잠겨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밤새 떨어서 그런지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끌어내어 하숙집 주인에게 추웠다고 뭘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전기장판을 사서 써도 된다고 허락을 하셨다. 어제 하숙집에 도착해서 그 많은 시간 동안 밤은 더 추우니 전기장판 사라는 그 말 한마디를 충고해 주지 않은 하숙집 주인들의 이유가, 생각이 궁금했지만 지난 일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하숙집 근처 쇼핑센터가 문 열기도 전에 출발해 가서 문 열자마자 첫 손님으로 전기장판을 하나 구입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토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기에 여전히 한국에 적응된 사람이었기에 감기가 들어 의사를 만나려 했던 것이었다. 호주에 살다 보면 감기 들었다고 병원을, 의사를 찾지 않는다. 열이 심하게 나거나 목이 심하게 붓지 않는 한은 의사도 그냥 감기에는 아무런 처방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단순한 감기 증세로는 의사를 찾지 않는다.
쇼핑센터 근처에 있는 국숫집에서 따뜻한 국물로 만든 소고기 국수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그것이 나중에 알게 된 월남국수였다. 하숙집 인사겸 선물을 사서 하숙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건네주었다. 한국에서는 호주에서 하숙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선물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국에서 미리 챙겨 온 감기약을 먹고 전기장판을 켜고 겨우 첫 잠을, 낮잠을 잠시 잘 수가 있었다.
감기로 시작한 몸살은 쉽게 났지 않고 몸을 엄청 힘들게 했지만 하숙집을 나가기 위해 일주일 동안 나는 열심히 집을 얻으러 다녔다. 하지만 하숙집에서는 몸이 아픈 나를 배려하듯 좀 더 하숙하면서 천천히 집을 구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서둘러 아파트를 구했다. 다행히도 쉽게 구해진 아파트 덕분에 첫 일주일이 끝나기 하루 전에 아파트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내가 지낸 하숙집에서 탈출하고 싶은 첫 번째 이유는 집이 너무 춥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하숙집을 들어가면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기에, 너무 추워 일상생활을 전혀 유지하기 힘들었다. 물론 여름을 맞는 한국에서 온 나였기에 유독 추위를 많이 탓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모든 이야기가 종교였고 나를 교회에 꼭 데리고 가려는 강요가 많아 그분들과 얼굴 마주치는 자체가 하루하루 부담스러워졌었다.
일주일 오백 불 하숙비
29년 전에 방하나를 쓰면서 일주일에 오백 불을 냈고 아침 두세 번에, 저녁 두세 번 정도 먹었다. 호주 돈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었다. 그냥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일주일 한국 사람집에서 하숙을 했었고 그 집에서 월남쌈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게 되었고 집에서 이사 나오기 전에 감사의 뜻으로 내가 만들어 한번 대접하며 월남쌈을 제대로 배워 나왔다는 것과 그때 그 집은 너무 추워 있는 내내 힘들었다는 정도로의 추억으로 남았었다.
하지만 내가 학교 캠프를 진행하면서 새삼스럽게 14,5년 전에,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지낸 일주일 하숙 생활을 떠올렸다. 아이들 하숙을 구해주고 시키다 보니 방하나를 쓰고 식사 몇 번 한 것으로, 일주일에 오백 불이라는 돈은 그 당시로써는 너무 비싼 가격이었음이 짐작되었다. 한국 집, 한국음식이라서 더 비싸다 치더라도 너무 충분한 돈이었다. 하숙집에 도착한 그날 주인들과 이야기할 때 나는 분명히 밖으로 나가 일을 많이 볼 것이라 거의 아침 한 끼 정도밖에 먹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했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주변 시세가 그렇기에 오백 불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호구였습니다.
한국에서 하숙을 해 본 경험도 없었고 그때도 비싸다는 생각은 살짝 들었지만 시드니 하숙비가 다 그렇다 하시기에 그런 줄 알았고 그 후로는 하숙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잊고 살았었다. 하지만 내가 캠프를 하면서 아이들 하숙에 대해 조사하며 알아보니 저절로 시드니에서 내가 했었던 하숙이 떠올랐고 뒤따라오는 씁쓸한 마음은 덤이었다.
'그분들은 무슨 사정으로 나를 호구로 삼으신 것일까?' '일주일만 있는다고 해서 그랬을까?' '한국에서 처음 오는 사람이라 쉽게 봤나?' 하는 의문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러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외국 나가면 한국사람을 제일 조심해라'는 말이 떠올라 상당히 씁쓸했다. 내가 살짝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이유를 생각해도 그때 분명 내가 호구였다는 사실인은 부정을 못하겠다.
그런데 나를 그들에게 소개해준 아빠의 절친 아들은, '그 사람은 이 일을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사람은 알지 않았으려나 아니면 몰랐으려나?'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그분은 몰랐다고 여전히 믿고 싶다.
누워서 침 뱉는 말
29년 전 호주로 오기 전 많은 주변 사람들이 '외국에 가면 한국 사람을 제일 조심해라'하는 조언을 해 주셨다. 나는 그런 말은 믿지 않았기에 귀에 담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외국에서 살아 보지도 않았고 한국에서 살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자기들 나라에, 얼굴에 스스로 침 뱉는 말을 서슴없이 조언으로 해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한국에서만 가능한가'라는 의문도 들었다. 외국을 나가는 입장에서 나는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한국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말고 예의 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29년 정도 살아보니
호주에서 29년을 살면서 보니 이민 온 사람들은 이민 간 나라의 언어장벽이 크다 보니 같은 나라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어울리며 지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끼리 교류가 많다 보니 하나의 작은 사회를 이루게 되고 그 속에서 사건사고도 많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끼리 문제가 자주 생기고, 중국사람들은 중국 사람들끼리, 일본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끼리, 인디아 사람들은 인디아 사람들끼리 문제가 많이 생긴다. 같은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끼리 서로 말이 잘 통하니, 서로의 속내도 드러낼 수 있고, 위로도 주고받고, 사업이나 장사도 서로 사고팔고, 하다 보니 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이민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민 온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에게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본토 사람들은 그들끼리 문제도 많이 생긴다.
이렇게 뭐든지 조그만 사회가 형성되면 사건사고는 흔하게 생기는 것 같다. 작은 식당 주방에서나, 크고 작은 교회나 성당이나, 교민 사회에서도 자잘한 문제들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외국을 나가 살아서 더욱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살아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문제들이 생겨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외국 나가면 한국 사람 조심해라'라는 말 대신 '어딜 가나 나쁜 사람들은 조심해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살면 좋지만 나쁜 사람들도 존재하기에 사람 조심은 항상 하자는 말을 하고 싶다. 굳이 한국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보다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주며 사람을 만나고, 만나는 사람에게 신중을 기하고 그래서 서로 좋은 사람이 되어 곁에 있어주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살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은 적은 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호주에 오래 살면서도 한국 친구는 많지 않다. 지금까지도 한 손으로 꼽아도 남을 정도의 한국 친구들만 곁에 두고 있지만 그들 모두 평생 함께 하고픈 소중한 나의 한국 친구들이다. 나는 한국 친구보다는 외국 친구들이 훨씬 더 많이 있다.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있다. 숫자는 많으나 그들도 모두 소중하다. 나는 한국 교민 사회에 어울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호주에서 나의 일을 하느라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친구들이 많이 있지는 않지만 한 명도 소중하지 않은 친구가 없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 다들 너무도 소중한 친구들이고 그들에게 나도 소중한 친구가 되기 위해 진심을 다한다. 생각해보면 몇명이라는 친구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얼마나 소중한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