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고향이 그리운 병, 향수병하지만 나는 지금 엄마 집, 한국에서 지내는데도 문득문득 집에 가고 싶은 날들이 있다. 그래서 울적해진다.
아들이 보고 싶고, 강아지도 너무 보고 싶다. 호주 친구들이 보고 싶고, 호주에서 먹었던 음식들이 그립고, 매일 아침 산책길도, 해변길도 그립고, 커피와 아침을 즐겨 먹고 마시던 카페들도 그립다. 혼자 지낸 시간들도 그립고, 운전하며 다니던 길도 그립고, 호주의 날씨도 그립다. 모든 게 다 그립다.
20여 년 전에 사라졌던 향수병이 한국에 있는 나에게 다시 찾아온 것 같다.
호주에 살던 초창기에는 매년 추석이나 설에는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시끌벅적했던 우리 형제들이, 함께 먹었던 엄마가 만들어주신 모든 음식들이 그리웠다. 호주에서는 추석과 설은 그냥 보통날이었기에 챙기기도 힘들었고 너무 조용히 지나가기에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아뭇일 없이 지나가는 자체가 서글프고 외로워 한국에 가고 싶었다. 대부분 찾아오는 울적함은 혼자 많은 눈물로 삼켰고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는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 그러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간단한 명절 음식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서 먹으며 그리움을 달래곤 했었다.
그렇게 몇 년쯤 지내다 보니 호주에서 한국 명절을 챙기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다 보니 알게 되었다. 특히 음력으로 챙겨야 하는 추석과 설은 음력 달력이 없으며 거의 불가능했었다. 그러다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학부형이 되자 호주 휴일을 더 많이 챙기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호주인으로 되어갔다.
아들이 8학년쯤에 접어들자 우리 둘 만의 가풍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호주 휴일과 특별한 날에 맞춰 우리들만의 가풍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 날은 꼭 이렇게 하자라는 약속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런 약속들을 실행하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보태졌고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성인이 되자 아들과 나만의 가풍들이 몇 가지 만들어졌다. 그 후 6년 동안 우리의 가풍을 더욱 알차게 만들었고 아들은 미래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가풍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려주며 멋지게 이어갈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아들과 단둘이 지내는 19년 동안 향수병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올해 한국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향수병이 다시 슬금슬금 찾아들었다. 특히 며칠 전 한국에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모습을 보려고 커피 한잔을 들고 옥상으로 가서 떨어지는 비를 지켜보다 나의 생각은 호주로 빠져 들었다. 호주에서 난, 비를 무척 즐겼다. 바람 없이 얌전하게 비가 내리면 발코니에 강아지를 앉고 나가서 흔들의자에 앉아 잠시 비를 즐겼다. 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지켜보기도 하고 발코니 난간에, 화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 모금 마시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겼다. 바람과 함께 사납게 내리는 비가 올 때는 거실 모든 커튼을 열어젖히고 소파에 앉아 270도 경치로, 바다와 도시 그리고 강에 내리는 비를 즐겼다. 따닥따닥 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스피커로 통해 들려오 브루노 메이저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집안 울리게 한 다음 끝내지 못한 그림까지 그리는 날이면 그날 하루는 너무 풍성하고 알찬 느낌이 들어 좋았다.
오래 살다 보니 타향이 고향이 되었나 보다. 29년이라는 호주에서의 삶은 나의 인생의 절반도 넘게 차지하기에 어느 순간 호주가 고향이 된 것 같다. 한국의 기억은 어릴 적 삶을 담고 있어 부모님의 따스한 보살핌과 보호받았던 기억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호주에서의 나의 삶은, 성인으로서의 첫 도전이었고 개척적인 삶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성공과 실패를 통해 얻은 알찬 삶이라고나 할까? 그랬기에 나는 호주가 더 편하고 익숙하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 있는 나에게 틈틈이 향수병이 찾아오는 것 같다. 한국에서 엄마 집에 있는데도, 엄마 밥을 매번 얻어먹는데도, 문득문득 '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울적해진다.
며칠 전 아들의 전화를 받으며 울컥해졌다. 이른 아침 병원으로 출근하며 아들은 항상 전화를 걸어오고, 운전하는 30-40분가량 영상통화를 하고, 한국 와서부터 시작해서 아직까지 매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며칠 전 그날 아들은 이야기 도중 나의 목소리와 얼굴로 무슨 낌새를 차렸는지 괜찮은지 물어왔다.
나와 아들은, 둘이서만 오랜 시간 보냈었기에 어느 때부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무척 예민하게 서로를 잘 파악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아들이 어릴 적부터 모든 것에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하나의 묵시록처럼 자리 잡혀 있었다.
"그냥 조금 많이 homesick이 생겼어" 하고 대답하니 아들도 "나도 엄마가 무척 보고 싶어요" 한다. 아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움이 밀려왔다. 울고 싶지 않았다. 아들에게 아침부터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마디 했다. "나두! 나두! 하지만 너보다 우리 바디(10년째 키우는 강아지 이름)가 더 보고 싶어" 이렇게 말을 하고 나니 아차! 의도치 않게 눈물이 더 빨리 터져 버렸다. 울음 참는 목소리에, 우는 나의 모습을 본 아들이 분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I knew it. I knew it" 하며 자기가 두 번째라는 걸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고, 엄마 사랑을 바디에게 뺏긴 줄 알았다며 투정 섞인 말을 계속하며 나를 달랬고 결국엔 울던 나에게서 웃음을 받아냈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 난다는데 가끔 아들 때문에 큰일이 날 것 같다. 그날이 그랬다.
그리고 뒤따르는 잔소리는 내가 감소해야 할 부분이었다. 내 아들은 잔소리쟁이다. 날 너무 닮아서 소름 돋을 때가 있지만 이렇게 잔소리를 할 때면 날 닮지 않았다. 아들은 내가 조금 약해질 것 같으면 먼저 달래주고 그런 후에는 내가, 엄마는 강하다는 것을 재차 알려주기 위한 잔소리를 한다.
잠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난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면 "아들 일절만 해. 엄마 이제 알아들었어. 그거 내가 너에게 어릴 적에 해 준 말이잖아. 넌 누굴 닮아 잔소리를 그리 하니. 분명 외할머니를 닮았을 거야. 잔소리쟁이" 한다. 그러면 아들이 "그러니까요. 난 엄마의 잔소리를 들어본 적 없으니 할머니 닮은 건 분명 사실인 것 같아요. 엄마 미안하지만 한마디만 더 할게요. 엄마의 지금 향수병은 상관없고 괜찮지만, 약해지지는 마세요. 이 세상에서 엄마보다 강한 엄마는 본 적이 없어요. 엄마는 나의 영웅이에요" 하고 말을 마쳤다.
이러는 사이에 아들은 병원에 도착을 했고 나는 아들의 잔소리에 향수병이 달아났음을 알았다. 우리 둘은 안전하게 하루 잘 보내라는 인사말을 하고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렇게 이날의 향수병은 끝을 낸다.
솔직히 매일 아침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덕분에 한국에 이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이 정도의 향수병을 가지고, 견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료 전화를, 무료 영상 통화를 누가 만들었는지 그 혜택을 보는 아들과 나는 너무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은 멀리 있지만 아들의 하루 일상을 언제나 다 알게 되니 항상 가까이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아들만큼 자주 보지 못하는 우리 강아지에게는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워낙 마마보이였기에 더욱더 마음이 쓰였다. 내가 장기 계획으로 여행을 떠나오자 우리 강아지 바디가 엄마 없는 생활에 적응하느라 제일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아들은 바디 사진과 비디오를 보내주었다. 바디 사진을 보니 또 울컥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사진 보는 중에 아들의 문자가 바로 뒤따라온다. "또 울고 있는 건 아니죠?" 뜨끔하다. 혹시 보고 있는 줄 착각이 들 정도여서 서둘러 눈물을 닦고 "아니 아침에 다 울었어. 엄마 울보 아니다. 빨랑 자 아들. 굿 나잇" 하고 답을 보낸다.
이렇게 나의 향수병은 문득문득 생기고, 혼자 견디다 안되면 아들과 이야기하며 사라지곤 한다. 한국에만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기에 향수병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동안에는 분명 또 향수병으로 인한 우울감이 찾아오겠지만 이렇게 이겨내며 씩씩하게 지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