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saengwriting Feb 02. 2021

이런 가족 또 있을까요?

호주, 스페인, 베트남, 미국, 한국 (왼쪽부터 사진 순서)

우리는 5남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로 인해 첫째와 둘째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셋째와 넷째는 서울에서 그리고 막내인 나는 강원도 묵호 지금의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 근무처에 따라 함께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첫째 큰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부모님 고향인 부산에 정착했고 법무부 출입국 관리 사무소 소장이셨던 아버지만 지역을 옮겨 다니셨다. 아버지의 근무처가 부산일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둘로 나눠졌다. 특히 우리들 중 둘째 언니와 할머니가 단짝이어서 아버지를 따라 다른 지방으로 갔고 그러면 엄마는 아이들이 많이 남아있는 부산 집을 오래 지키다 일하는 언니에게 살림을 맡기고 할아버지에게 총관리를 부탁하고 가끔씩 아버지에게 다니시며 두 집 살림을 보살피셨다.


그래서 우리 5남매는 어릴 적부터 항상 누군가는 떨어져 지냈던 것에 익숙했다. 그렇게 커가면서는 각자의 사정으로, 넘버 4 언니가 화교학교를 유치원부터 다니며 초등학생이 되자 선생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어 떨어져 나가서 일주일에 한 번 집으로 오기 시작했고, 넘버 3 언니가 시골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넘버 2 오빠가 3년 군입대를 했고, 넘버 4가 대학을 대만으로 갔고, 넘버 5인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며 가족들과 함께, 또는 떨어져 지냈다.


이러다 제일 먼저 한국을 벗어난 사람이 넘버 3인 둘째 언니였다. 결혼해서 스페인으로 이민을 가면서 우리들은 서서히 한국이 아닌 세계로 발을 넓히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넘버 1인 큰언니만 한국에 살고, 넘버 2 오빠는 베트남에, 넘버 3 언니는 스페인에, 넘버 4 언니는 미국에 그리고 막내인 넘버 5 나는 호주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의 계획도 아니었고 어릴 적 우리들의 희망 사항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엄마의 해외여행 시작


넘버 3인 언니 집 스페인 방문을 시작으로 엄마는 거의 일 년에 한 번씩 자식들을 방문하며 석 달씩 외국에서 지내셨고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신 후부터 엄마와 함께 다니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엄마는 오래 함께 외국을 다니지는 못하셨다. 아버지 병환이 깊어지고 한국에서 몇 년간 아버지를 병간호하던 엄마도 지쳤을 때 나는 부모님이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으로 호주로 모셔왔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며 일 년을 지냈다. 일 년 후 한국에 가서 3달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 후 엄마는 더 적극적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자식들을 찾아 외국으로 다니시며 홀로 됨을 이겨 내셨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은 외국에서 자리도 잡고 안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 합체는 한 번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서로의 나라를 방문해서 만난 적은 있었고, 한국에서 만날 기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두 명이 빠지게 되어 완벽한 합체는 이루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톡이라는 혜택이 없었기에 연락 자체를 그렇게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오직 국제통화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을 때였다.



카톡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카톡이라는 신기하고 편리한 신세계를 알게 되고 적극 받아들였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오 남매가 독수리 5형제라 자칭 부르며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카톡을 통해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지내다 독수리 5형제의 합체를 다시 한번 제대로 추진해 보기로 했다. 지난 실패를 본보기 삼아 우리는 누구도 거역할 없는 완벽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완벽한 이유가 생겼다.


그러던 중 엄마의 팔순이 다가왔고 우리가 찾고 있던 완벽한 이유가 되었다. 그 누구도 사소한 핑계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였고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엄마의 칠순 때도 모이지 못하고 흐지부지됐었던 죄책감도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엄마의 팔순 생일에는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완벽한 이유를 찾자 오빠와 언니들이 합심해서 막내인 나에게 모든 책임을 맡겼다. 형제들 모두 나의 결정과 지시를 무조건 따를 거라 약속을 해주니 나는 엄마 팔순 파티 기획을 맡기로 했다.



엄마 소원들


엄마가 팔순에 원하는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엄마의 소원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생일 파티, 선물 그리고 해외여행이었다.


어릴 적 우리는 주말이나 휴가철에는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국내 여행을 자주 다녔다. 하지만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팔순 생일 소원으로 자식들 데리고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고 제일 큰 소원이라 하셨다.


엄마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에 사는 큰언니 빼고는 다들 해외에 사는데 하필 엄마의 소원이 해외여행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엄마의 소원이니 한번 해보자는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엄마가 가보고 싶은 장소를 직접 찾아보는 시간을 드렸다. 그런 후 엄마가 정하신 곳이 베트남 하롱베이였다. 베트남을 몇 번 다녀오셨어도 하롱베이를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독수리 중 베트남에 살고 있는 오빠 빼고는 아무도 베트남을 가 본 적이 그때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도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각자 나라에서

나는 일인당 250만 원이라는 행사 참가비를 책정했고 넘버 1 큰언니의 한국 계좌로 송금하자고 했다. 행사 참가비는 오직 엄마만을 위한 비용으로 책정했다. 그리고 독수리 5형제들은 베트남 여행과 한국 방문 경비는 각자 알아서 부담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해지자 독수리들은 행사비를 송금하고 하나둘씩 한국 비행기표를 예약하며 우리들의 만남에 서로 설레기 시작했다.



약간의 잡음


항상 큰 행사를 할 때는 사소한 잡음이 생긴다고 한다. 엄마 팔순을 진행하면서도 잡음이 나왔다. 잡음이라기보다는 귀여운 투정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엄마의 팔순 잔치에 참석하고 싶은 각자의 파트너들과 아들 딸들을 떼어놓는 과정에서였다.


특히 미국에 사는 셋째 형부에게서 제일 큰 앙탈이 쏟아져 나왔다. 원래 셋째 형부가 제일 애처가라 그랬다. 하지만 형부는 그때 휴가를 낼 수도 없었기에 함께 할 수 없었고 거기에 언니가 여행 기간을 한 달 잡는 바람에 더욱더 투정을 부리신 것 같았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손자 손녀들도 징징대기 시작했다. 다들 참석하고 싶은데 할머니 뜻이 그러니 어쩌지 못하고 울상들이었다. 거기서는 각자도생이라 했다. 눈치껏 하면 된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렇게 모두에게 말했다.


각자도생 차원에서 나는 다른 독수리들에 비해 거의 두 달 전인 12월 초에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래서 아들은 할머니와 충분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한국 가족 모두 모시고 강원도 홍천에서 지내며 스노보드를 타며 지내던 어느 날 아들은 인생 처음 흰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들은 호주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하얀 눈을 본 적 없었는데 그때 실컷 하얀 눈도 하루 종일 내리는 눈도 보며 즐겼다. 한 달 뒤 아들은 호주로 먼저 돌아가고 나는 엄마 팔순 잔치 준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며 독수리들이 한국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독수리 5형제 합체


드디어 우리 5남매, 독수리 5형제의 완벽한 합체가 이뤄졌다. 우리 서로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도 넘게 얼굴을 보지 못한 형제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어릴 적 살던 엄마 집에서 모이기로 했고 모두가 오십이 넘은 나이로 합체를 하고 보니 시끌벅적 엄마의 집은 터져 나갈 듯 좁았다. 어디든지 사람들이 넘쳐났고 특히 식사 때마다 음식 할 사람들이 부엌에 넘쳐 났지만 아침 요리는 엄마가 담당하셨다. 다들 외국 생활이라 엄마는 엄마 밥을 먹이고 싶어 했고 우리들은 엄마 밥을 먹고 싶어 했다. 엄마가 아침을 담당하셨고 언니들은 보조를 했다. 언니들이 셋이나 있으니 막내인 나는 부엌에 설 자리도 필요도 없었다. 그때 막내의 특권을 최대한 누리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우리들의 식사는 매일 잔치상 음식처럼 차려졌고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엄마 팔순 생일

엄마의 팔순 생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단체로 한복을 빌려 입고 공원 나들이도 함께하며 엄마 팔순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그래서 엄마 안방에 놓인 가족사진을 업그레이드시켜 드렸다. 생일 파티는 중식 레스토랑을 빌려 전체를 핑크로 예쁘게 장식해서 친척분들과 엄마 친구분들을 모시고 생일 파티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베트남으로 가족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다시 각자의 나라로


엄마의 팔순으로 모여 함께 지낸 한 달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또다시 이별 앞에 섰다. 한 명씩 떠나갈 때면 공항에서 우리는 울음을 서로 닦아주며 달래기 바빴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다면 이산가족도 그런 이산가족이 없을 만큼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 가족으로 만났지만 오래 떨어져 있었고 함께 모여 한 달간 식구가 되어 지내다 보니 더욱 애틋한 감정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2번째 합체는 한국이 아닌 스페인으로 나라를 정했고 엄마를 모시고 독수리 5형제 다시 만나길 약속하며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공항에서 혼자 호주로 돌아가는 시간은 마치 일장춘몽에서 막 깨어난 듯 상실감과 허전함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호주로 돌아와 안정을 찾은 후 돌아본 엄마의 팔순 잔치는 대성공이었고 엄마와 함께 모두 식구 되어 보낸 한 달이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독수리 5형제 엄마 모시고 다시 한번 식구 되는 그날을 우리 모두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2021년 2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