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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Oct 24. 2020

아들 하나 키운 이야기

코알라였던 나의 아들 어엿한 의사 되기까지

어릴 적 나의 아들, 찰리는 코알라였다. 찰리는 유칼립투스 나무에서만 사는 코알라처럼 나에게만 매달렸다. 그 당시 나는 남편과 단둘이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었으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계획에 없었던 찰리가 태어나자 일을 관두고 육아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타국 생활이라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오직 독박 육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 부작용인듯한 나의 팔뚝살을 보며 한숨 내쉬며 "웬만한 아가씨들 허벅지 사이즈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투정을 해 본다. 그러면 아들은 미안한 듯 웃으며 "고마워요 엄마"하며 툭 기대어오며 안아준다.


그 당시 나는 임신과 육아에 관한 두 권의 책자를 스승으로 두었고, 수차례 읽으며 이해와 해답을 구했으며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아들 하나를 키워냈었다. 처음 시작은 무경험자였고 무척 어설펐지만 최선을 다하는 노력꾼 초보 엄마였음을 자신한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결코 쉽지 않았던 길이었지만 아들이 다 커서 함께 꺼내어보니 혼자서 이뤄낸 값진 경험들이라 하나하나가 너무 또렷이 기억되어 소중하다. 아마도 나와 아들은 이 추억을 평생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추억을 나눌 것 같다. 그리고 아들은 종종 자신은 미래에 아이가 생기면 자신이 받은데로, 배운 데로 잘 키울 것 같다고 장담하며 나를 치켜세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아들 나이에 맞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베이비 찰리 - '아기가 손탄다'

젖먹이였던 찰리가 일찍이 엄마 손을 탔다. 솔직히 고의로 그렇게 손을 타게 만들었다. '많이 안아주는 아기의 지능이 발달한다'라는 글 한 줄의 힘이었다. 바로 옆집조차 젖먹이 아기가 우리 집에 있는 줄 몰랐을 정도로 아기 찰리의 울음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간 적이 없었고 전혀 혼자 두지 않았기에 찰리는 울지 않는 순한 아기였다.

그 당시 호주에서는 자연분만과 모유수유의 중요성을 산모들에게 북돋우던 시기였었다. 특히 모유 수유는 아기의 면역력과 정서에도 좋다는 것을 책으로 먼저 알고 있었기에 나는 모유수유를 이미 하려고 마음먹었고, 병원에서 찰리가 태어나자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첫 모유 수유법을 배웠고 그 후 2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게 나는 모유 수유를 시작하고 찰리를 웬만하면 혼자 눕혀 놓지 않았다. 찰리가 잠에 푹 떨어진 상태가 아니면 항상 안고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나 노래를 불러주었고, 말 못 하는 아기 마음을 읽기 위해 항상 눈과 얼굴 표정을 살폈다. 그래서 찰리는 거의 울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 도 있었다.

임신과 육아를 책으로 배운 사람답게 책에서 주는 좋은 정보들은 반드시 실천으로 옮겼고, 그중에서 특히 '많이 안아주며 이야기해주는 아기가 영리해진다'라는 정보는 내가 찰리를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되었고 오랫동안 이용하고 응용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부작용 하나 생겼다. 아기 찰리가 사람을 인지하기 시작하자 코알라가 되어 버렸고 엄마인 나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아빠에게 조차도 가지 않게 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 생활이라 가족, 친지들이 오고 갈 수도 없었고 남편은 돈을 버니 나는 당연히 아들 돌보는 일에만 집중했기에 이 정도 부작용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었다.


어린 젖먹이 아기들의 행동 방식은 엄마를 그대로 닮는 것 같다. 나의 아들 찰리가 그랬었다. 일찍 자고 일어나고 아치명 인간인 나의 습관과 똑같이 맞추어져 가며 좋았다.



찰리의 첫 번째 사교육, 어린이집 그리고 첫 이별

우리는 찰리가 첫돌이 되기 전에  퀸스랜드 쪽으로 이사를 와서 정착을 했다. 그리고 찰리가 15개월 때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고 거기엔 세 가지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찰리의 사회성을 키워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코알라처럼 엄마만 찾고 따르는 찰리에게 나이 또래 아이들과 놀며 사귀는 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리고 둘째는 호주에서 태어났어도 한국말을 먼저 배우고 쓰는 찰리에게 평생 쓰고 배워야 할 영어 교육은 처음부터 정확한 발음과 악센트인 영어이길 바랬다. 집에서 한국말만 쓰는 남편과 나 사이에서 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배웠고 빠르게 늘어갔지만 나는 영어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었다. 세 번째 이유는 남편의 도움 요청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몇 년 동안 남편 사업을 돕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15개월 된 찰리를 집 근처 사립 유치원 리틀 엔젤스에 입학시키게 되었다.


첫날, 첫 이별은 굉장했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마음이 울컥해지지만 웃을 수 있다. 유치원 보내길 결정하고 입학 수속을 마친 후 주말을 보내며 여러 차례 찰리에게 유치원에서 만날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많은 놀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엄마는 찰리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동안 아빠 회사에 가서 잠깐 동안 아빠를 도와주고 찰리를 다시 금방 데리러 갈 거라고, 엄마가 데리러 가면 찰리가 점심을 먹거나 먹으려고 준비하는 시간쯤 될 거라 그렇게 차근차근 설명해주며 찰리를 설득시켰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첫날, 유치원에 도착해서 선생님들과 교실 앞에서 짧은 인사를 나누며 찰리를 건네주는 순간 찰리가 발버둥 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찰리를 선생님은 안아 들었고 나는 등 돌려 빠른 걸음으로 유치원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때 생각을 하니 지금도 울컥한다. 유치원 입학 상담을 받으며 원장님과 담당 선생님의 충분한 조언과 충고가 있었기에 찰리에게 설명하는 동안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던 나였지만 첫 이별은 힘들었다. 일단 손을 놓는 순간부터는 아이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도 말고 뒤돌아서 빠르게 유치원을 빠져나가라는 충고가 있었기에 시키는 대로 행동했었지만, 첫날에는 엄마인 나에게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었다. 돌아보면 이산가족도 이런 이산가족은 없었을듯한 장면을 찰리와 내가 그날 유치원 첫날 연출한 것 같았다. 그렇게 도망치듯 유치원을 빠져나와 차에 들어와 잠시 울며 기분을 추슬렀던 기억이 지금도 소중하고 가슴 아픈 날로 추억에 보관되어 있다. 그날을 시작으로 찰리는 아침마다 오늘이 유치원 가는 날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며 슬퍼했다. 찰리는 아침마다 유치원에 도착해서 담당 선생님을 보는 순간부터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일주일에 5일 3-5시간씩 리틀엔젤스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아침 찰리를 보면 안아주며 달래주는 담임 선생님 헨런이 있었고, 아침 이별 순간을 빼고는 찰리는 하루 종일 울지 않고 너무 잘 지냈기에 유치원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보낸 몇 주 만에 유치원에서는 찰리는 해피 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질 만큼 유치원 생활을 잘 적응했다. 하지만 아침 울음은 3년 넘게 한 번도 빠짐없이 지속되었다.


어린아이 찰리를 키우다 보니 느낀 점이 있다. 비록 15개월밖에 안된 어린아이지만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고 영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유치원에 맡기려는 엄마에게 눈물로 엄마의 죄책감을 가중시킬 줄 아는 영리함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아들 찰리가 그랬었다. 유치원 첫날부터 초등학교 시작 전까지 거의 4년 동안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유치원 가는 날 울며 나를 힘들게 했었다. 하지만 찰리는 자신을 떼어놓고 돌아서는 엄마에게 죄책감을 주었지만 정작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눈물 닦고 행복한 아이로 자신을 찾으며 유치원 생활을 했었다. 이 말은 유치원 선생님들 대부분에게 자주 전해 듣는 사실이었다. 찰리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을 한다고 했으며 그래서 나에게 찰리 떼놓고는 돌아보지 말고 유치원을 빠져나가라고 충고해 준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요점은 엄마들에게,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엄마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순간 마음은 아파도 용기 내어 강한 엄마다운 선택을, 아이를 위해서 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아이에게 엄마만이 세상전부가 아니고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 아이의 홀로서기 첫 시도에서 과감히 아이를 품에서 떨어뜨려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부모가 주었다면 아이는 분명 잘해 나갈 것이다. 나의 아들 찰리가 한 것처럼.



유치원 생활

어린 찰리가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보낸 첫 번째 이유이자 목표였었다. 형제 없이 혼자인 찰리에게 어울려 살며 나눠 쓰는 것을 배우게 하고 싶었다. 나는 오전 근무만 하고 유치원에 일찍 가서 자연스럽게 봉사활동을 하며 선생님들을 도왔고 찰리와 아이들을 지켜보며 유치원에서 몇 시간씩 찰리를 지켜보며 놀게 해 준 다음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지켜보는 동안 찰리는 선생님들이 불러주는 애칭처럼 행복해 보였다. 친구들과 장난감 가지고 다툼도 없었고 자신의 것을 빼앗겨도, 못하게 되어도 칭얼거림도 없이 다른 걸 찾으며 즐겁게 지냈고 선생들의 말, 영어를 곧잘 알아듣고 행동했고 많은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것이 보였다. 특히 찰리는 어릴 적부터 몸을 많이 움직이는 놀이와 특히 위글스 노래에 맞춰 춤추기를 좋아했었다.  


어느 날 유치원에 갔더니 헨런 선생님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며 나를 맞아 주셨다. 헨렌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걱정을 하던 찰리가 뛰어나와 안겼다. 눈물 자국 짙은 찰리의 왼쪽 볼에 동그란 아이 사람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물렸을 때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어떤 아이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이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헨렌 선생님과 원장 선생님의 설명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날은 유치원에서 일 년을 마치는 마지막 행사로 유치원 아이들의 개인 사진 및 반 단체 사진을 찍는 날이었었다. 찰리가 개인 사진을 찍고 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가 볼을 물었다고 했다. 나는 찰리를 깨문 아이의 심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선생님들이 손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가 됐고 평소보다 아이들의 개인 움직임이 많고 들쑥날쑥 하니 선생님들은 눈도 마음도 몇 배는 더 바빴을 것도 이해가 됐었다. 내 아이가 다쳤지만 그걸 선생님들에게 책임지라며 누군가의 잘못을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사고란 항상 갑자기 생기는 법이고 심해 보였지만 더 심하게 다치진 않았기에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옆자리 친구에게 물린 찰리의 반응과 행동에 관해 알고 싶었고 선생님들이 대처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얼굴에 난 상처 소독은 했는지 약은 발랐는지에 추가로 물었다. 특히 나는 집에선 볼 수 없는 내 아들의 행동을 알고 싶었었다. 선생님들의 말은 이러했다. 물렸을 때 아파서 크게 울었지만 선생님들의 달램에 쉽게 진정이 되었고 자신을 물은 아이를 밀치거나 때리는 행동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처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날은 일찍 유치원을 나와 주치의를 찾아가 찰리의 상처를 보이고 추가 치료를 받고 약을 타서 집으로 갔었다.


여기서 나는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많을 겪게 될 것이다. 이때 부모가, 엄마가 나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은 아프고 어떨 땐 화도 나겠지만 엄마라면 침착하게 대응, 대처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린아이들은 제일 먼저 엄마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아이는 사건 사고가 생겨 당황해 있을 때에는 더욱더 엄마에게 집중하게 되어 있다. 그때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처리 방식 등  모든 것들을 나의 아이는 하나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쉽게 생각하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자. 우리의 아이를 신중하게 최선을 다하고 나의 행동과 말씨로 모범을 보여 주며 키우자.



유치원을 보낸 후부터 아들과 엄마의 시간

아직 어린 찰리의 취미생활인 코알라 본능을 마음껏 하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아들이 그날 하루 유치원 생활에서 듣고 배운 노래, 이야기, 춤, 놀이 등 모든 기억을 다시 상기시켜주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아이가 오늘 신나게 떠드는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배운 노래나 춤은 아이에게서 나도 배우려고 노력했다. 들어주면서 아이도 나에게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나의 이야기도 꺼내며 서로 대화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시도했었다. 엄마는 무슨 일을 했고, 아들이 보고 싶어 혼이 났다는 말도 해주며 서로 각자 따로 보낸 시간들을 비교해가며 떨어져 더욱 보고 싶었다는 것도 상기시키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아주기는 아들이 코알라 취미를 하는 틈틈이 꼬옥 안아주며 사랑을, 마음을 표시해 주었다. 그리고 주말 중 하루는 아이와 함께 장소를 따지지 않고 신나게 하루 종일 지치도록 뛰어놀아줬다. 함께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중해서 아이의 작은 변화를 보고 느끼며 성장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에게는 아이와 놀아줄 때 원칙이 있었다. 온전히 아이에게 시간을 맞춘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아들에게서 눈을 절대 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날은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로 아이가 지칠 때까지, 아이의 입에서 먼저 '힘들어 그만 놀래'라고 할 때까지 했었다. 나의 스케줄에 아이를 잠시 끼워 넣는 식이 아니라 이때만큼은 아이의 흐름에 맞게 시간을 투자했었다. 하루를 통째로 내줄 수 없는 날이었다면 최소한 한 가지 놀이만이라도 아들이 지칠 때까지 놀아 주었거나, 기다려주었다. 어떨 땐 사정이 생겨 같이 놀아주지는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면 나는 혼자 놀고 있는 아이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고 눈으로 계속 좇으며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며 같이 해 주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아이와 눈 마주침을 통해 함께 웃어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듯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 함께 해 주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혼자 놀다 가고 아이는 여러 차례 엄마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눈 마주침이 없는 것은 각자 따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같이 해주거나 그러지 못할 때도 시선으로 쫒으며 해 주는 눈 마주침은 아주 중요하다. 나의 아들은 눈 마주침으로 행복감과 안정감을 얻었고 또한 엄마의 마음도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 4살 프리스쿨 입학

리틀 엔젤스를 마치고 초등학교에서 진행하는 유치원인 프리 스쿨 과정을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여기서는 규칙적인 초등학교 생활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손가락 힘을 길러주는 것과 연필 잡는 법과 글씨 쓰는 법, 학교의 시간표에 따라 규칙적인 생활을 배우는 교육과정이었다. 이때부터 변화가 찾아왔다. 찰리가 더 이상 아침에 울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가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엄마와 떨어지지 않고 엄마를 따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거의 매일 아침 결석을 시도했지만, 꼭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수업을 마치면 엄마는 항상 일찍 데리러 온다는 것도 알았기에 이때부터 아침마다 보여줬던 눈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아이는 각자 배움에 때가 있는 것 같다. 만 4살이 지나 프리 스쿨에 입학하게 된 아들에게 나는 시간 보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었다. 시계를 보면 엄마가 데리러 올 시간이며 학교 갈 시간을 초조해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보며 기다리길 바랬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 실패했었다. 시계 보는 방법을 아이에게 전해 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려 했었지만 아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웃으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일 년이 지나자 찰리는 시간에 호기심이 생겼고 시간 읽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물어왔다. 이때 시간 보는 법을 일 년 전과 똑같이 가르쳤는데 단 몇 번만에 시간을 이해했고 읽기 시작했다. 아이가 궁금해 물어올 때 그때를 미루지 말고 가르쳐야, 이해와 습득이 빠르다는 것을 나는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만 5살 초등학교 1학년

사립학교 킹스 크리스천 칼리지에 입학식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들이 각자 반 아이들을 줄 세워 교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이 각자 반으로 선생님을 따라갔고 학부모들은 그 뒤를 따라 교실까지 같이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들은 멀찍이 지켜보며 교실을 확인하고 교실 근처에 있는 학교 카페에서 찰리 교실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갔었다. 학교 카페에 앉아 교실 안을 내려다보니 교실 안에 앉아 있는 찰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찰리와 눈이 마주쳤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찰리는 울며 교실을 뛰쳐나와 나에게로 향했다. 그 뒤로 담임 선생님이 쫒아오는 등 입학 첫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나의 말을 듣고 안정을 찾은 찰리는 뒤에 따라온 선생님과 함께 다시 교실로 돌아갔고 우리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이 해프닝이 찰리의 마지막 아기 울음이었던 것 같다. 첫날은 하교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교실 밖에서 찰리가 수업받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수업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에 그런 해프닝이 있은 뒤 찰리는 전혀 문제없이 하루 종일 수업을 잘 받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래서 역시 해피 보이라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날부터는 찰리는 스쿨버스를 이용하며 일 년 동안 학교를 다녔었다. 그런 뒤 찰리의 코알라 증후군 울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첫날 해프닝을 같이 지켜보시던 친정 엄마는 저런 '애가 학교 다니며 공부는 재데로 하겠나' 싶었다고 그때를 생각하시면 지금도 웃으신다. 이젠 다 커 성인이 된 손자 찰리에게 그때 교실을 도망쳐 나왔던 손자 기억이 눈앞에 선하다며 놀리신다. 초등학교 일 학년, 이때 나는 아이에게 신경을 크게 쓸 수가 없었다. 남편의 회사가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고 남편은 감당할 능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찰리는 학교 생활을 너무 잘 적응해 주었고 어느 순간 영어를 잘 읽고 쓰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난 기억에 없었다. 내가 집에서 공부를 도와준 기억도 없었고 그 당시엔 남편 사업적으로 다른 많은 것들을 혼자 처리하느라 바빠서 찰리에게는 전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찰리는 스쿨버스를 이용했으며 하교 때는 남편 회사로 오는 스쿨버스를 타서 오게 했고 남편 회사에서 일을 하며 학교에서 온 찰리의 학교 생활을 들어주는 입장만 되었었다. 그때 나는 아들 찰리에게 학교 생활은 즐겁게, 재미있게, 열심히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만 강조해 주었고, 찰리는 쉴 새 없이 쫑알거리며 하루 종일 있었던 학교 생활을 알려주었다. 어릴 적부터 하루를 보낸 뒤 우리는 자신이 보낸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는 습관이 길러져 있었기에 찰리는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생긴 일들을 이야기하고 나의 하루도 물어봐주며 이야기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찰리가 초등학교 1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후부터 나에겐 암흑의 시간들이 찾아들었다. 남편 사업들이 점차 기울었고,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남편은 다른 지역으로 혼자 떠나 버렸고, 그를 대신해 혼자 몇 가지 사업을 정리하다 보니 나는 이때 찰리가 보낸 시간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살았기에 후회도 없다. 다만 내 아들, 찰리와의 시간을 일정 부분 놓쳐 버린 것이 너무 아쉽게 지금도 남는다. 특히 언제, 어느 순간에 찰리가 영어를 잘 쓰고 읽게 되었는지 선생님과의 미팅으로 알게 되어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아이들은 사교육 없이도 학교 수업만으로도 공부는 충분하다. 그래서 어릴 때 미리부터 아이들 학업에 관여하여 아이들에게 부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글을 가르치고 싶어서 몇 번 기억, 니은, 디긋 하며 한글 읽는 법을 가르치려다 실패를 했다. 이 당시에는 한글 읽는 법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이때 영어를 막 쓰고 배우던 때라 아직 찰리의 머릿속에 두 개가 겹쳐 들어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부모의 영향으로 한국말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먼저 배웠고 첫 번째 언어인 모국어가 되었으나, 영어는 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듣고 읽고 쓰는 법을 정식으로 배웠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찰리는 영어 읽는 법과 소리에 맞춰 스펠링 쓰는 법을 완전히 터득했고 영어에 자신감이 생기자 한글 읽는 법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며 스스로 한글 읽고 쓰는 법을 영어에서 배운 기법을 이용해서 혼자서 쉽게 한글을 읽고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움에도 다 순서가 있고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을 해주고 싶다.



만 6살 서퍼스 파라다이스 초등 공립학교 2학년에 입학

다른 지역에서 지내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한국행 결정으로 다른 지역에서 다른 나라로 떨어져 지내게 되어 싱글마더 아닌 싱글마더처럼 나 혼자 아들을 전적으로 키우며 나와 아들, 우리 둘만의 호주 생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찰리의 학교를 집 근처로 옮겼고 집 근처엔 사립학교가 없어 이때부터 호주 서퍼스 파라다이스 공립 초등학교 2학년을 시작하게 되었다. 코알라였던 찰리는 울음은  벌써 그쳤지만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다른 불안 증세가 눈에 보였었다. 매년 새로 맞는 담임 선생님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유치원에서도 매년 바뀌는 담임 선생님에 대해 예민했었지만 초등학교 들어서는 특히 더 불안해하는 찰리에게 나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해주며 찰리를 안심시켜야만 했었다. 하지만 선생님 말고는 학교가 바뀌는 것에도, 친구가 바뀌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안심하며 새로운 학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다 아들 찰리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 텀이 끝나기도 전에 2년 동안 유학을 끝내고 언니가 조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 시기와 비슷하게 남편도 호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 남게 되자 갑자기 쑥쑥 빠져나간 가족 멤버들에서 오는 허전함과 불안감을 찰리는 나에게까지 연결시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엄마도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찰리는 다시 코알라로 돌아오고 싶어 하며 학교 등교를 거부했다. 이유도 그럴듯했다. '내가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엄마 혼자 운전 중 교통사고가 나거나 사고로 죽어서 자기를 데리러 오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는 등의 구체적인 이유를 내세우며 나와 떨어지는 것을 거부했다. 찰리의 불안증세로 아침마다 우리 집은 울음의 전쟁터가 되었다. 달래서 학교를 보내려는 나와 가지 않으려는 찰리는 학교에 가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유치원 때보다 심하게 매달려 나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나이 지긋하신 부교장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우릴 도와주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적극적인 협조를 받았다. 매일 아침 부교장 선생님의 따듯한 설명과 도움으로 찰리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엄마인 나도 상담을 받았다. 찰리도 힘들었지만 강한척했던 나도 힘들었던 시기였었다. 그러자 나는 그때부터 사범대 미술 대학 전공을 살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었다. 우선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 읽기 도움 자원봉사를 지원했고 바로 투입되어 초등 일 학년과 이 학년 아이들 중 배움이 느린 아이들에게 영어 읽는 법을 도와주는 봉사를 시작했다. 아들과 같이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영어 읽기 지원을 하며 학교에 있었고 그런 다음 수업이 마치면 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교실에서 친구들의 영어 읽기를 도와줬던 적이 많고 학교에 항상 있는 것을 알기에 찰리는 하루가 다르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갔고 나와 단둘의 생활에도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가끔 우리 어른들은 살다가 몇 번의 큰 변화들이 생긴다. 변화를 갖는 어른도, 아이도 무척 혼란스러울 것이다. 가족관계에 생기는 변화는 어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이야기하고 함께 변화를 맞으며, 대처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혹시 '뭘 그런 말을 아이에게 하겠어' 하고 의심한다면 그렇게 하시라. 단 아이에게 평생 숨길 수 있다고 장담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아이가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라면 변화가 생겼을 때 힘들어도 아이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 관계 변화나 삶의 방식 변화에 대해서는 아이도 충분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변화가 생긴 이유와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시킨 다음 변화가 우리들 삶에 가져올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 바란다. 나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아들의 도움을 일상에서 여러모로 받을 수 있었고 우리는 뭐든지 서로 사실을 터 놓는 관계가 되었고 항상 든든한 조력자로 옆에 있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들과 나는 이런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찰리는 3학년 때부터 악기를 하나 시작했다. 학교에서 뽑는 현악부에 가입하여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보내는 통지서를 들고 와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현악부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먼저 해왔었다. 이미 찰리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의 생각과 결정으로 찰리에게 사립 학비 외 추가 돈을 들여 바이올린 레슨을 함께 넣었었다. 학교에서 총괄하지만 개인 레슨이기에 교실에서 불려 나가 작은 음악 레슨실로 옮겨가야 했고 레슨실로 간 찰리를 선생님이 잊었는지 혼차 아이를 그 방에 한참 동안 방치해 둔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은 레슨실 방에서 혼자 선생님을 기다리다 겁을 먹고 다음 아이에 의해 다시 교실로 돌아오게 된 찰리는 그때부터 바이올린 레슨을 포기했었다. 그래서 바이올린과의 인연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었는데 3학년이 되자 바이올린을 다시 배우고 싶어 했고 나는 응원해 주었다. 여기 학교는 사립학교 때와는 다르게 학교 현악 부이기에 부모는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거나 학교에서 악기를 렌트만 하면 현악기 레슨은 공짜로 시켜줬기에 더욱 좋았다. 나는 바이올린 4분에 3 사이즈를 중고로 사줬고 찰리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개인 레슨과 수업 시작 전과 수업 마친 후에 한 번씩 또래 아이들과의 단체 레슨과 전체 현악부 레슨을 시키며 일 년에 한 번 있는 퀸스랜드 주에서 주체하는 초등학교 현악부 공연대회를 준비하는 것이 현악부에서 하는 일이었다. 바이올린은 처음에는 인내심이 많은 필요로 하는 악기였다. 바이올린을 켜는 이도, 그 소리를 듣는 이에게도 인내심을 요구하는 악기였고 찰리의 바이올린 소리는 일 년 정도 지나자 인내심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다시 한번 엄마 욕심으로 아이에게 배움을 강요할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이가 호기심이나 관심을 보일 때 그럴 때를 놓치지 말고 잘 판단해서 허락만 해주면 되는 것 같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관심거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악기는 특히 바이올린은 좋은 소리를 금방 내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도, 부모도 쉽게 흥미를 잃고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악기를 배우는 것이 단지 소리 내는 법만 배우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내가 찰리에게 했었던 이야기는 사람들은 주로 한 손을 많이 쓰는데 너는 양손 쓰는 법을 배우니 얼마나 좋으며,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연습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악기를 하기 위해서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그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적어 놓은 악보 읽는 법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악보 읽는 법을 먼저 배우면서 바이올린을 자주 연습하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소리가 나올 거라고 말해 주었었다. 새로운 것을 하나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꾸준히 노력하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찰리에게 설명하며 이해시켰고 하는 동안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었다.



초등학교 4학년

1학년부터 3학년까지를 주니어라 하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7학년까지 시니어라 부르며 둘로 나눠 학교 행사며 조회를 따로 했다. 올래부터 4학년이 된 찰리는 4/5학년 합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4학년인 찰리가 반장이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반에 반장을 뽑기 시작하는데 5학년도 같이 있는 합반에 들어갔기에 4학년인 찰리가 반장이 될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찰리는 반장이 되어왔고 그때부터 쭉 반장이며 학생회장을 고3인 12학년 때까지 했다. 이렇게 4학년 때 반장이 되어온 찰리와 이야기하다 이때부터 시간표와 계획표를 짜 보라고 권해주었다. 물론 첫 번째 시간표와 계획표 작성은 옆에서 도와주고 찰리가 짜 보도록 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번째 시간표는 프린트해서 찰리 방과 냉장고에 각각 붙여 놓고 보았다. 아들이 만든 시간표에 맞춰 밥을 주며 엄마로서 아들의 시간표에 협조하려 무척 애를 쓴 기억이 난다. 첫 번째 시간표와 계획표는 딱 일주일 시행해 보고는 찰리는 다시 만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시간의 짜임새와 계획의 깊이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시간표는 한 달 진행이 되었고 그 후부터는 지금까지도 새해가 시작되고 뭔가의 일이 새로 시작되면 제일 먼저 시간표와 계획표를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아들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아들 하나 키우며 엄마로서 제일 잘한 것을 뽑으라 하면 나는 단연 시간표와 계획표 작성을 제시한 거라고 말하고 싶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간의 중요성과 자신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계획이라는 앞으로의 목표를 정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만들어준 것 같아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에게 모두 권해주고 싶다. 나는 아들을 키우며 아침에 깨우기 위해 목청을 높여 본 적도 없고, 숙제나 계획한 일을 하지 못해 허둥대는 아들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시간표와 계획표를 만들고부터 찰리는 거의 모든 것을 꾸준히 미리미리 하는 습관으로 몸에 익혀진 것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찰리가 5학년 때는 4학년 때와는 반대로 4/5학년 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한 학년 저학년과의 합반에 들어가자 담임선생의 권유로 찰리는 6학년으로 건너뛸 수 있는 월반의 기회가 주어졌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고심을 많이 한 것 같다. 찰리의 공부를 위해 월반을 시키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냥 나이에 맞는 학년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아들 찰리에게 뭐가 더 좋을지 많은 고민과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당사자인 찰리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친구인 선생들과도 특히 찰리 담임과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들은 주로 월반을 추천했다. 이때부터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공부를 꽤 시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와 찰리의 결정은 그냥 그대로 차근차근 학년을 밟으며 올라가기로 결정을 냈다. 나는 찰리가 지금까지 같이한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길 바라는 심정이었기에 그런 결정을 냈었다. 나는, 호주로 이민 왔기에 가족도 없었을 뿐더러 동창 한명도 없는 나라에 살다보니, 나는 찰리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 인생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만 하기에 한번 지나가 버리면 되돌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 그때그때 주어진 시간안에서 공부며 친구며 놀이 등 모든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즐기며 그때 그시절의 추억을 가득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아들 찰리에게 말했다.


찰리는 5학년부터 시작하는 학교 밴드부에 뽑히게 되어 악기를 하나 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밴드부로 아는 악기가 색소폰이기에 찰리는 학교 밴드부에 뽑혀 색소폰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이올린의 시작은 중고였지만 색소폰은 입으로 부는 악기라 학생용 색소폰을 3천 달러정도 주고 새 걸 사서 선택을 받은 아들에게 축하 선물을 주었다. 이것 또한 학교 밴드부이기에 레슨은 공짜였고 밴드부도 마찬가지로 학교를 대표하여 퀸스랜드 주에서 주체하는 학교별 공연 시합을 나가기 위한 학교 밴드부였다. 색소폰은 바이올린과 달리 좋은 소리 내는 데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은 소리 내기 힘든 바이올린을 먼저 배우면서 음표 읽는 법을 알게 되어 색소폰은 시작하자 바로 노래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색소폰과는 금방 사랑에 빠진 아들은 색소폰 연주 클라식, 팝송, 재즈 등 책을 사달라고 했다. 찰리는 스스로가 원해서 책을 보며 색소폰을 부르기 시작했다. 혼자서 색소폰은 배워나가며 실력이 많이 늘었다. 찰리가 색소폰에 재능이 있다며 좀 더 심각하게 색소폰을 시켜보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악기를 시작할 때 모든 악기는 취미 생활로만 하자고 아들과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졌다.

처음으로 축구 클럽에 가입해서 축구가 본격적인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교 건너편에 자리한 서퍼스 파라다이스 축구 클럽에 가입해 일주일에 두 번 레슨을 받았고 토요일엔 축구 시합을 하기 위해  골드코스트에 존재하는 모든 축구 클럽들과 축구 경기를 했었다. 축구 클럽 가입비는 삼백 불 정도가 들었지만 거기에 팀 유니폼과 양말 그리고 팀 사진까지 포함된 가격이라 비싸진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연습을 시키는 코치와 부코치는 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졌었다. 찰리는 처음 축구 클럽에 가입해서 5년 동안 계속 했으며 그 당시 축구 코치는 매튜 스콧 영이라는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였다. 아들딸 쌍둥이 막내들을 응원하러 나온 쌍둥이 아빠였고 아이들의 축구 코치를 5년 동안 했었다. 정형외과 의사라 어떨 땐 수술복을 다 벗지도 못하고 급하게 뛰어 올 때도 있었고 신발에 수술용 덧버선을 신고 오는 날도 허다했다. 이때 아들 찰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고 알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피가 무섭다며 의사가 되고싶어 하지는 않았었다.


어린아이가 있다면 운동과 악기 하나씩은 취미로 만들 수 있게 꼭 시키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작정 레슨부터 넣고 그 길로 나가기 위한 악기나 운동보다는 우선은 취미가 될 수 있는 그런 종목으로 아이가 관심을 갖거나 나의 아이에게 어울릴 것 같은 운동과 악기를 권하고 싶다. 운동이나 악기는 끈기와 노력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며 신중하게 선택하길 권해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면 안된다소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선택권을 아이에게 주면 선택에 대한 포기도 싶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는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지만 주지 않은 법을 알아야 하고 모든 선택에는 신중를 기해야 한다는 것을 어리면 어릴 수록 일찍 깨닫게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모든 선택은 최소 두번이상은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어주고 아이와 함께 엄마도 이야기하며 생각하고 함께 결정을 내리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아이의 선택이 하는 쪽으로 결정을 한다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켜주며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진행이 된 다음 아이가 욕심내며 배우길 원할 때, 그때부터 지원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찰리는 학교에서 체육 수업으로 배운 수영은 5학년이 되기도 전에 물고기 수준이 되어 나를 따라잡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축구는 매일 학교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시합을 하며 놀기를 일 년 넘게 하면서 친구들 이야기도 듣고 반과 후 학교 건너편 축구 클럽에 가입하여 연습하는 아이들을 오래 지켜보다 5학년이 되어서 나에게 부탁을 해 왔었다. 친구들이 소속되어 있는 축구 클럽에 자신도 가입해서 축구를 배워 좀 더 잘하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운동에 돈을 들여 배워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들에게 여러 번 다시 생각하길 권해주었다. 무엇이든지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원하겠지만, 시작의 결정은 네가 정하지만 자신이 결정한 것에 쉬운 포기는 보는 이로 실망감을 주니 선택은 신중하게 하자라고 어릴 적부터 찰리와 나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해둔 약속이 있었기에 찰리는 5학년이 되자 축구 이야기를 꺼내왔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찰리는 축구 클럽에 처음으로 가입을 했고 가입하고 보니 프리스쿨 나이 때 아이들부터 나이별로, 학년별로 축구 클럽이 운영되고 있었기에 찰리가 일 년 정도 시니어 학생이 되고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하며 뛰어놀았던 그 시간 동안 고심하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남자아이는 몸을 많이 움직이며 지칠 때까지 운동을 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놀이인 게임보다는 스포츠로 몸을 먼저 단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찰리에게 주말이나 방학 때 선택권을 주었다. 집에서 편하게 게임을 하고 혼자 노는 것과 수영장, 바다, 자전거나 보드를 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야외로 나가서 노는 선택권을 주었고 찰리는 항상 야외로 나가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며 노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게임을 잘 모르고, 못하는 아들이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성적표가 익숙한 ABCDE로 표시되어 나왔고 그전까지는 매우 잘하고 있다 정도의 다정한 글이었기에 성적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고 그리고 그때까지는 성적이 별 중요하지도 않았다. 6학년이 되어 성적표가 나오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 중에 한 명으로 찰리는 자리매김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6학년 마지막 텀을 하며 학생 회장 선출에 지원을 하게 되었고 지원한 몇 명의 아이들이 경합을 벌였다. 지원자들은 '내가 학생회장이 된다면' 하는 연설을 시니어 학생인 4학년부터 7학년들과 선생님들이 모이는 조회에서 자신들이 작성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지원자들의 연설을 모두 듣고 시니어 학생들과 전체 교사들 그리고 학교 직원들 모두가 투표를 해서 내년 학생회장을 뽑는 시스템이었다. 내 아들 찰리가 내년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서퍼스 파라다이스 공립 초등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동양계 학생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사립학교와는 달리 호주의 공립학교는 조금 많이 거친 면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학비가 일단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기 때문에 부모들의 수준도, 부의 상태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하면 된다. 나는 학교에서 5년째 일을 하고 있었지만 교장선생님도 찰리가 내 아들인 줄 7학년이 되어서야 확실이 알게 되었고 그전에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정도였다.


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앞에 나서는 것도 감투를 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찰리가 리더가 되어 리더십을 배우고 실천하며 점점 리더로서 변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조금 달라졌다. 어쩜 한국도 이렇게 변했다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아이가 리더가 되길 원한다면 응원해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7학년

학생회장이 된 찰리는 학교가 시작하자 곧바로 리더십 캠프에 일주일 참가하게 되었다. 퀸스랜드 정부 교육청에서 일체의 비용을 들여 골드코스트 지역 7학년 전교 학생회장들만 모아 리더십 교육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리더들을 만나는 기회와 환경과 미래에 대한 초청 강사의 강의를 들으며 리더로서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실천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고 했었다. 일주일 동안 캠프를 다녀온 찰리는 리더십 캠프 가기 전과후의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나의 아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좀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리더십 프로그램이 찰리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찰리의 7학년 생활은 바쁜 일정의 연속이었다. 일주일 중 수요일은 주니어와 시니어로 나뉜 전체 조회를 두 번 진행해야 했으며 관련하여 학교 직원 대표자와 담당 선생님과 미팅은 물론이고 학교의 모든 행사 진행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 담당자들을 만나 미팅을 하며 계획하는 등 일 년 동안 학교를 운영하는 한 사람으로 역할을 톡톡히 다하며 일 년을 보낸 찰리였다. 호주는 학생 회장을 위주로 학생 간부들과 학생들이 학교일을 전적으로 주도했으며 특히 학생회장은 담당 직원이나 교사들, 학생들 사이에서 의견을 듣고 조율을 하며 리더로서 학교를 끌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찰리는 열심히 학교일을 하며 빠진 수업들은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따라가며 모든 면에서 열심히 바쁘게 잘 보낸 일 년이 되었다. 졸업식이 있는 날 아들 찰리는 최우수 학생 시민상과 몇 가지 상을 더 받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을 준비하며 교장 선생님이 날 불렀다. 모든 상들이 찰리에게 몰려있다며 나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물어왔었다. 교장 선생님의 취지는 초등학교니까 한 아이인 찰리에게 모든 상을 주는 것보다는, 찰리에게는 많이 미안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되도록이면 골고루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물론 나는 흔쾌히 교장 선생님 의견에 동의했었다.


7학년을 마치기 전에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그것은 내년부터 5년 동안 다녀야 하는 고등학교를 정해야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주는 초등학교 7년 그리고 고등학교를 5년으로 총 12학년을 두 개의 학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누는 시스템을 쓰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중학교라는 학교는 없었다. 이때가 되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모들도 고민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두고 사립과 공립 중에서 생각을 해야하고 일단 공립은 집 근처로 선택할 수 있는 몇개의 고등학교가 주어지며, 사립일 경우 선택이 무척 많지만 학비 장학금 신청을 위한 학교별 시험 일정에 따라 신청하고 시험을 각각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진학 걱정을 하는 나의 친한 동료이자 찰리 7학년 담임 선생님이 조언을 주었다. 자기의 딸도 그랬다며 찰리를 그냥 공립고등학교에 보내는 말이었다. 찰리는 이미 공부하는 습관이 자리잡은 아이라 굳이 사립학교를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립학교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잡아주며 공부로 아이들을 끌어주기에 대부분 부모들이 아이를 사립학교로 보내는 선택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장담하는데 나에게는 그냥 돈 낭비가 될 거라고 했다. 친구의 직접적인 표현은 '돈이 남아돌아 버리고 싶다면 찰리를 사립학교에 보내'라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학교를 옮길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10학년 때 주어지니 고등학교 첫 시작인 내년에는 공립학교를 보내도 찰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찰리의 생각은 대부분의 초등학교 친구들도 선택해서 가는 베노아 고등 공립학교를 가고 싶어 했고 자주 나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밝혀왔었다. 그래서 의견이 모아지는 찰리가 가고 싶어 하고 공립 고등학교의 지원서를 받아 그 학교의 장점을 읽으며 공부해 나갔다.


베노아 하이 스테이트 스쿨, 베노아 공립 고등학교는 골드코스트에서는 유명한 학교였다. 공립학교로써도, 사립학교에도 결코 뒤지지 않고 좋은 교육 시스템과 우수한 성적을 내는 학교로 이름이나 있었고 몇 개의 아주 특별한 반들이 꾸려지고 있었다. 특별반은 3년 동안 거의 모든 수업을 프랑스어로만 하는 프랑스어 반, 체육 특기생반, 음악 특기생반 그리고 미술적 재능 특기생반 등 4개의 특별반 그리고 일반반들로 나눠져 있었다. 프랑스어 특별반에는 주로 공부를 잘한다는 아이들이 지원을 했고 찰리도 거길 가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프랑스어 반은 생각에서 제외시켰다. 이미 영어 말고도 한국어를 하나 더 하고 있었기에 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나는 찰리에게 제3의 외국어를 새로이 배우며 그것으로 고등학교 수업을 3년 동안 받게 하는 그런 스트레스는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배운 프랑스어 수업이 내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찰리는 바이올린과 색소폰으로 시험을 치러 음악 특별반에 쉽게 합격하여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8학년 고등학교 시작

8학년 고등학교부터는 아침과 오후 출석 체크를 위해 담임선생님의 교실을 찾아 가야하며 거기서 학교 전달 사항을 받고 각자의 수업표에 맞게 수업 담당 선생님들 교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듣게 되어 있었다. 8학년이 된 찰리가 받게 될 고등학교 수업은 총 6과목으로 영어, 수학 A, 과학, 사회와 환경, 체육 5과목인 필수과목이었고 다른 하나 선택과목은 음악이었다.


찰리는 음악 특별반을 시작하니 현악부와 콘서트 밴드부에는 무조건 가입이 되어 있었다. 색소폰으로 밴드부를 시작하고 하루 만에 찰리는 불만이 생겼다. 밴드부에서 파트를 맡고 보니 낮은 수준의 연주 부분만 주어져 지루했었던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하는 악기로 등급시험을 치러 등급을 가지고 있었지만 찰리는, 우리는 악기로 등급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악기와 스포츠는 취미 생활이었지 거기에 더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았었다. 8학년이 된 찰리는 색소폰으로 등급은 없었지만 혼자 쌓은 실력이 꽤 높았기에 밴드부에 참가해서 보니 형평성이 떨어진 파트 결정 부분에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찰리는 처음 밴드부의 역할이 단조롭고 지루했지만 잘 참고하다 보니 일 년 동안 몇 번의 업그레이드를 받으며 어려운 파트 연주를 담당하는 역할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밴드부 총책임자 선생님인 미스터 브케논 권유로 찰리는 색소폰 등급 시험을 도전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시도는 3등급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등급 시험은 등급 지정곡 2개와 자유곡 1개를 그리고 이론 시험을 시험관 한 명 앞에서 일대일로 치러졌었다. 찰리는 혼자 연습해서 당당히 하이 디스팅션인  A+을 받고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 해엔 등급을 건너뛰어 5등급을 쳤고 그다음 해에도 건너뛰려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다 6등급을 친다는 선생님의 권유로 6등급, 7,8 등급까지 순서대로 받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편 찰리는 사회환경과목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학교에서 진행하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 선별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그 시험에서 99퍼센트라는 최고의 점수를 받고 뽑히게 되었다. 시험은 영어, 수학 그리고 문제 해결 능력 세 가지 분야로 나뉘어 시험이 치러졌다고 했다. 그때부터 찰리는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보다 더 많은 개인적 혜택과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으로 뽑힌 찰리에게는 멘토 선생님도 따로 한분 정해져 언제든지 상담이 가능했었다.


고등학교도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일 년에 두 번 선생님들과 부모의 미팅이 이뤄졌다. 일 학기 첫 번째 텀 마지막 쯤에 한번 그리고 일 년을 마치는 기말고사를 치른 후 결과를 가지고 두번째 미팅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담임 선생님 한분만 만나면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수업 듣는 과목별 선생님을 따로 만나서 미팅을 해야 했다. 첫 번째 인터뷰는 평가 모의고사를 가지고 하는 미팅이라 수업에 임하는 자세 등에 대해 이야기를 주로 나누고 4 텀에 받는 인터뷰는 일 년을 마치는 기말고사 시험 결과를 가지고 미팅을 하기에 성적에 대해 좀더 진지해지는 편이었다. 찰리의 첫 번째 선생님들은 다행스럽게 다들 좋으신 분들이었고 찰리도 만족했었다. 집으로 배달온 성적표에는 성적과 행동평가 그리고 과목 선생님들이 남기는 몇 줄의 평가 글이 적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부모와의 미팅 필요성을 알려오는 칸이 있었다. 보통 수업 자세가 좋고 성적이 좋을 경우엔 미팅이 필요치 않다고 써서 보내온다 . 고등학교내내 누구도 미팅의 필요성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찰리가 이야기하는 과목 선생님들의 얼굴을 알고 싶었기에 나는 모든 선생님들과의 미팅을 신청했고 간단히 인사만 나누는 정도로 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인터뷰는 학교 생활 일 년을 마감하는, 방학 직전에 하는 미팅이라 찰리와 나는 선생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작은 선물도 함께 가지고 갔다.


찰리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학교 수업과 시험이 마친 11월 말과 12월 초에 우리는 선생님들 선물 사러 다니는 쇼핑을 하며 나중에는 이 시기에 큰 행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고등학교 때부터는 그전 초등학교때 한두명이었던 선생님들에서 보통 10분 이상의 선물을 사야 했기에 우리는 몇 배의 시간을 쇼핑에 투자하게 되었고 이것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들도 모두 장만하는 시간으로 우리들만의 전통으로 만들어갔다. 일 년을 마무리하기 전에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특히 선생님들에 일 년 동안 감사했고 고맙다는 마음을 작은 선물에 담아 함께 전달했다.


그러고 나면 학교는 일 년을 마무리하는 행사로 '어워드 날, 상장 주는 날'이 있고 이때는 학교 강당이 아닌 골드코스트 아트 센터를 빌려서 전교생 학생들과 부모들을 초대하여 4시간 넘게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의 날이 펼쳐졌다. 이날 과목별 우수상, 학년 전체 일등상, 전교 학생회장 취임식 등 전 학년이 한자리에 모여 드라마, 음악, 춤 공연도 함께하며 펼쳐지며 대대적으로 일 년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부터 찰리는 모든 과목별 우수상과 학년 대표상을 받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받았다.


찰리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옮기게 되자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호주 고등학교 교육 시스템이며 수업 과목 선택이며 시험 방식 등 모든 면에서 경험도, 지식도 없는 백지상태였고 찰리처럼 나도 배워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 찰리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며 당부를 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엄마는 아는 게 없다. 너와 똑같이 처음 듣는 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같이 생각하며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건 단지 너를, 찰리를 돕는 역할만을 할 뿐 이제부터의 결정권은 아들 찰리의 몫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받아오는 모든 전달 사항이나 공부에 대해는 완벽히 이해하고 집에 오라고, 절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찰리가 다 알고 이해해야지 엄마인 나에게 설명을 잘 할서이고, 그럼 듣고 엄마인 내가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라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눈치껏 매너 있게 선생님들을 이용해서 다시 물어보고 이해한 뒤 집으로 와야 한다고 전해주었다.


내 아들 찰리는 내 말을 참 잘 알아들었다. 특히 공부에서 이해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집에 오지 않았고 그것을 위해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까지 포기하며 끝까지 알고 이해한 후 집으로 왔다. 그래서 나는 특히 하교 후 아들을 픽업 가서는 차에서 오랜 시간 아들을 기다리며 차에 앉아 있을 때가 허다했다. 나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낭비되었지만 과외를 한 번도 넣지 않고 좋은 성적을 거뒀으니 비겼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찰리가 나오면 차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 내내 찰리가 학교에서 보낸 크고 자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의 등하교를 시켜야 하기에 우리는 차로 이동하는 동안 그날 하루에 있었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것은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습관으로 몸에 베어있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대화가 줄어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대화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이야기를 서로 물어봐주고 들어주다 보면 그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 버리는 듯하다. 찰리처럼 자신이 보낸 하루 중 특별했던 일들을 엄마에게 말해주려 가슴 가득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을 것이다. 대화하는 습관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대화하는 습관이 어릴 적부터 아이들 몸에 배어 있어야 엄마와의 소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24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9학년

한국으로 치면 중3이고 여기서는 미들 페이스라고 하고 찰리는 9학년 미들 페이스를 대표하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밴드부는 하나 더 추가되어 한 개의 현악부와 두 개의 밴드부에 참석을 했고 그걸 위해 일주일에 3일 이상은 학교 시작 전과 하교 후 전체 연습에 참석했다. 음악 특별반으로 합격해서 들어왔으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의무였기 때문이었다. 9학년 수업 과목은 8학년과 같은 걸로 이루어졌고 9학 마지막 텀에서는 10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위한 선택과목 설명회의 밤이 열렸다. 거기서 설명을 듣고 10학년에 선택한 과목은 화학, 수학 B와 일본어였다.


9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자 개학하고 첫 번째 열리는 전체 조회에 부모들을 초청해 주었고 전체 조회 후 바로 학생 간부들과 그들의 부모들을 초대해 축하 모닝티 파티를 학교 측에서 열어주었다. 나도 거기에 초대받아 참석해 갔고 호주에 살면서 처음으로 인종차별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에게 인종 차별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 사람은 바로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마 아시안이었던 아들이 회장이 되어서인지 파티에 있는 동안, 인사를 하러 와서도 옆에 서 있던 부회장 엄마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했고 나와는 눈 한 번을 마주치지 않았었다. 나는 그때까지 초등 공립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거기 교장선생님에게는 신용을 받으며 학교 캠프를 거의 내 마음대로 하는 권한까지 부여받으며 인정을 받고 지냈는데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이런 반응은 나에게는 엄청난 쇼크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쇼크를 받고 돌아와서도 내내 믿기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한 교장선생을 생각하니 9학년 학생회장이 된 아들의 꿈인 12학년 때 학생회장의 꿈은 이 교장에게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자 내 아들의 꿈이 좌절될 것 같아 안쓰러움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것 또한 찰리가 견뎌내야 하는 문제였고 나는 내 마음을 추스리기에 그날은 바빴었다. 하교 후 찰리를 픽업한 뒤 나는 말을 꺼내 놓으며 그때의 상황 설명과 함께 나의 기분과 걱정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었다.


인종차별, 타국에 살다 보면 한두 번은 받고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무작정 아시아인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낮춰보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크게 느껴 본 적 없었다. 이번은 달랐다.' 나라는 존재를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듯 무시했다'는 표현을 해야 하나 아들 찰리에게 말할 때까지도 나는 분명하게 내가 받았던 이 기분을 정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분이 정말 나빴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마 내가 일하는 학교 교장선생님과 너무 달라 더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인정해 주시고 믿어주고 지원해주시는 분이라 너무 비교가 되었었다. 이날 우리는 전에는 한 번도 다뤄보지 못한 무거운 주제인 '인종차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선 아들이 인정하길 바랬다. 호주에서 태어나고 살며 자란 호주 사람이긴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외형은 그냥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아들이 알았으면 했다. 외형을 고칠 수는 없으니 우리는 두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이면서 호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특히 찰리에게는 자신을 더욱더 빈틈없이 철저하게 만들라고 권했다. '외형으로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쉽게 볼 수 있는 조그만 허점도 보이지 말라고 했고, 무엇을 하든 남보다 월등히 앞서야 한다고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너를 쉽게 넘볼 수 있는 거리도, 빈틈도 주지 말라'라고 당부했었다. 아마도 그날은 찰리에게도 큰 충격적인 날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인 내가 이런 섭섭함을 보인 적도 이렇게 '강해져라, 빈틈도 허점도 보여주지 마라, 월등히 뛰어나라'라고 강조해 본적이 한번도 없었고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여러 차례 나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다 좋은 경험 했다 생각하고 털어냈고 그렇게 다소 순해진 마음으로 아들에게 정정하며 말을 몇차례 더 했었다.




10학년 여전히 베노아 공립 고등학교에서

10학년, 이때부터 아이들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조금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부모들도 아이들의 대학 진학을 목표로 사립이나 특수 고등학교로 아이들을 옮기는 경우가 생겨났다. 나도 살짝 동요되었지만 찰리는 여전히 이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12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고 싶은 포부를 다시 한번 이유로 들며, 공부는 자신이 알아서 잘하겠다며 나를 설득시켰다. 고등학교로 들어온 8학년부터는 학교 관련 모든 선택권을 아들에게 맡겼던지라 아들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고, 나는 아들이 공부하는데에 있어서는 한번도 재촉하거나 강요해본적이 없었다. 어릴적부터 공부는 자신이 알아서 하는거라고, 엄마는 할만큼 알아서 했으니까 너도 공부는 니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었고 그래서 공부하라는 소리는 단한번도 찰리에게 한적이 없었다. 어릴적 나의 어머니는 공부만 강요하신 옛날 분이셨다. 티비도 만화책도 못보게 했었고 그냥 공부만 하라고 엄청 강요하신 분이셨다. 나는 그런 엄마의 방식을 싫어했기에 나는 찰리에게 공부는 절대 강요하지 않았고 엄마랑 거실에서 놀자며 자신의 방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자주 불러내서 방해는 했었다. 나는 찰리가 어릴적부터 한달에 한번 시립도서관에가서 20권 이상의 책을 빌려와 매일 읽었었고 특히 방학때는 이주에 한번씩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밤세 책을 읽기도 했었다. 낮에는 몇시간씩 앉아 그림도 많이 그렸다. 그러면 어린 아들 찰리는 '엄마 또 책 읽어요? 엄마 또 그림그려요?'하며 몇시간씩 책읽고 그림그리는 나의 옆으로 책을 가져와 같이 앉아 읽기도 하고 스케치북을 가져와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며 찰리도 그렇게 그냥 습관이 들어버린 것 같다. 엄마도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면 몇시간 동안을 자신을 보지 않고 집중하니 찰리도 그런 시간에는 자신도 공부나 책이나 뭐든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각자가 알아서 해야할 몇가지들이 있다는 것을 어릴적부터 알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알아서 잘 하겠다는 찰리의 말을 믿었고 그래서 좋았다.

 

10학년부터는 축구 대신 테니스로, 단체 운동이었던 축구에서 개인 운동으로 바꿨으며 운동 욕심이 큰 아들은 테니스를 더 잘하기 위해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키웠다. 엄마인 나도, 찰리도 테니스가 축구보다 훨씬 비싼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고는 알게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미리 알았으면 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테니스를 먼저 권한 나의 실수니 감당해야지' 하며 우스게 소리를 한적도 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또 한 번의 월반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전과 같은 이유로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하지만 10학년부터 시작되는 화학 과목에서 시범 운영방식인 10학년 중 8, 9학년 때 과학 과목 성적 A 이상의 아이들 몇 명만을 뽑아서 11학년 수업을 듣게 했었다. 그래서 화학 한 과목만 11학년 수업을 듣게 되었고 나머지는 10학년 수업을 그대로 받았어. 그렇게 한 과목은 일 년을 뛰어넘어 12학년 때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한 과목이 빠지니 학교 수업 부분에서는 여유가 생겼으나 대학 강의를 하나 들을 수 있는 특혜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오가며 자동차 기사 역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10학년 때부터는 9학년 때 6과목 중에 A 득점 5개 이상인 학생들을 뽑아 '영예스러운 학생'으로 특별 관리해주는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찰리는 영예스러운 학생으로 뽑혔고 찰리 앞으로 한 명의 멘토가 또 생겼다. 전 학년 때 생긴 멘토와 영광스러운 학생 그룹에 뽑혀 두 명의 멘토가 찰리에게 배정되었다. 이 멘토들은 멘티들에게 생기는 학교에서 받는 불편함이나 대학 진로 등을 언제든지 상담해주고 해결해주는 역할을 담당해 주었다.

 

바이올린은 10학년에 들어와 그만두게 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에 치중하고 싶어진 아들의 결정이었다. 아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7년동안 했던 바이올린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색소폰은 지금까지 여전히 아들의 취미생활로 완전히 자리잡고 있다. 10학년이 되자 색소폰으로는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아 만들어지는 그래서 주로 11학년과 12학년으로 멤버들로 이루어진 빅 밴드부에 10학년인 찰리가 뽑혔다. 그리고 색소폰 개인 레슨을 한 번도 받지 않고 혼자서 연습하여 3등급, 5등급 시험을 쳐서 A+을 받자 밴드부 총책임자인 선생님이 어느 날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 등급인 6등급 시험을 위해 찰리를 가르쳐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때까지는 악기 레슨을 위해 돈을 써 본 적이 없었고 누군가 나의 아들을 공부도 아닌 악기를 가르쳐 보고 싶다고 먼저 연락해 온 적이 없었기에 그 당시 나는 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전 초등학교 때에도 색소폰을 좀 더 고려해 보라는 말을 들었었고 레슨을 넣고 그쪽으로 재능을 길러주라는 제안을 음악 선생님들에게 여러 번 받았지만 악기는 취미라는 원칙대로 아들도 별로 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찰리가 색소폰이라는 악기에도 욕심 생긴 모양이었다.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그래서 6등급을 위한 일주일에 한 번 서너 달 개인 레슨을 받았고 6등급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그런 다음 아쉽게도 크라니넷이 전공인 밴드부 선생님은 자신의 소지한 색소폰 6등급으로는 찰리를 더 이상 가르칠 실력이 되지 못해 짧은 몇 달간의 악기 사교육은 막을 내렸다. 6등급을 취득하면 그 악기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꽤 높은 실력을 성취한 것이었다. 나는 아들이 5등급 뒤 7등급 시험 준비를 원했지만 6등급부터는 어려워진다는 밴드부 선생님의 권유로 6등급을 준비했었고 직접 준비시키고 가르쳐보고 시험을 치르는 찰리를 보고는 선생님도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셨다. 7등급으로 뛰어넘어도 모자라지 않는 실력이라고 미안하다고 시험 치는 곳에서 만난 나에게 직접 고백하셨다. 하지만 나는 6등급 시험을 준비하는 아들이 등급 시험을 위해 연습한 지정곡 2개와 자유곡 한곡을 연습하는 몇달 동안 너무 행복했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곡 중에서 아직까지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곡이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는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소폰 곡이기도 하다.


이때까지 몇 번의 월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이 있었다. 10학년이었지만 11학년 화학 수업을 받으며 11학년을 제치고 최우수 성적을 받으니 그 학년 아이들의 시샘을 2년 동안 그 학년들이 졸업할 때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한학년 낮다고 덩치가 작지도 않았고 공부도, 스포츠도, 악기도 잘하는 아들에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고 아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미움받은 재미있는 사소한 사건들로 이야기를 꺼리를 더해주는 해프닝 정도로 치부해 버리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한 살 많은 형들에게 미움받는 찰리가 안쓰러웠고 또 나름 한 학년 높은 11학년들이 받는 고통도 이해가 되었다. 화학 선생님의 역할도 있었을 거라는 짐작이 된다. 찰리가 윗 학년을 이기니 찰리를 이용하며 비교하며 윗 학년들에게 당근이 아닌 채찍을 쓰셨을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엔 웬만하면 월반보다는 같은 또래 학년끼리 경쟁하며 어울리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다시 한번 얻게 되었다.




11학년

영어, 수학 B,  수학 C, 물리, 화학, 일본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찰리의 목표는 의대로 대학 진로를 잡았다. 11학년이 되어서 생긴 목표가 아니었다. 9학년 때 테니스장에 테니스를 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엠블란스를 부르고 다친 사람을 도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두 손으로 다친 사람 머리에서 나는 피를 지혈하고 있었고 아들도 나를 도와 응급 번호로 전화를 해서 엠블런스를 부르고 거기서 지시하는 대로 나와 함께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응급차에 도착하고 환자를 실어갔고 우리는 평소보다 많이 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충격을 받은 듯한 찰리를 보며 그 사람은 괜찮을 거라고, 안전한 손에 맡겨졌으니 이제 그 사람은 괜찮을 거라는 말을 몇번 되풀이하며 어두워진 밤길 운전에 집중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조용했던 찰리가 들려준 말이 있었다. '엄마 피가 무서워서 의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직업인데 이젠 의사가 되어보고 싶어요. 다친 사람을 돕다 보니 피가 손에 묻은 것도, 다친 사람을 돕는 기분도 너무 좋았아요'였다. 그런 후 아들은 본격적으로 목표를 의대로 잡고 스스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호주에서 대학 들어가는 방식은 내가 한국에서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특히 호주에서 의대는 고등학생일 경우에는 일등급중에서 최고 성적과 인터뷰 실력까지 겸비하는 아이들에게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 전공이었다. 그래서 일등 급중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높은 평점을 받는 어려운 과목들을 선택, 공부해야 했고, 그 선택 과목들로 수학 C와 물리를 선택하고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호주에서 특이한 점은 성적 A를 1-10등급으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기에 처음에는 쇼크를 받은 듯 멍해졌었다. A, A+이 아닌 A1, A2,.... A10까지 있다는 말이었고 A10이 A 중에서는 최고 높은 성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1학년 성적도 12학년 성적과 함께 반영이 된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고등학교 11학년부터는 시험도 어려워졌다. 특히 수학 C와 물리 시험은 마지막 한두 문제는 답을 내기 위해 A4용지가 몇 장이 필요할 정도로 긴 답을 써 내려가야 했고 과목별로 많은 어사인먼트와 발표를 했어야 했다. 이 모든 일 년 동안의 시험 성적과 어사이먼트 성적으로 등급이 결정되고 그리고 마지막 대입고사 성적이 함께 합쳐져 대학 진학이 결정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12학년 성적은 더욱 까다로운 검열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어진 시험과 숙제 그리고 성적의 적정성과 공평성을 다시 한번 검열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학교별 각 과목 대표 선생님들로 검사관이 짜이고 자신의 소속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12학년 학생들이 받은 모든 과정과 시험문제, 점수, 일 년에 걸친 모든 어사인먼트를 렌덤으로 뽑아 검열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의 점수가 단 한 명이라도 낮춰질 경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시험문제들이 대체로 쉬웠거나 학생들의 어싸인먼트를 해낸 수준이 낮거나, 상향되어 주어진 성적이 발견될 경우 그 학교 전체 12학년 학생들의 점수가 하향 조정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교 자체의 상대 평가 점수가 내려가는 모욕적인 결과를 받게 된다. 일 년의 일을 거의 다시 해야 하는 선생님들에게 엄청난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학교 상대평가가 낮아지는 학교 명예에 큰 상처를 주는 결과까지 초례하게 된다. 한국에서 내가 교육받았을 때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철저한 시스템인 것 같았다.

 

그래서 11학년이 시작되면 이제부터는 선생님들과 부모들의 미팅에서는 주로 대학을 염두에 두고 상담을 한다. 11학년이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찰리에게 낯선 사건이 발생했었다. 선택과목 수학 C는 최고 어려운 수학 과정이라 수학 C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으니 두 개의 반 정도만 나왔고 두 분의 선생님이 각자의 반에서 가르치셨다. 그중 한 분은 잘 가르치기로 유명해서 학부모들에는 물론 학생들까지도 모두가 그 선생님 반에 들어가길 원하는 워너비 선생님 한분이 계셨고, 다른 한분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찰리는 안타깝게 두 번째 할아버지 선생님반으로 정해졌었다. 찰리는 자신의 멘토들을 통해 워너비 선생님 반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었으나 우리의 결정은 아직 11학년이니 다른 분에게 배워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해서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시작하고 첫 번째 텀에서 치르는 예비 시험 결과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한쪽반은 이미 배운 범위에서 시험에 나왔고 찰리 반에서는 그 범위는 배우지도 못한 체 시험이 치러진 것이었다. 그래서 찰리의 반에서는 학생들 모두가 FAIL, F가 나왔고 찰리는 생전 처음 D라는 점수를 받은 것이었다. 이날 아들이 얼마나 놀랬는지 점심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엄마 내가 D를 받았어요. 수학 C에서 D를 받았어요' 하는 찰리의 목소리는 자신도 너무 황당해서 믿을 수 없다는 자조적인 목소리였었다. 나는 처음엔 D를 B로 잘못 듣고 괜찮다고 말하며 달래 주었다. 'B도 잘한거지 괜찮아'하는 나의 답변에 찰리가 다시 한번  '엄마 B가 아니고요 D요 D'라고 정정해 주었다. 나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아들의 놀란 목소리와 반응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B도 안 받아본 아이가 생전 처음 받아보는 D에 어지간이 쇼트를 받은 모양이었다. 집으로 픽업해서 오는 동안 사정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른 반과 자기 반의 비교와 가르치는 선생님의 스타일에 대한 분석이었다. 아들의 수학 C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 이야기가 딴 길로, 자주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날 배워야 하는 양에 진도는 절반도 못미치며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로 시간이 지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선생님의 이야기가 수업 진행은 차질을 주었지만, 수업이나 성적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좋은 이야기로 나중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아 재미있게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성적뿐만이 아니라 반 아이들 전체 거의 30명 가까이가 F, 불합격 성적을 받았으니 무슨 조처를 취하려다 우리는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11학년 그것도 어려운 과목을 선택한 아이들이라면, 그 부모들이라면 어지간이 불만들을 학교 쪽으로, 담당 선생님 쪽으로 할 거라는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임시 성적을 가지고 첫 번째 11학년 선생님과의 미팅을 하게 되었다. 전과목 일등을 달리는 아이를 맡아서 D를 받게 했으니 나를 대하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이미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전에 아들에게서 그 선생님에게 들어온 많은 컴플레인에 대해 전해 들었기에 나는 안쓰러움이 들었었다. 첫 만남에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고 곧바로 나의 그럴 수도 있다라는 무덤덤한 반응에 선생님은 차츰 편해지셨다. 그때 11학년 성적이 대학 입시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선생님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찰리는 일 년 내내 수학 C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수업중 딴 길로 빠지지 않고 진도가 제대로 나갈 수 있게 보조 선생님 역할을 했었다 했다. 그 결과 11학년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항상 워너비 선생님 반에서만 수학 C 과목 최우수 성적 수상자가 나왔던 전설을 찰리로 인해 학교에서 내려오던 전설적 기록이 깨졌었다.


색소폰 7등급을 받아냈고, 운동은 여전히 테니스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쳤고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운동을 즐기며 체력을 키웠나 갔다. 그리고 11학년 텀 4가 되자 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던 12학년 전교 학생회장에 출마를 했고 너무 쉽게 학생회장으로 뽑혔다. 여기서도 초등학교 때의 학생회장과 거의 같은 경로로 선택이 되었지만 조금은 더 까다롭게 출마 학생들의 연설이 몇 번 진행 되었고 확연히 다른 점은 투표 결과의 순서대로 학생회장 후보자 4명, 남자 둘, 여자 둘로 최종 확정이 되면 이들 4명 중 학생 회장과 부회장을 주는 마지막 결정권은 교장선생님의 단독 권한으로 되어 있었다. 인종차별을 처음으로 나에게 느끼게 해 주었던 교장선생님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부회장도 괜찮지'하며 지나가는 소리로 아들에게 말했을 정도였지만 뜻밖에도 교장 선생님은 쉽게 아들 찰리를 전교 회장으로 뽑았다고 했다.


나는 아들 한 명을 키웠지만 남자아이들에게는 운동은 필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할 시간을 쪼개서라도 많이 시켜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많아져도 운동을 줄일 필요 없다. 운동을 줄이는 것은 한 끼 밥을 줄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 때에 받는 모든 스트레스를 땀과 함께 흘려버리는 것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악기를 하나 해서 취미 생활이 넓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16살 되는 생일이 지나자마자 아들은 곧바로 운전 필기시험을 쳤고 L면허를 취득했다. 어릴 적부터 운전하는 나를 보며 아들은 운전에 관심이 많았었고 운전할 수 있는 나이를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빨리 운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운전면허가 허용되는 최소 나이에 바로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단 L자 면허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조수석에 오픈 면허가 있는 사람, 즉 아들 찰리가 운전하는 동안 내가 옆에 계속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차를 몰고 나갈 수는 없게 되어있었다. 이렇게 나와 처음엔 운전연습을 하며 기록하고, 전문적으로 운전을 가르치는 분에게 한 시간짜리 5번의 교육을 넣었고 전문가의 주행 연습은 시간이 배로 합산을 시켜 주행 기로에 넣을 수가 있었다. 이 5번 전문가 연습 중 맨 마지막 5번째는 P자 주행시험을 치러 갈 때 사용했다. 주행 시험 중 양쪽에 브레이크가 달린 전문가의 차를 이용해 면허 주행 운전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안전하기에 좋았다. 100시간이라는 운전 시간 기록과 주행 거리 기록을 꼼꼼히 채워서 17살 생일이 지나면 이기록들을 들고 주행시험을 치면 P자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P자 운전면허부터 혼자 운전할 수 있는 면허이다. 찰리가 처음으로 내차를 운전을 하니 나는 운전하던 때보다 몇 배로 신경이 쓰였지만 운전을 배우며 즐거워하는 아들 모습에 겁 많은 엄마인 내가 용기를 더 내야 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기술을 하나 내가 직접 전수해주는 것이라 용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가르치며 즐거웠고 지금 우리들의 기억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12학년

학생회장이 된 아들에게는 회장들에게 주어지는 빨간색의 재킷이 생겼고 칼라에 소속되는 단체의 배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학생회장이 된 후 첫 아침 조회에 학부형들이 참석되었고 특히 간부 부모들은 학교에서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남자 학생회장 뽑는 일이 제일 쉬웠다고 털어놨기 때문이었다. 월등하게 많은 투표를 받았고 거의 모든 선생님들의 추천을 받아서 눈을 감고도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이 교장선생님에게서 이런 말이 나와 뜻밖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기뻤다. 아침 조회를 마치고 전과 같이 간부들 부모들은 학교 측에서 주체하는 모닝티 파티장으로 갔다. 파티장에 가서 있으니 이번엔 교장선생님이 제일 먼저 학생회장 엄마인, 나에게 걸어와 인사를 해 왔다. 아들 찰리의 자랑을 엄마인 나에게 늘어놓으며 3년 전과 완전히 달라진 행동에 나는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표시 내지 않고 잘 받으며 감사함을 전했다. 아들도 이날 교장 선생님의 행동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고 교장 선생님이 다른 부모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아들이 다가와 전해준 말이 있었다. 아무리 막판 뒤집기 단독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교장선생님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찰리는 그동안 자신의 실력을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선으로 끌어올렸다고 했다. 거기에 자신의 스피치와 투표 결과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의 강력한 추천서들이 아무리 마지막 결정권을 지고 있는 교장선생님이라 해도 그것을 뒤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9학년 때 내가 아들에게 했었던 말을 아들은 이렇게 모두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성장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학생회장이 된 아들은 12학년 내내 하루도 바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시간을 쪼개며 지냈었다. 7학년 때의 초등학교 전교 학생회장과는 9학년 때 학생회장과는 천지 차이로 고등학교 12학년 전교 학생회장은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잘 처리하며 잦은 회의로 빠지는 수업도 잘 따라잡으며 훌륭히 학생 회장 역할, 12학년을 소화해 나갔다. 12학년 때는 화학 수업을 일찍 끝내며 받은 혜택으로 대학 수업을 듣는 바람에 더욱 바빠졌고 엄마인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점심시간에 고등학교에서 픽업해서 대학교로 데려갔고 대학교에서 화학 강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다시 고등학교로 데려다주는 일을 일주일에 두 번을 일 년 동안 했었다.


테니스로 여전히 주말이나 주중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놀이 겸 운동으로 했고 색소폰을 8등급을 취득했며 등급은 여기서 끝을 냈다. 그 후의 자격증은 색소폰을 전문으로, 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자격증이라 혼자 힘으로 취득할 수 있는 등급을 다 취득한 샘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일 년 전부터 건강상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었고 아들 뒷바라지만을 하며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일하지 않고 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고 또한 내가 조금 심각히 아플 땐 거기까지 신경 써야 하는 아들이 안쓰럽기도 했었다. 아들은 아픈 엄마를 돌보는 역할도, 학교 생활이며 공부며 악기며 모든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성적으로 모든 분야를 휩쓸었다.


그렇게 바빴던 고3 생활 중에서도 아들은 아침 등교시간보다 한 시간씩 일찍 학교를 가서 그 전날 배운 수학 C나 물리 수업을 이해하지 못한 친구들의 요청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이 선생님들에게도 발견이 되었고 나에게도 선생님들 인터뷰 때 전해 들어올 정도였다. 아들이 친구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침에 한 시간 이상 일찍 서둘러 학교로 출발해야 하는 사정상 나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우리는 보통 6시 전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 전까지 학교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친구를 돕는 이 행동에 의해 잠시 아들에게 혼란이 찾아왔다.

호주의 대학입시인 OP 방식 때문이었다. 찰리가 도와주는 친구들은 다들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아이들이었고 A 점수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되면 최고를 달리고 있는 찰리에게는 친구를 가르치지 않은 것이, A의 실력을 비슷하게 키워주는 것이 불리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 아들 찰리가 A10을 가지면 다른 친구들은 A를 받아도 10 근처에 오면 아들 찰리에게 불리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학교를 가서 친구들을 가르치는 찰리에게 몇 분의 선생님들이 그런 행동을 멈추라고 OP시스템을 다시 한번 알려주며 찰리 자신을 위해 멈추라는 충고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나의 생각을 물어왔었다. 나도 이런 대학 입시제도가 낯설었지만 나의 생각은 흔들림 없이 분명했다. '배우고자 노력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친구는 함께 커 나갈 때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해주었다. 나중에 대학 가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 너의 친구들이 각 분야에서 모두 다 잘되어 있다면 멋질 거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대학을 가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은 함께 끌고 가라고 말했다. 아들은 나의 생각에, 답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안아주며 자신의 생각도 나와 똑같다는 말을 해 왔다. 훌쩍 커버려 엄마를 안아주는 아들에게 안겨 나의 아들이 바르게 잘 자라주었구나 싶어 흐뭇했었던 기억이 난다. 아들은 열심히 고등학교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 생활 마지막쯤에 P자 운전면허를 취득해서 혼자서 차를 몰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었다. 모든 시험이 끝이 나고 졸업을 앞두고 일 년을 마무리하는 '어워드 날'까지 아들 찰리의 역할은 대단했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를 맡았고 소속한 3곳의 밴드부들의 공연도 했어야 했고 특히 행사 진행 사회를 보다 많은 상을 받으러 마이크를 놓고 수차례 상을 받는 모습에 보는 이들을 종종 웃게 만들었다. 일 년 열심히 보낸 결과로 맞는 마지막 찰리의 학창 시절 바쁜 모습일 거라 생각이 들어 아들의 마지막 고등학교 유니폼 모습, 유난히 빨간색이었던 재킷을 받아보고 놀랬었는데 어느덧 그걸 입고 있는 내 아들이 모습을 잊지 않으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깊게 새기듯 보며 즐거웠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 년의 보낸 학생회장의 단독 스피치는 우렁찬 박수와 함께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특히 많은 부모들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멋진 스피치였었다. 학생들 뒤에서 조력자로 계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나에게 직접 감사함을 표현하는 바람에 나는 관중석에 앉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었다. 모든 과목에서는 최우수상을, 그리고 학교에서 주는 거의 모든 상들과 트로피들을 다 받아 행사에 참석한 전 학년의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놀라움을 사기도 했었다. 행사가 끝나고 쇼핑 카트가 필요할 정도로 상장과 트로피들로 넘쳐났으며 여러 명의 도움을 받아 차로 옮겨 겨우 실을 수 있었다. 여러 대학교에서 장학금과 함께 입학 증서를 미리 보내왔지만 아들이 원했던 대학교의 의대에 합격이 되었고, 의대 지원생이라 모든 장학금에서 제외가 되었지만 그해 대학교 지원 합격자 중 최고 우수성적자로 선정돼 6만 불이라는 대학교 최고 높은 장학금을 받고 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나의 아들 하나 키운 이야기에 결론을 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 같다.

한 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쉽지 않은 역할임 틀림없다. 우리들의 아이는 엄마가 필요하고, 엄마를 보고 배우며,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공립 교육이나 사립 교육, 과외가 아니라 엄마의 바른 행동과 마음이고, 어릴 적부터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며 행동하는 법을 몸에 익혀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의 걸음에 엄마가 맞추어야 한다. 걸음걸이에는 아이들마다 제각기 다른 속도가 나기에 누구와도 비교하지도 말고, 재촉하지도 말고 내 아이가 갖는 속도를 지켜 봐주며 응원과 격려만 필요할 뿐이다.


나의 아들 찰리에게도 항상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아들이 있었기에, 아들과 함께 바르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우리가 함께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얼마나 힘들었고 고생했고 희생했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아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한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그런 적이 없으니까 나는 당당하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하지 않지만 부모는 선택으로 아이를 갖는다. 나의 선택이고 책임이었기에 나는, 아이를 잘 키워야 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전부다, 무조건적으로 퍼주며 키우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엄마가, 내가 해 준 것을 돌려받을 생각도 없다. 나는 엄마로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로서, 아들은 아들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우리가 되어 가족의 일원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있어주며 사는 법을 배우며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서로 돕고 배우며 사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할 것 같다.


나는 아들에게 고맙다. 어릴 적부터 잘 따라와 주어 고맙고 지금은 나보다 큰 사람으로 자라주어서 고맙다.

아들의 행동이나 말씨에 내가 보여 고맙다. 얼마나 열심히 나를 보며 잘 따라와 주며 살아왔는지 아들을 보면 알 수 있어서 그래서 너무 고맙다. 아들과 나는 서로를 밝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가 되어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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