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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Oct 15. 2021

결국 남편을 죽였다.

15개월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생긴 우스갯소리

코로나로 살아있는 사람을 죽였다.



강산도 두 번, 거의 이십 년 동안 혼자 살다 보니 부부였던 남편은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나의 결혼 생활은 타국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24/7’ 연중무휴로 거의 모든 것을 상의하며 함께한 시간이 10년이었다. 한국에서 부부가 대화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을 평균으로 비교한 것을 본 적 있었다. 그것과 비교한다면 나의 10년 결혼 생활은 어쩌면 어떤 부부에게는 최소 몇 배에서 백년해로하며 산 사람들만큼의 시간을 우리는 10년 동안 보내고도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혼자가 되었어도 서운했지만 홀가분함에 휴가 같았고 당분간은 아들에게만 집중하며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착한 병’을 앓고 있다. 나는 항상 나보다 먼저 옆사람, 가족을 돕고 챙기며 화목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분간 혼자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도 힘들고 외로워하지 않고 신경 써야 할 사람이 한 명 줄었기에 편해진 마음이 컸다.


그렇게 여자 혼자 5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남편 없이 사는 것도, 아빠 없이 아들이 살아가는 것에도 전혀 이상하지도 어색한 일도 한 번도 없이 잘 살았다. 그렇게 잘 살다가 아들이 성인이 되어 나는 이혼을 하게 되었고 나의 기억 속에서 남편이라는 단어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잊혔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15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기억 속에서도 잊힌 '신랑, 남편'이라는 단어를 생뚱맞게 자주 듣게 되었다. 한국에서 엄마가 사는 동네는 내가 초등 1학년 때부터 살았던 동네로 엄마가 여전히 살고 계시니 이웃 아주머니들이 오랫동안 호주에 가지 않고 한국에 머물며 노모를 모시고 있는 나를 보고 그들이 호주에 살고 있는 나의 가족을, 특히 나의 남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한국을 방문했었지만 그럴 때는 아들과 함께였고 짧은 기간 방문이었기에 어쩌다 이웃 아주머니를 만나고 돌아서면 두 번 만날 기회도 없이 호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코로나로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15개월 동안 오래 한국에 있다 보니 이런 변수가 생겼다.


‘막내딸이 호주에서 와서 엄마는 좋겠지만 남편은 어떡하냐?’

'남편과 아들 밥은 어떡해?'

'신랑은 밥은 할 줄 아냐?'라는 식의 질문들을 사람들은 인사처럼 물어왔다.


처음에 나는 그들을 잘 모르기에 엄마 옆이나 뒤에 서서 그냥 인사하며 웃어넘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안면이 익혀지고 그분들이 누가 누군지를 구별되기 시작하니 아주머니들도 나의 대답을, 나와의 대화를 직접 시도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나치듯 내뱉는 인사말에, 여행을 나온 사람에게 남편과 아들의 밥을 걱정해주며 말을 걸어오는 엄마의 동네 친구분들과는 유대관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엄마를 따라다닐 때 엄마를 아는 척하는 사람이라면 옆에서 인사드리고 조용히 기다리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엄마의 취미 생활인 동네 목욕탕을 다니면서는 문제가 달라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터줏대감식으로 동네 목욕탕을 장악하는 사람들, 물론 거기서 나의 엄마가 가장 나이가 많고 오랫동안 목욕탕을 정기적으로 다니시는 분이라 모두들 어른으로 깍듯이 대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엄마의 막내딸로 아직 어리게 보며 매번 비슷한 질문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깊게 질문해오기 시작해서 동네 목욕탕 가는 것이 성가셨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소, 수다의 장소이며 취미생활이라 코로나 초기 목욕탕에서의 확진이 나오지 않았을 때까지는 종종 같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웃어넘겼지만 갈 때마다 누군가가 비슷한 질문을, 심지어는 저번에 물었던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다시 물어오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런 인사치레를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답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결국 남편을 죽였다.


나의 길고 긴 이야기를 할만한 장소도 아니었고 들려줄 만큼 나는 그들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 역시 지나치는 인사였지 나에게 진지한 관심이 있지 않다는 것도 알기에 나는 그들이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싱거운 질문을 잠재울 묘책을 생각해 냈다.


어느 날 엄마 따라 동네 목욕탕을 다녀온 후 나는 가족들에게 이제부터 동네 사람들의 질문에 남편을 죽이겠다고 했다. 물론 가족들이 미리 나의 이혼을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나와 남편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면서도 이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족들도 설명할 마땅한 시기를 놓친 것 같았다. 그래서 이혼한 기간이 아니라 혼자된 기간으로 남편을 죽이겠다고 했다. 구차한 추가 설명은 전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십 년 전에 사고로 남편 죽고 아들 혼자 키웠다'라는 간단한 답을 몇 번 했고 효과는 대만족이었다. 소문이 잘 퍼졌는지 인사치레로 물어오던 질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가끔 '아들이 의사고 착하고 여자 친구도 있고 밥해줄 남편도 없으니 네가 제일 편하다.'라는 말을 몇 번 흘려들었을 뿐이었다.


85세의 나의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에 관해 나에게 설명할 때나, 동네 친구분과 만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들어보면 무척 신기한 이야기 방식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끝끝내 그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엄마도, 친구분도 지금 이야기 대상의 이름을 모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진짜 이름만 빼고 그녀의 아이 이름으로 부르거나, 그녀가 했던 장사나 사업 이름으로,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자식들이 어떻고, 어디쯤 어떤 집에 사는 등의 이야기로 그 사람을 설명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듣고 보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 주변 동네 사람들에 대해 나는 '안물 안궁' 안 물어봤고 전혀 궁금하지 않은 정보만 많이 듣고 그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정보만 많았지 그 사람을 직접 설명하고 기억할 수 있는 직접 연결고리는 전혀 없어 그래서 매번 누가 누군지 모르고 이야기는 마구 섞여 들려와 들었는데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신기해하며 다시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옛날식, 나의 엄마 나이 때, 사람들이 상대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방법인 것 같아 신기했지만 나의 기억력에는 도움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아니 솔직히 크게 그들에게 관심이 없고 유대관계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서 15개월 동안 지내면서 원하지 않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의 불필요한 정보를 많이 듣고 알게 되었지만 기억에 남는 사람도 연결되는 사람도 없다. 다음에 한국에 나가면 똑같은 이야기를 또 들어도 몇 사람 빼고는 많은 사람들 구별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그냥 동네 사람들이면, 안면 있는 사람들이면 인사를 하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남편을 확실히 죽임으로써 동네 사람들이 나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인사치레 걱정, 질문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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