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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Oct 31. 2020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두 번째 이야기      40년 넘은 엄마 집 정리해주기

코로나가 이렇게 나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처럼 엄마 집을 쓱 스치듯 다녀갔을 것이다. 외국에 오래 살다 한국을 한 번씩 나오면 우리는, 나는 이방인처럼 외국에선 느낄 수 없는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충족시키려는 데에만 집중했었다.


물론 엄마도 우리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었지만 엄마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한 달 정도면 다시 외국으로 들어가야 하는 딸들, 딸을 생각하며 그냥 그때는 같이 즐기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엄마 집 정리는 감히 코로나 덕이라고 말해본다. 코로나로 일상적인 외출이나 외식은 물론이요 여행을 자제하다 보니 집, 바로 옆에 있는 가족으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그러다 보니 집에서 생활하시며 불편해하시는 엄마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알게 되었다.


이런 기회에 엄마에게 제일 편리하게, 앞으로 몇십 년 더 쓸 수 있게 집을 정리해 드려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집안을 둘러보며 며칠 생각을 하며 계획을 세웠고 일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나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나더라" 라며 좋아하셨고 "혼자 게안겠나? 할 수 있겠나? 일이 엄청날 건데" 하며 걱정을 하셨다.

 호된 신고식


지난 2월 한 달 동안에는 엄마 집 정리로 시간을 다 보냈다. 하루에 한 곳씩 정리했고 한 곳만 정리해도 하루해가 훌쩍 넘어갔다. 그렇게 시작한 핸디 우먼 일은 집 안뿐 아니라 집 밖 옥상 물탱크며 바닥 방수 페인트칠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집전체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엄마는 처음 이사 온 것처럼 새집이 됐다며 좋아하셨다.


이러는 동안 나는 몸살을 앓기도 병원을 찾기도 했었다. 한 달 내내, 지금까지도 물리치료사를 찾아가 전신 마사지를 받고 싶고, 안마사를 찾아가 전신 마사지를 매일 받고 싶다. 하지만 한국에선 특히 부산에선 아직까지 마사지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호주와는 너무 다른 시스템의 물리치료와 한국의 마사지 사업이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강해 놀랐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 청소하고 아프고 하는 한 달을 보내며, 매일 아침 병원으로 출근하며 영상 통화를 걸어오는 아들의 걱정 소리를 매일매일 넉넉히 들었던 한 달이기도 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치른 첫 신고식이었고 자초해서 벌인 힘든 신고식이었음을 고백한다.


"엄마 이제 막내딸도 엄마랑 같이 늙어 가나 벼"


이제 엄마 집은 나의 손길이 빠짐없이 다 들어가 있다. 처음 시작하고는 솔직히 속으로 겁이 났었다. 이상하리 만큼 엄마 집은 정리를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를 벌리면 둘셋 일이 터져 나오며 보테졌었다. 어느 정도 연세가 되시자 힘에 부치시니 그냥 대충 살으신 듯했다. 예전의 엄마의 성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랬었다. 뭘 그리 쌓아두고 지내셨는지 눈앞이 깜깜했었다. 버리는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큰 숙제가 되었었다. 하지만 새로이 집을 사 드릴 수는 없으니 이왕 시작한 거 시간이 걸려도 완벽히 정리해 드려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 오기로 버티며 시작한 일은 끝은 냈지만 내 몸에는 후유증이 많이 찾아왔다. 멍은 달고 살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은 뼈마디들이 너무 아파 병원도 다니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도 아직까지 아프지만 이젠 나이 탓을 해야 할 것 같다. 한번 고장 나면 나아지는 데는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


"엄마의 막내딸도 늙었어. 뼈마디가 다 쑤시고 아프네. 회복이 느려"라는 우리 집 제일 젊은 피인 막내딸 엄살에 엄마가 "고마워 딸" 하시며 활짝 웃으신다.


너를 골동품이라 칭하노니 사라지거라.


40년 이상 살아온 집에 이렇게 많은 골동품들이 쌓여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오래된 물건 중에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딱 하나 있었다. 그 외는 버리면 아깝지만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안방에 떡하니 놓인 자개장이다.

우리 집이 지어지자 제일 먼저 새집에 들어온 것이 안방 자개장이다. 그 당시 유행이었고 엄마가 전적으로 원하셨다. 그래서 미리 주문해서 우리보다 며칠 먼저 자개장이 새집으로 배달되고 안방에 들어왔고 그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겉모습은 여전히 멀쩡하고 여전히 엔틱 해 보이지만 내부 용도는 별로라 쓰임새 있는 걸로 새로 바꿔 드리고 싶었지만 이때까지 아끼며 잘 관리하며 쓰셨기에 너무 멀쩡하고 버리고 싶은 생각이 일도 없는 엄마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움직여 밑바닥 청소를 처음으로 해 드렸다. 40년 넘게 쌓인 먼지가 놀라웠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 동전도 몇 개 줍고 장롱 움직이면 얻어지는 기쁨도 있었다. 그래서 엄마의 자개장은 요즘은 자게장 문짝을 이용해 새로 리폼해서 쓴다며 관심을 보이는 큰언니에게 맡기기로 했다.


도자기와 그릇들이다.

집안에 전시를 하다 못해 창고에서도 먼지를 쌓는 도자기들과 그릇들 수두룩 했다. 딸들이 시집가면 하나씩 주려고 사다 모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딸들이 결혼해 다들 외국에서 사니 들고 가는 사람 하나 없고 엄마 집에서 먼지만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몇몇 도자기들은 옥상에서 화분에 물 줄 때도 쳐다볼 수 있게 장식도 하고,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을 아낌없이 한 세트씩 꺼내 쓰고 깨지면 버리기로 하며 사용하기로 했고, 주변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며 정리했다.


수석, 그림, 병풍, 박제들 표구상을 할 정도의 양이다.

아버지가 모으신 많은 동양화와 서예 작품들, 많은 동물 그림들, 큰 바닷가재 박제 및 여러 표구들 등등 너무 많아 집안에 장식된 것들 말고도 먼지를 쌓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아는 나의 엄마는 잘 버리시는 타입이긴 했었고 아버지는 전혀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셨다. 내가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첫해 6개월 후에 내려오니 내방 피아노 위에 놓여있던 많은 인형 컬렉션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인형들이 먼지를 너무 많이 내는 것 같아 버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호주로 떠나기 전 옥상 창고에 나의 대학 졸업 작품과 나의 미술 작품들을 보관해 두고 왔고 3년 뒤 한국을 첫 방문 했을 때 보니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내 기억 속에 엄마는 정리하며 잘 버리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엄마는 아빠를 많이 닮으신 듯했다.

하지만 엄마도 아버지의 유품인 듯한 것들은 선뜻 버리시지는 못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고심하며 해결 책을 찾았다. 몇몇 맘에 드는 것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전부 우리 동네에 중고나 골동품 파는 가게에 기증을 했다. 직접 가벼운 몇 가지를 가지고 가서 혹시나 이런 것들을 그냥 드릴 테니 가지실지 물어보니 흔쾌히 수락하시며 감사해하셨고 그 후 연락만 드리면 직접 집으로 오셔서 가져가시니 편안했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에 예술적 가치에 대해선 전혀 모르셨던 분이셨다. 그냥 선물을 주니 좋다고 하니 받으셨고 모으셨던 것 같았다. 직접 돈을 주고 구입하신 건 몇 점 없었다. 그래서 직접 구매하신 것만 빼고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최소 한 사람에게라도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일이라 나를 그리고 엄마를 설득했다.



옛 기기들도 많았다.

아주 묵직하고 큼직한 소니 카세트 라디오, 비디오카메라, 카메라 등등 모양도 투박하지만 여전히 작동이 되는 하지만 마니아들이 아니면 너무 불편해할 것들이, 연식이 오래된 기계들도 많았다. 우리 집이 길가 4층 빌딩이라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버스 정류소 앞이라  일층 현관문 앞에 '작동됩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아침에 잠시 실험 삼아 놓아두니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것들이 사라졌다. 누군가는 가치를 알아보고 가져갔으면 좋고, 고물 모으시는 할아버지가 가져가셨어도 도움이 되겠지 싶었다.


이렇게 골동품처럼 우리가 쓰지 않은 것들은 버리고 주변에 나눠주며 정리를 했고 엄마의 집은 공간들이 넓어졌다. 정리는 우선 버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희선아~ 희선아~"


엄마는 집 정리 후 몇 달 동안이나 계속 "우리 집 새집 같아졌다"며 좋아하셨다. 그런데 엄마에게도 후유증이 생겼다. "희선아, 이건 어딨노?" '희선아" "희선아" 하시며 부산 사투리로 불러오는 내 이름이 곧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몇십 번씩 나의 이름이 불러졌고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


처음엔 많이 바뀌고 새로이 정리가 되었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고, 요즘은 모든 것에서 날 찾으시는 엄마에게 '가끔 나 없을 땐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하는 생각에 웃음도 애잔함도 함께 나온다. 엄마는 강한 척하시지만 무척 외로우셨던 것 같다. 자식을 다섯이나 두었어도 달랑 한 명만 한국에 살고 네 명은 다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 동생을 여전히 돌보며 살고 계시니 당신도 이름만 부르면 척척해 주는 이런 딸이, 엄마를 위해 해주는 이런 돌봄이 많이 고팠을 거라는 짐작이 되어 마음이 짠하다.


그래서 엄마가 부르시면 언제든 자동반사적으로 대답하고 달려간다. 다양한 이유로 부르시는 엄마의 요청은 함께 하고 싶은 딸의 관심이 고프신 것이었다.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그럴 때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하고 질문을 내게 해왔다면 나는 아직은 호주에 살 것 같다고 대답했을 거다. 84세 엄마를 배제하면 나는 한국이 여전히 어색하다. 착한 딸 노릇만 많이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한국에 온 9개월 동안 친구를 한 명도 만나지 않고 전화 통화로 안부를 전하며 엄마 곁에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젠 나를 찾기로 했는데 지금은 노모의 딸 비중이 너무 커져 있기 때문에 나는 호주에 사는 아들의 걱정 소리도 함께 들으며 항상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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