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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Nov 17. 2020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한국 의사는 less 친절하고 not enough 설명한다

2020년 한국 여름은 코로나에, 장마와 태풍으로 힘든 사람들을 더욱더 아프게 할퀴고 지나간 얄미운 여름이었다. 엄마에게도 이번 여름엔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 한국 여름은 놓친 것 같고, 여름옷 한번 제대로 꺼내 입어볼 시간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차를 타고 많이 다닌 것이, 아니면 봄나물 채취하며 산과 들로 다닌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일요일 이른 새벽 잠결에 "희선아, 희선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고,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엄마 방으로 달려갔다.


달려가서 보니 엄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침대 옆을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계셨다. 일어나셨다가 갑자스런 통증으로 옴짝 달싹을 못하게 되어 나를 급하게 불렀다고 했다. 엄마는 나의 도움으로 몇 발짝 움직여 침대 위에 누울 수 있었으나 엄청난 강도의 통증으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혔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달려왔지만 엄마의 증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를 묻고 통증이 제일 심한 부위를 만져 달라는 엄마의 요구에 손으로 만져 드리며 지금 통증의 숫자를 1-10까지 있다면 얼마인지 물어보니 지금의 통증은 10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픈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지 물어보던 중 호주에서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가 새벽 4시 반이었다.


매일 아침 병원으로 출근하며 아들은 항상 전화를 걸어왔기에 오늘은 자연스럽게 할머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들은 내가 설명한 상황으로 봐서는 할머니 증세는 허리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을 해 왔다. 일단 통증이 심하니 집에 있는 진통제를 하나 먹고 바로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할머니와 영상 통화할 수 있게 전화기를 놔두고 진통제를 찾았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빠르게 준비해서 엄마에게 가져다 드렸다. 통증은 엉덩이와 허벅지지만 분명 허리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며 손자는 할머니에게 허리가 아파 병원을 다닌 적이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왔다. 당신이 좋아하는 손자라 아픔을 참으시며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하시는 엄마는 허리에 협착 증세가 있었지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며칠 맞으면 괜찮아지곤 했었다는 말을 했다. 아들은 이번엔 한의원 안된다는 말과 일단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아들과 통화를 마치고 바로 큰언니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그 길로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병원 선택은 주어지진 않았지만 일요일에 유일하게 문을 여는 종합병원으로 갔고 엑스레이며 엠알아이를 다 찍고 의사를 만나 볼 수 있었다.


척추 협착증


척추 협착증, 아래 척주 4번 5번에 생긴 척추 협착증이 신경관을 막고 있었다. 심각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날은 강한 주사부터 시작을 해 보자고 했다. 강력 진통제 주사와 링거까지 맞고 집으로 올 때는 통증이 사라져 편안해하시는 엄마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엄마는 통증으로 다시 힘들어했고 나는 엄마의 통증 부위를 문지르고 또 문질러 드렸다.


망설일 여유 없이 수술 결정


다음날 월요일, 우리는 아는 분이 계시는 정형외과를 찾았고 거기서 엑스레이를 다시 찍고 우선 신경치료를 먼저 받아보자 해서 그렇게 했다. 이건 어제의 진통제 주사와는 달리 신경치료는 허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곳에 직접 통증 완화제를 투여시키는 시술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몇 달 정도 괜찮아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며 엄마는 수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시며 주사를 맞았다. 이번에도 통증이 사라진 엄마와 우리는 집으로 왔다. 어제의 경험으로 제발 이 시술은 효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이것 또한 4시간 정도 효과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새 엄마는 통증과 싸우셨고 나는 엄마의 아픈 부위를 만져 드리고 돌봐드리느라 뜬눈으로 지새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병원에서 받아온 진통제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3시간 정도는 통증을 10에서 7-8 정도로 낮춰 주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통제를 6번 먹어야 했다. 엄마에게 진통제를 드리기 위해  6번의 간편 식사를 준비해 드렸고 약 효과가 퍼지기 전까지 통증 부위와 씨름하며 그날을 겨우 보내고 우리는 다음날 새벽같이 병원을 다시 찾았고 우리는 그날로 바로 엄마의 입원 수속을 했다.


엄마는 허리 수술은 웬만하면 받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주변에서 허리 수술을 받으신 분들의 경우가 크게 좋지 않았기에 엄마도 허리 수술은 최악의 상태가 아니면 하시지 않으시겠다고 그전까지는 강건한 태도를 보이셨지만 이번에 엄마가 느끼신 통증은 수술을 받을까 말까 하는 생각할  여유조차도 주지 않은 최고치의 통증 수준이었기에 수술에 바로 동의하셨다.


아픈 사람 참 많다'


호주든, 한국이든 병원만 가면 느껴지는 생각이다. 병원 안은 많은 환자들로 북적였다. 거기에 우리는 예약 손님이 아니었고 갑자기 입원부터 수술까지 끼어드는, 새치기 환자였기에 그때 딱 두 개 남아있던 병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6인과 2인실 중에 선택이 주어졌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인실로 들어갔다.


입원 수속을 하고도 바로 입원실로 올라가지 못했다. 무슨 검사를 이렇게 많이 하라고 하는지 당장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을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고 보호자인 내가 휠체어에 환자를 태우고 이리저리 검사 장소를 찾아다녀야 했었다. 검사 때문에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엄마는 지치셨고 너무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우리는 검사를 멈추고 바로 입원실을 찾아갔다. 우선은 잠시 쉬게 해 드리는 것이 좋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2인실 입원실은 텅 비어 있었고 엄마는 다행히 누울 수 있었지만 입원을 한 상태인지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병원에서는 그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되는 통증으로 엄마는 아파하셨고 나의 손바닥 지문들은 반들반들해져 갔고 손목까지 아파왔다.

 

모성애


언니는 집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기에 언니가 집으로 가서 엄마와 나의 병원생활을 위한 짐들을 챙겨 오기로 했다. 엄마와 단둘이 병실에 남아 있으면서 그때까지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병원이 원망스러웠고 아픔에 신음하는 엄마를 만져 드리며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런 마음은 아들을 하나 키우면서 아들이 아플 때마다 들었던 모성애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연세 많으신 엄마가 아파도 그런 마음이 내게 들었다. 아들에게 들었던 엄마의 마음인 줄 알았었는데 나의 엄마에게도 이런 마음이 들어 신기했다. 이건 모성애가 아니라 효심이라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효심은 뭔가 더 크게 보이는데 이 마음은 그에 비해선 작은 것 같았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엄마의 엉덩이를 만져 드리며 나의 머릿속은 잠시 나의 마음과 딱 맞는 단어 찾기에 생각이 깊어졌다.



한국 의사들은 Less 친절하고 not enough 설명한다.

 

엄마 때문에 병원에 20일 정도 있으면서 나는 '한국식은 이런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호주식에 길들여져 있나?' 하는 반성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 방문 전까지 호주에서 큰 병원의 신세를 몇 번 졌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국에서 처음 보는 수술 병원인 이병원과 자주 나의 경험들이 비교가 되었다.


호주에서 나를 담당한 의사는 자상했고 충분한 설명과 함께 나의 질문도 열심히 듣고 성실히 대답해 주며 환자인 내가 완벽히 이해하도록 신경 써 주었다. 그런 후에 아들이 조금 늦게 찾아왔을 때에도 다시 한번, 환자 가족이기에 시간을 아깝다 생각하지 않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 것에 익숙하다 보니 한국 의사들이 덜 친절하고 충분히 설명을 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반성해 보았다.


그리고 한국 의사들은 얼굴에 너무 분명하게 '나 바쁨'이라고 써서 붙이고 다니는 것 같은 표정들을 다들 짓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진찰실에서도, 입원 환자를 만나러 회진을 돌면서도 의사는 병실에 몸이 들어오면서 이미 마음은 뒤로 돌아 문밖을 나가고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의사는 한마디 질문과 함께 환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대화는 이미 종결이 되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질문은 꿈도 꾸기 힘들 정도였고 바쁜 사람에게 미안해서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매일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간호사에게 자세히 물어보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수술 담당 의사분이 우리에게는 웃으시며 친절하게 대하신 거라고 다들 그랬다. 다른 환자들에게는 호통과 야단도 치는 무서운 의사라고 소문나 있다며 이 병원에서만 일하시는 간병인을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이 그러셨고 심지어 간호사까지도 동의했다. 친절한 정도가 이 정도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날 담당하는 호주 의사나 내 아들을 만나 진찰과 수술을 받게 되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지며 웃음이 나왔다.


수술하는 날


전날 저녁을 끝으로 금식에 들어갔는데 수술 시간이 연기되면서 20시간 이상 어쩔 수 없이 금식을 하게 되셨다. 정시에, 정량으로 식사를 하시는 분이신데, 노인들은 밥심에 산다 하셨는데, 이런 분인 우리 엄마에게 20시간의 금식은 너무 가혹했다. 또한 하반신 마취로 진행되는 수술이라 걱정을 많이 하셨다. 당신은 차라리 잠을 자고 깨어나면 수술이 끝나 있기를 원하셨다.


거의 하루 종일 기다리고 기다리다 드디어 수술실로 내려가게 되었고 침대로 수술실 환자를 데리러 오신 분과 같이 침대 이동을 도우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서 엄마를 내려다보니 엄마는 이미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감고 계셨다. 평소에는 진짜 겁이 전혀 없는 분이라 이런 약한 모습을 보니 그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를 안심시켜 드려야 했는데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약해져 있는 엄마 앞에서 나는 강하게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수술실 앞에서 문이 열리길 잠시 기다리며 나는 말을 했다. "엄마 수술실 옆에 소파  보셨죠. 저 거기서 꼼작하지 않고 기다릴게요. 가벼운 수술이라 전혀 문제없데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요. 참! 수술 담당의사 만나면 잠을 조금 재워 줄 수 있는지, 아니 조금 재워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엄마를 수술실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나는 밖에서 다시 한번 "잊지 마시고 조금 재워 달라고 부탁 꼭 하세요. 엄마, 기다릴게요"





엄마에게 약속한 데로 수술실 옆 소파에 앉았다. 나는 직접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 봤지만, 누구를 들여보내고 기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누군가가 나의 엄마였기에 그것도 하얗게 질려있던 엄마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며 나의 불안감을 상승되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울어버리는 것이 불안감을 떨칠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이어폰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잠시 생각을 다스렸다. 한번 터져버린 울컥거림을 쉽게 잡을 수 없었고 눈물이 자꾸 흘렀지만 다행히 그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소란스러웠기에 그 누구의 이목도 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키던 중 호주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친절하게도 엄마의 수술 시간을 기억하고 수술이 다 잘 되었는지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수술이 딜레이 되었다는 말을 하며 친구와 속삭였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도 정리가 되었고 친구의 위로도 도움이 많이 되어 차츰 안정을 찾았다. 수술 끝날 때까지 같이 있어주겠다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통화를 마치고 나는 수술 현황판을 계속 체크하며 엄마의 수술 동선을 짐작했다.


3시간 정도 거기서 그대로 앉아 기다리자 엄마를 실은 침대가 나왔고 나는 이동을 도우며 병실로 올라갔다. 병실로 오는 도중 엄마는 '춥다'라는 말 한마디를 하시며 무사하심을 알려왔고 병실로 들아오는 길에 나는 담요를 하나 더 받아 들고 입원실로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엄마는 입원실에 들어오자 조금 후 저체온 쇼크를 일으키셨다. 엄마의 몸 전체가 사시나무 흔들리듯 떨리기 시작했고 뜨거운 핫팩 시트가 몸 위로 덮여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듯 춥다는 짧은 말 한마디 내뱉으시고는 몸 전체를 심하게 덜덜 떠셨다. 엄마가 덮고 있던 핫팩 시트와 이불과 담요 그리고 담요 두장을 더 추가해서 엄마를 꽁꽁 싸맸다. 찬 공기가 전혀 세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몸 밑으로 담요들을 꼼꼼히 집어넣었고 그 속에 손을 넣어 엄마 손을 잡고 옆에 앉아서 계속 엄마의 몸의 온도를, 손이 따뜻해짐을 체크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엄마의 몸 떨림이 차츰 멈추었고 스르르 잠에 빠지셨다.


저체온 환자를, 몸을 저렇게 심하게 떠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심하게 덜덜 몸을 떨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본 상태라 너무 걱정스러웠다. 한바탕 벌어진 이 소동에 너무 놀래서 간이 반으로 쪼그라든 느낌이 들었고 엄마의 체온이 돌아오며 스르르 잠이 들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20일간의 입원 생활


엄마는 7년 전 양쪽 무릎 수술 때 경험으로 병원 생활이 정말 싫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병원밥을 극도로 싫어하시고 당신이 음식을 잘 만드시니 더욱 까다로우신 것 같았다. 그래서 언니에게 밑반찬을 집에서 가져와 달라 부탁했고 병원에서 같이 지낸 나는 점심과 저녁은 병원 근처에서 그때그때 사서 엄마에게 드렸다. 야채와 해조류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시니 혹시나 변비로 고생하실까 싶어 엄마의 식생활 습관을 그대로 해 드리려고 노력 많이 했었다. 아침 일어나면 사과와 토마토 2-3개를 썰어 드렸고 아침은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과 병원 반찬으로 적당히 같이 드셨고 점심과 저녁은 드시고 싶은 걸 사다 드렸다. 몸이 아픈 엄마에게 병원식을 참고 드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집에서 처럼 엄마가 드실 수 있도록, 더 잘 드실 수 있도록 노력했다. 엄마는 이렇게 병원 생활을 하니 처음으로 입원생활이 재미있고 즐거웠다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퇴원을 하며 3킬로가 쪘고 나는 3킬로가 빠져 집으로 왔다.


이쁜 막내딸


엄마는 허리 수술을 받은 후 4일째부터는 많이 앉아 있고 틈틈이 걸어야 했다. 엄마가 걸어 다니시며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시기 시작하자 옆 동 사람들은 나를 지켜보며 이쁜 막내딸로 부르기 시작했다. '저런 딸 없다 한다' '간병인 붙이지 직접 엄마 간호한다고 나서는 딸 드물다' 사람들이 엄마에게 한 말이라고 하셨다. 이번엔 엄마가 운이 좋으셨다. 때마침 내가 한국에 있었기에 내가 엄마를 돌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던 엄마의 입원으로 20일 병간호하게 되었고 그래서 덕분에 한국 병원에서 20일 살아보는 경험을 해 보았다. 간호사들과 사이도 좋았고, 청소해주시는 분과도 좋았고, 오고 가며 환자분들 식판도 들어다 주며 봉사도 했고, 옆 병상에서 자녀들이 바빠 혼자 들어와 아파하시던 분도 잘 챙겨 드렸고, 엄마도 불편하지 않게 잘 모셨고 모든 것이 좋았던 경험이었다. 단지 불편했던 것은 잠자리였다. 자주 들락거리는 간호사들에 의해 숙면은 거의 힘들었고 간이침대는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이쁜 막내딸이라는 호칭을 하나 받았으니 나쁘진 않았다.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엄마의 허리 수술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가 날벼락 맞듯 갑자기 찾아왔지만 천만다행으로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렸다. 수술도 잘 되었고, 수술과 입원생활로 엄마는 입원에 대한 좋은 추억을 하나 만드셨고, 엄마의 기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계시는 중이다. 엄마가 이렇게 의도치 않았던 허리 수술을 하실 때 마침 내가 한국에 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살펴 드릴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이러는 동안 나는 나에게 질문을 여러 번, 수시로 던져 봤다. 호주와 한국을 너무 많이 비교하게 되었고, 그러며 나 자신을 반성도 해보며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를 질문을 해 보며 생각을 해 보았다.


아직까지 나는 호주에, 호주가 너무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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