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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Nov 07. 2020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

엄마의 목욕탕 사랑


우리 동네에는 내가 어릴 적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다닌 목욕탕이 있다. 동네 목욕탕을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45년 정도 이용하고 계신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와서 우리는 그 당시에 단 하나뿐인 동네 목욕탕이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다니기 시작했고 그 후로 동네가 커지면서 몇 개의 목욕탕들이 더 생겨 났어도 엄마는 한결같이 이 목욕탕만 고집하셨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었다. 주말마다 가는 목욕탕도 모두가 함께 갔었기에 우리를 보고 한 분대가 온다며 목욕탕 주인 분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우리가 들어가면 텅 비어 있던 목욕탕도 갑자기 북적거리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딸 부잣집으로 소문났었다.


신고식


지금도 우리 형제들과 나는 한국을 오면 자주 이용하게 되는 장소 중 하나가 우리 동네 목욕탕이다. 한국에 도착하면 하루나 이틀 쉬고 동네 목욕탕을 간다. 거기서 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나 호주에서 왔다는 신고식을 정신없이 치르곤 한다.

"형님 오셨어예? 딸 왔네예."

"막내딸 호주에서 왔다."

"형님 호주 딸 왔네. 호주 딸 언제 왔어예?"

"어제 왔다 아이가, 오늘 내가 세신 받으며 마사지 좀 받으라고 델고 안왔나"

"호주 딸이 왔네요. 언제 왔어예?"

"형님 막내딸 와서 좋겠네. 다른 딸들은 이번에 안 온답니까?"


부산 사투리로 오고 가는 비슷한 질문들과 대답들은 탈의실과 욕탕을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이런 질문들로 정신없이 치러지는 신고식은 목욕탕 다니기 시작하고 이삼 주 정도까지 이어진다. '막내 호주 딸이 부산에 왔음, 한국에 왔음'을 동네 사람들에게서 널리 알리는 것 같다. 이렇게 신고식이 끝이 나면 다행히도 나에게로 집중되었던 질문들은 사라지고 일상적인 안부인사로 돌아간다. 


이렇게 목욕탕에서 자주 시끌벅적 해지는 이유는 엄마가 이 동네에서 오래 살며 40년 넘게 한 목욕탕만을 이용하며 만들어온 인맥들이기 때문이었다. 예전 목욕탕 안주인이 살아 계실 때에는 안주인 중심으로 목욕탕 친목계도 했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목욕탕 회원들끼리 봄과 가을 최소 두 차례 이상 버스를 대절해서 한국 방방곡곡을 함께 여행도 다니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끼리, 목욕탕 단골손님들끼리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된 것이었다.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 = 카페


우리 동네 목욕탕은 꼭 몸을 씻으러 오는 사람들보다는 친목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나 같은 경우 호주에서 한국을 방문하면 신고식과 함께 음료수들이 마구 들어온다. 어떤 때에는 목욕 중간에 한두병 마시고 남아 몇 병씩은 집으로 챙겨 와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줌마들이 숨길 것 하나 없는 태초의 몸으로 음료수를 서로 주고받고 마시며 서로의 정을, 관심을 표현하는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이라 가끔은 카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몇 주 지나면 한꺼번에 많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한 두 개씩의 음료를 얻어 마시게 되고, 나도 음료를 사서 엄마가 아시는 분들에게 자주 돌리고 있다. 받은 만큼 그리고 엄마를 두고 떠나야 하는 딸의 마음이라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 카페의 방식을 잘 따르고 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 = 마사지 숖


탈의실에 들어가면서 처음에는 종종 웃음이 터져 나올 때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여섯 명이 일제히 쳐다보는데 눈동자들만 반짝이며 인사를 건네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태어난 모습 그대로, 얼굴은 짙은 마스크팩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처음에는 너무 놀랬고 그다음엔 그것이 뭔지 알고서는 웃음이 빵 터져 나왔었다.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봐도 앞에서 웃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혼자 실실 댄다. 그들을 보면서 강시, 달걀귀신, 마스크 영화 주인공 짐 케리, 흑인, 달걀노른자가 떠올랐고 그 생각은 그 아주머니들과 연관시키게 되어 닮은 듯해서 혼자 웃게 된다. 각자 만들어 온 팩에서부터 새로 산 것들을 이들은 서로 써보라고 주거니 받거니 하신다. 이제는 모든 어른들이 먹는 것보다 얼굴에 양보를, 외모에 투자를 많이 하시는 듯했다. 지금도 여전하고 나는 더 이상 웃지 않을 만큼 그들 얼굴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또한 나도 그들처럼 엄마가 직접 만들어 들고 오는 팩을, 또는 그분들이 한번 써보라고 주시는 팩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지 난 아직까지는 욕탕 안 내 자리 거울 앞에서 바르고 씻어낸다. 엄마가 아무리 꼬셔도 나는 밖에서는 절대 바르고 앉아 있지는 못하겠다. 그렇게 하려면, 태어난 모습 그대로 그렇게 앉아 수다를 떨 정도면 아무래도 좀 더 연식이 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들 생얼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


나를 알아보고 여러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 것 같다. 지금도 솔직히 신체조건이나 머리 모양이 같은 분들 여럿 계셔서 혼란스럽기도 하다. 엄마가 아무리 '누구는 누구고' 하며 설명을 하시면서 사소한 개인사까지 이야기를 해 주시지만 열심히 듣는 것뿐이다. 그래서 다들 엄마에게 잘하시는 분들이라 혹시나 인사 안 하는 호주 딸로 오해받을까 싶어서 나는 동네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바로 소리 내어 인사한다. 그리고 욕탕 안에서도 집중되는 시선들, 마주치는 시선들에게는 모두 꾸벅꾸벅 목 인사를 한다. 그러다 몇 번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인지 물으셨다.

"아는 사람이가?"

"아니요. 눈이 마주쳐서 인사했는데 엄마 아시는 분 아니세요?" 

"아니. 난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인사를 많이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으신다. 내가 아무에게나 인사하는 걸 아셨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신기한 동네 목욕탕 = 사교장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네 목욕탕을 이용하는 단골들에 대해서 아주 많이 아시는 듯했다. 어떨 땐 아주 세세한 가족사까지 알고 계셔서 놀라기도 하지만 우리 동네 목욕탕은 나의 엄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교 장소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노인정은 늙은이들 많다고 다니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16살 어린 장애 동생을 돌보며 생활하시고, 딸들이 많아도 지금은 단 한 명만 한국에 살지 3명은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 이 동네 목욕탕은 몸을 씻는다는 단순 목적 이상으로 나의 엄마에게는 유일하게 이웃사촌들을 만나고 사귀며 소통하게 만드는 장소, 사교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고온탕, 쑥탕


이 목욕탕에는 처음부터 3개의 탕이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다. 하나는 평범한 뜨거운 탕, 마른 쑥을 가득 담은 자루로 인해 시꺼먼 색의 고온 쑥탕 그리고 차가운 탕이다. 처음부터 엄마는 항상 고온탕인 쑥탕을 이용하셨고 엄마가 들어가서 뜨거운 물을 더 틀어서 정말 뜨겁게 하셨다. 어릴 적 나는 그 쑥탕을 들어가면서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엄마는 유난히 나에게 강요를 많이 하신 것 같다. 우리가 모두 목욕탕에 들어가면 젤 어린 나에게 엄마는 꼭 엄마가 들어가는 쑥탕으로 오라고, 가자고 하셨다. 나도 언니들처럼 보통탕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막내라 그랬는지,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엄마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해 나는 살을 델 것 같은 뜨거움을 참으며 최소 한 번은 엄마 말을 따라 쑥탕에 들어갔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들어가는 쑥탕에는 더 이상 쑥은 없고 물리치료 주파가 나오는 걸로 대처가 되었고 고온탕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해 동동 거리지는 않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뜨거움에도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뜨거운 물에 전전긍긍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옛날식 유머가 하나 생각이 난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간 아빠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아~시원하다." 했고 옆에선 어린 아들은 의심을 하며 재차 뜨겁지 않냐고 물었지만 아빠의 대답은 시원하다였다. 그래서 어린 아들은 뜨거운 물에 들어갔고 그제야 아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믿을 놈 하나 없다" 어릴적 내 심정을 너무 잘 이야기해주는 유머였기에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지금 나는


지금 나는, 엄마에게 이상하고 신기한 우리 동네 목욕탕이 그대로 오래오래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비록 목욕탕 내부 시설들을 최신형으로 바꾸지 않아도 나의 엄마가 꾸준히 다닐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가 없을 때에도 적적함을 달래려 자주 목욕탕 다니시며 친구분들도 만나시고 멀리 떨어져 사는 딸들 생각에 외롭지 않으시길 빌어 본다. 멀리 떨어진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의 힘을 믿어 본다. 그래서 지금도 엄마가 언제든지 목욕탕 가자고, 가신다 하면 바로 따라나선다. 


그러며 엄마를 지켜본다. 곧 내가 호주로 가고 없을 때의 엄마의 모습을, 이렇게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시는, 웃고 있는 활기찬 모습들을, 맛있는 음식을 싸 들고 가서 친구분들에게 나눠주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행이다 싶다. 혼자 쓸쓸히 지내지 않으시고 이렇게 힘차게 사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잠시나마 안심해 본다. 


엄마도, 목욕탕도 오래오래 잘 견뎌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 본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한번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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