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우연히
호주 초등 공립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영어 캠프 코오디네이터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 후나는 9년 정도 학교 영어 캠프 일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학교장이었던 미스터 플랜트 교장선생님은 차가운 면이 강했기에 교사들도 어려운 상사로 멀리했기에 나도 될 수 있으면 멀찍이 거리를 둔 입장이었다가 캠프로 서로 자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교장선생님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음에 반성하게 되었다.
첫 번째 영어 캠프 시작은 미스터 플랜트에게도,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첫 번째 영어 캠프 지원국가가 한국이라, 한국과의 소통이 잘 되는 사람으로 내가 선두에 나서야 했고 교장선생님은 자발적으로 뒤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셨다.
첫 번째 시작한 캠프는 한국 방학기간 동안에 오는 것으로 12월 중순쯤으로 잡혔다. 그때는 여기서도 방학중이라 학교를 오픈하기 위해서는 보관 회사와도 협조가 되어야 하는 복잡함이 첫 번째 문제로 드러났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많은 문제점이 생겨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가 숙제가 되었다. 특히 이런 쪽으로 경험이 전혀 없으셔 방법을 제시 못하시는 나이가 많으신 미스터 플랜트의 걱정 또한 대단했었다. 특히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일 년 동안 일을 마친 교사들이 휴가를, 그것도 가장 길고 중요한 크리스마스가 휴가를 포기하면서 캠프 교사로 지원할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걱정을 평소 친한 선생의 협조로 바로 해결을 했고, 그 후부터는 수업 담당할 선생의 결정은 일 년 전부터 미리 예약이 되어 걱정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었다.
주어진 기회에 노력을 심다
나는 3-4주 영어 캠프 프로그램부터 만들기 시작했었다. 초등학교 정부 지침 교육과정을 적극 이용해서 비록 단기간이지만 영어를 충실해 배우고 느끼고 갈 수 있는 알찬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호주로 영어 캠프를 오는 아이들이 캠프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호주를 알고 기억하길 바라며 캠프 영어 수업 주제는 호주로 정했다. 호주에 관한 다양한 교육 내용을 놓고 담당선생들과 수차례 회의를 하며 수업 내용과 방식을 함께 의논했었다. 특히 한국 아이들, 영어를 알고 모름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수업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회의를 했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캠프를 행사할 때마다 선생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 되었었다. 캠프를 맡았던 영어 선생들은 내가 캠프를 맡을 때에는 학교장보다 엄하다는 농담 반 진담의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오후 야외 활동으로는 호주만의 특색, 골드코스트의 장점을 적극 이용하려 했었고, 서핑 레슨, 카야킹 레슨, 호주 관공서 방문과 주변 환경인 바다, 강, 산 등을 적극 활용하며 도입했었다. 모든 야외 활동은 나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에게 먼저 시켜보고 교육적이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적극 사용했다.
캠프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나의 아들은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 그리고 홈스테이를 맡은 그 집 자녀들을 적극 끌어들이며 호주 방학기간 동안 운영되는 한국 아이들을 위한 영어 캠프였지만 호주 아이들도, 한국 아이들도 함께 배우고 즐길 수 있는 방학 캠프로 만들었다. 그리고 홈스테이를 맡은 학교 학부형들과 학교 교사들까지도 캠프 야외 활동이나 수업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큰 장벽 없이 첫 번째 영어 캠프를 준비, 진행할 수 있었고 그 후 학교는 일 년에 두세 번 영어 캠프를 진행했었고 우리는, 나는 캠프를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컴플레인도 받아 본 적 없이 진행이 잘 되었다.
첫 번째 영어 캠프를 진행한 후 교장 선생님은 영어캠프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나에게 맡기시고 신임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9년 동안 영어 캠프를 할 수 있었고 나의 건강상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서 캠프도 중단되었다.
약간의 유명세
나의 영어캠프 프로그램 및 진행 방식 등이 영어 캠프를 준비하시는 한국 교민 몇 분에게 알려져, 나만의 프로그램을 알려 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가끔 더 적극적인 사람은 우리 학교에서 캠프를 우선 진행하면서 나의 노하우를, 캠프 일정 및 행사 치러내는 모든 것을 배워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유학원이나 전문적으로 영어캠프를 진행하는 사립학교나 개인 사람들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에 작게 입소문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나는 영어 캠프를 오는 아이들의 나이 또래인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는 장점이었고, 호주 학교에서 일을 하며 교육 커리큘럼을 잘 알고 있다는 장점과 현지 학교의 교사와 학부형들 그리고 학생들의 협조를 적극 받았다는 것과 모든 액티비티나 주말 행사는 나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에게 먼저 시켜보고 검증한 뒤 넣었다는 점들을 들 수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캠프를 가족적인 분위기로 포근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었기에 크고 비싼 유학원이나 사립학교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함으로 차이가 났었던 것 같다.
우리는 광고를 하거나 떠들썩하게 소문내지고 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캠프를 시작하며 나는 퀸스랜드 교육청에 중간 입장으로 초대를 받아 몇 번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캠프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 학교는, 나는 해결 못할 일도 없었고 단 한 번의 컴플레인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9년 동안 수차례 캠프를 진행했었고 모든 캠프는 백 프로 이상의 만족도와 보살핌을 받았다는 감사의 편지와 말을 전해 들으며 마무리를 했었다.
한국 아이들
나는 영어 캠프를 진행하면서 한국 아이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연령별은 5-14세까지 아이들이었고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몇백 명을 캠프를 통해 만나 본 것 같고 10주씩 오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더 많은 한국 아이들을 만나 본 것 같다. 이제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호주를, 나를 거쳐간 아이들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고 궁금해지는 몇몇의 한국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그 어린아이들은 지금 이십 대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아들이 이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
그 아이들도 나를 기억할까? Sonia 선생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