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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Nov 13. 2020

Sonia 선생님 이야기

왜?


이아이가 제일 먼저 떠올랐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쩔 수 없이 약한 인간임을 나 스스로가 고백하는 것 같다. 9년 동안 영어 캠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캠프였고 그때 한 아이를 나조차 거의 포기하고 호주 도착해서 오직 며칠 만에 한국으로 돌려보내질 뻔한 남자아이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우연히


한국의 한 신문사와 연결되어 4주 영어 캠프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신문사에서는 학생을 전국에서 모집하고 인솔자도 모집해서, 그들은 공항에서 처음 만나 같이 비행기 타고 호주로 왔음을 인솔자를 통해 듣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신문사를 통해서 온 캠프팀은 호주에 도착한 날, 공항에서부터 다른 팀들과는 다른 어수선함이 보였었다.


이 팀은 캠프 4주 동안 사건사고가 끝이질 않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심지어 인솔자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돌아가버려 끝까지 실망스러웠던 팀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첫 만남


한국 비행장에서 20명의 아이들과 처음 만나 인솔해서 호주로 오게 된 인솔자는 아이들 통제 능력이 전혀 없었다. 스물두세 살이라는 나이에 공항에서 20명의 아이들을 처음 만나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왔으니 힘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됐다. 오는 동안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고, 도착했으니 이제부터 아이들은 내가 알아서 맡으면 되니 상관없었다.


나는 브리즈번 공항에서 골드코스트로 내려오는 1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아이들 신상 정보를 손에 들고 이름과 얼굴을 익히며 인사하고 몇 가지를 설명했다. 호주에서 영어가 서툴러도 통하는 마법의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것이 ' Please와 Thank you'라는 단어이며 어떨 때 사용하고, 거의 항상 사용하면 좋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매너, 한국과 호주에서 다른 점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이들에게 질문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하며 빠르게 소통하며 아이들의 눈빛과 행동, 말투로 성격을 파악했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성격으로 미리 임시로 정해 두었던 홈스테이를 그때그때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학교에 도착하면 모든 홈스테이 가족들이 아이들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고 아이들을 각자 홈스테이에게 소개해주면 아이들을 데리고 각자의 집으로 떠난다. 그런 후 나는 아들을 데리고 아이들이 있는 홈스테이 집을 일일이 방문해서 아이들이 낯선 집과 사람들에게 어색하지 않고 첫날의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번팀은 다른 팀과 달랐던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남자아이들 비율이 월등히 많았었다. 스무 명에서 2명을 빼고는 모두 남자아이였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팀을 행사하는 동안 내내 잔잔한 사고와 몇 번의 굵직한 사고들이 생겨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한 남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개인 정보


나는 캠프가 시작되기 전에 한국으로부터 아이들에 관한 상세한 개인 정보를 받았다. 아이들의 얼굴 사진, 이름, 나이, 성별, 가족관계, 성격, 특이점, 건강상태 및 알레르기 등의 정보를 미리 받고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익히고 이 정보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오기 전에 홈스테이를 먼저 정해두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남자아이는 이번 캠프에 남동생과 함께 참가를 했지만 형제를 각각 다른 홈스테이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왔었다. 문제없이 서로 다른 홈스테이로 보냈고 그들이 학교에서 보인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무시 아니면 적대감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이 형제 중에서 형 이야기를, 하나의 큰 소동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호주에 도착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돌려보내질 뻔한 유일한 아이, 나의 캠프들 중에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 후로는 전무했다.



이 친구는 14살이고 한국에서 중1을 마친 남자아이였다. 이때는 호주는 방학이 아닌 8월이라 제3 텀이 진행 중이었다. 학기 중에 실행되는 캠프는 웬만하면 호주 초등학교 아이들 나이 또래를 원했으나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한 친구였고 캠프 온 한국 아이들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았었다. 나이 때문에 오기 전부터 학교 규정상 문제가 되었던 아이였었다.


이 아이는 첫인상에서도 이상하게 만큼 얼굴 표정이, 아이가 가질 수 없을 정도의 독기가 가득해 보였다. 행동과 말이 경직되어 있었으며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었고 특히 캠프를 같이 온 아이들이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해서인지 폭력적이었다. 수업 중이고 야외 활동 중에도 모든 것에서 자신이 첫 번째, 우선 되어야 하다는 생각을 가진 친구였다. 수업 중에는 다른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혼자 다 하려는 욕심이 너무 컸기에  다른 아이들과 수차례 다투기도 했었고 소규모 그룹 활동에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아이였다.


첫 번째 수업 날, 첫 번째 사고가 터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나는 너무 황당해서  '이렇게까지...'라는 의아함에 아 아이를 보고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었다. 다른 아이가 쓰고 있는 가위를 힘으로 억지로 뺏어 먼저 쓰려하다 저항하는 상대 아이의 왼쪽 손가락에 6방울 꿰매는 상처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캠프 중에는 수업시간이든 야외활동이든, 모든 장소에서 모든 아이들을 관찰했다. 캠프에서 제일 중요시 생각하는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아이들 각각의 행동과 말을 듣고 지켜보며, 중재 및 훈육도 하며 아이들을 살폈던 것은 그날 저녁 모든 행사가 끝이 나면 나는 한국 담당자나, 한국 쪽 홈페이지로 그날의 일일 캠프 진행 사항을 사진과 함께 아이별로 상세히 적어 보내 주었었다. 한국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아니었지만 같은 나이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을 떠나보낸 부모들을 위해 시작한 행동들이었고 9년 동안 꾸준히 했었다.


첫 번째 영어 수업 시간 후로 나는 이 아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중재를 하며 적절히 통제하기 시작했었다. 그렇게 아이는 나의 특별한 통제하에 캠프 영어 수업시간에는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일으키지도 못했었다.


싸움, 폭력


그러다 나의 통재가 분산되는 점심시간에 이 아이는 또 한 번의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캠프 시작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번 캠프는 8월 진행이라는 특수 사항이 있었다. 호주 학기 중에 오는 영어 캠프로서 한국 아이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점심시간 바로 직전에 각자의 나이에 맞는 현지반으로 찾아가서 현지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 수업을 현지 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받는 영어 캠프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현지 아이들과 같이 점심도 먹고 쉬는 시간 뛰어놀며 수업하면서 현지 아이들을 더욱 많이 사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반면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진행 방식이었지만 그것을 대비하여 Buddy시스템을 도입해 현지 아이들과 영어캠프 아이들을 일대일 단짝을 만들어주며 돌봐주게 했었다.


이럴 때에는 나는 한국 아이들이 속한 반들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적응 상태을 체크하며 학교를, 교실을 돌아다니며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점심시간에 사고가 터졌다. 이 아이가 점심을 먹고 난 후 놀이 시간에 호주 아이와 싸움을 하게 되었고 상대편 호주 아이를 폭행하고 목을 누르며 제압하는 일을 저질렀다. 그런 다음 문제를 과중시킨 것은 그 장소를 지키던 담당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호주 아이와 싸운 이유는 간단했다. 호주 아이가 이 아이와 이야기하다 말다툼을 서로 하게 되었고 호주 아이가 욕을 했고 영어 욕을 들은 이 아이는 화를 났고 그 욕한 호주 아이를 몇 차례 때리며 벤치에 눕혀 꼼짝 못 하게 목을 눌렀던 것이었다. 호주 아이는 한국 아이보다 2살이나 적어 덩치도 훨씬 적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교사에게 훈육을 받으며 싸움은 끝이 났지만 한국 아이는 영어를 알아듣고서도 고개를 계속 숙이며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주니어 운동장에서 있었고 소식을 전해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시니어들이 있는 장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를 찾으러 온 호주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 그 현장에 있던 아이들을 통해서 모든 사태가 파악이 되었고 나는 제일 먼저, 흥분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는 그 장소 의무 선생부터 처리를 했다.


눈맞춤


호주에서는 대화할 때나, 누가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아이 컨택, 눈맞춤을 하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라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어릴 적 학창 시절, 아주 먼 기억 속에 선생님으로부터 혼날 때는 잘못했다는 반성의 의미로 반전체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서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까지 여전히 그런가 하는 의문은 들었지만 나의 옛 기억으로 점심시간 그 장소 의무 선생을 이해시켰다.


문화적 차이


문화적 차이라는 예를 들며 선생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은 '얼굴 들고 나를 쳐다봐'라고 여러 번 말을 했지만 분명 알아들으면서도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고 반항했다고 말을 해 왔다. 이 선생은 분명히 보긴 잘 본 것 같았다. 그때 그 아이의 눈빛과 몸에서는 최대한의 독기가, 흥분과 반항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 아이는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는 중 1이었고 며칠 수업을 지켜본 걸로 호주 선생님의 지시를 분명히 알아듣고도 남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아이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고, 자신만 야단치는 선생에게 화가 났었기에 완전 무시하고 고집부리며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가 나 있던 선생은 눈에 보이는 아이의 반항적인 행동에 화가 났었지만 나의 설명으로 화를 가라 앉혔고 뒤따르는 나의 컴플레인으로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캠프 아이들의 문제는, 모든 캠프를 총괄하는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야 했었다고 하지만 당신이 그러지 않아 매우 불편하고 유감스럽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었다. 특히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 아이를 직접 훈육하려 했다는 것이 실수였다고 분명히 지적하며 다음에 다시 캠프 아이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한다면 직접 나서기보다는 제일 먼저 나를 찾고 나를 통해 해결하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덧붙이며 냉랭했던 나의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하며 끝을 냈었다. 사실상 나는 이 선생이 보인 행동과 반응이 매우 실망스러워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지만 이번 주 임시 교사로 학교를 나온 선생이라 캠프에 대해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넘어갈 수 있었다.


학교 측 입장


문제는 학교의 규칙이었다. 호주 학교에서는 그 당시 한국 아이들이 즐겨했던, 장난으로 하는 해드 락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규칙이 까다롭다. 그런데 친구를 폭력하고 목을 조른 행동은 아주 심각한 문제였기에 학교 규칙에 따라 처벌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최고의 벌칙인 퇴학일 것이고 작게는 다른 학교로 옮겨야 하는 벌칙을 받게 되어 있기에 학교 측에서는 아이를 캠프에서 퇴출하길 바랄 것이었다. 기정사실이었다.


한국 측 입장


아이가 보는 앞에서 한국에, 신문사 측 담당자와 연락했고 학교 교칙을 설명하며 아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할 경우가 생길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한국 쪽에서는 이미 인솔자에게서 연락을 받은 상태였고 매일매일 사건사고로 힘들었던 나의 고생만 미안하게 생각했으며 문제를 일으킨 학생은 내일 비행기를 태워 보내 달라는 말을 전해 왔다. '이렇게 쉽게?'라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한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캠프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나의 일일 보고서는, 첫날 홈스테이 들어가서 자신의 방 사진부터 가족들과 함께한 사진들 그리고 가족 설명을 보냈고 그런 후 하루씩 진행하는 모든 수업과 일정에서 아이들이 했던 모든 것들을 아이별 이야기와 사진과 함께 최대한 자세히 적어 보냈었기에 신문사에서도 지난 며칠 동안 꾸준히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 이 아이를 내일 당장 한국에 돌려보내도 신문사에는 아무런 피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학교와 신문사 두 곳의 결정을 알게 되었고 이제 나만, 마음을 정하면 이 아이는 내일 비행기로, 한국으로 보내 질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궁금증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불구하고 굳어진 인상이며 무서울 정도의 독기 그리고 폭력성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결론을 맺게 되든지에 상관없이 나는 이아이를 돕고 싶었다. 이때까지 아이는 눈으로 독기를 품고 있었다.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 얼핏 머릿속에 장난스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누구야, 눈으로 레이저 광선 쏘니?
눈 좀 풀어라. 그렇게 눈에 힘주면 아프지 않니? 눈 빠지겠다.

 

아이를 태우고 홈스테이로 데려다주며 무슨 말로 시작을 할까 생각하다 나는 머릿속에 떠올라 혼자 웃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의 뜻밖의 말에 아이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운전을 하며 아이에게 설명으로 먼저 긴 이야기를 했다. 지금 자신이 일으킨 문제가 얼마나 큰지 그래서 너는 부모님이 많은 돈을 내고 보내주신 캠프를 끝내지도 못하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아이는 갑자기 다시 독기로, 반항으로 말을 받았다. 호주 아이가 먼저 자신에게 욕을 했다며 억울하다고 소리를 마구 질렀다. 이 아이는 자기가 한국말로 호주 아이가 알아듣지 못한 욕을 먼저 했던 것은 상대편 호주 아이가 알아듣지 못했기에 욕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저 자기에게 날아온, 들은 영어 욕만 억울했던 것이었다. 나는 교육자로써 오기가 생겼다. 이 아이의 생각을, 마음을 한 번쯤은 누군가가 깨트려주어야 한다고, 그 누군가가 오늘 바로 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깨고 볼 것이다.


그전까지 가볍고 부드럽게 시작한 나의 말투는 달라졌으며 홈스테이로 향하는 차 안의 분위기는 낮고 무겁게 바뀌었다. 소리 지르던 아이는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았고 나는 차갑고 냉철하게 그 아이의 잘못을 짚어 나갔고 억지스러운 반박이 통하지 않게 되자 아이는 수그러 들었다. 모든 설명을 마치고 잠시 아이에게 자신을 반성할 시간을 주며 홈스테이에 우리는 도착했다.


이 정도로는 아직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했다.


그래서 한번 더, 아이의 방으로 같이 들어가 충분히 시간을 가지며 나는 아이를 깨기 시작했다. 그 독한 눈에 눈물이 흘렸다. 억울해 죽겠어서 흘리는 눈물과는 달랐었다. 내가 아이를, 마음을 깨고 있는 것이 보였다.


Reflect
thinking deeply or carefully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달라고,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는 뭔가를, 너의 진심을, 네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달라고 했었다. 나는 이야기하는 지금까지도 너의 진심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너 자신을 생각해 보면서 자신을 reflect, 반성해 보라고 했다. 아직 한 번도 이런 시간을 가져 보지 못한 것 같았고, 자기 고집만 피워온 아이라 반성을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제 할 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줬으니 아이의 방을 나와 거실에서 기다렸다.


포기해도 괜찮은 아이는 없다


솔직히 나는 캠프를 하면서 참 다양한 성격과 문제를 갖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보게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이렇게 다들 포기해라, 포기해도 괜찮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나는 초등학생 연령대를 만나다 보니, 많은 아이들의 문제적인 행동이나 말투는 그 아이와 생활하는 어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작용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문제가 있는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는 많이 조심스러웠었다.


아이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나를 설득한다면 나는 이 아이를,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지키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뀌려는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해 온다면 나는 아이를 위해 교칙도, 한국 쪽 신문사의 결정도 어길 생각이었다.


아이의 이야기


자신의 방에서 나온 아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나간 뒤로도 열심히 울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은 눈물에 젖어 있고 흐르고 있었다. 그전까지 보았던 아이의 얼굴에서 독한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고 눈빛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진정을 다해 자신을 반성한 모양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자주 맞았다고 했다. 형이기에 동생에게도 이겨야 했고, 그 누구에게도 이겨야 했었고 잘해야 했었다고 했다. 그러지 못하면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고 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면, 성적이 잘하고 있어도 동생은 성적이 오르고 자신은 그대로 있어도 비교당하며 아버지로부터 매를 더욱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짐작의 사실화


이번에도 이아이의 행동을 보며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뒤에 그런 부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만 해 보았었다. 영어 캠프를 하면서 매일 써 보내던 일일 보고서가 어느 순간 문제아 뒤에 있을 문제 부모들이 내 글을 읽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일일 보고서 같은 글을 쓰면서 조심스러웠었다. 단순히 3-4주 캠프 보낸 아이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 문제를 가지고 부모들에게 먹히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이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걱정이 될 때만 가끔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의 어머니 이메일 주소를 받아서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몇 번 있었었다. 그런 몇 번의 기억이 나쁘지 않았었고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답을 보내주셔서 안심되었었다.


아이의 공포심


독기가 빠진 아이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무서워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거라는 공포감이 너무 커 있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한국 아이의 집으로 전화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엄마에게 아이를 아이의 두려움을 이야기해주고 아버지의 체벌을 막아 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한국에 전화를 하니 아이의 엄마가 이미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고 아이를 계속 있게 할 무슨 방법이 없겠냐는 질문을 해오던 중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기를 빼앗긴 모양이었다.


아이의 아버지


원하지 않았던 아이의 아버지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솔직히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해서 엄마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교육문제는 자신에게 말을 하라는 바람에 나는 아이의 엄마와 이야기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람과 말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바꿔 달라는 나의 부탁을 거절하며 당신과 이야기하라는 아버지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인이 통화하는데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전화기를 채 간다는 자체도, 이해되지 않았고 그의 무례함이 보였기에 나는 강하게 시작했다.


무조건 아버님의 잘못이다


아이의 폭력성을 키운 건 아버님 잘못이라는 첫말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한마디에 뭐라고 말씀을 하시려고 시도를 해서 일단 아버님의 말을 막고 내 말을 다 듣고 이야기를 해 주시라고 당부하며 당신 아이의 폭력성에 대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아이의 경직되고 독한 표정과 독한 말투 그리고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등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아이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이를 지금은 체벌로 다룰 수 있지만 나중엔 좀 더 크면 아버지에게 반항을 시작으로 똑같이 폭력을 하든지 아니면 더 이상 당신 곁에 없을 거라는 경고의 말도 했었다. 성적의 좋고 나쁨을 떠나 당신은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것과 형제간의 우애도 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망쳐 놓았다고 말을 꺼냈다. 제삼자의 눈, 제 눈에 분명히 보인다고 말을 했었다.


아이를 강하게 키우는 방법에 꼭 체벌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체벌 없이도 얼마든지 강하고 바른 아이로 소속된 사회에 어울리는 훌륭한 아이로 만들 수 있는데 당신은 체벌로 당신의 아들, 장남을 망치고 있다고 말을 했다. 캠프를 시작하고부터 이런 일이 있은 후 아이가 보인 모든 행동과 반응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제는 아버지에게 받을 체벌이 두려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가길 겁을 내고 있다고 이런 마음을 품는 아이가 정상인지를 물었었다. 부모의 집에 가길 두려워하는 아이가 정상입니까 하고 되물으며 나는 한 박자 쉬었다.


너무 나갔나?


한참 열변을 토해내다 문득 얼굴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아버지를 훈육하는 있는 나 자신을  깨닫고 말을 멈출 수 있었다. 이분은 어떤 모르는 여자에게 그것도 가족사에 대한 열띤 말을 듣고 분명 멍해졌을 거라는 짐작이 되었다.


정적


양쪽 모두 전화기를 잡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후 아이의 아버지가 말을 꺼내셨다. 안 그래도 자신도 아이를 너무 많이 때린 것 같아 차츰 줄이고 있었다며 올해 중학교 들어서는 현저히 줄였고 이젠 더 이상 체벌은 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약속한다며 나에게 약속을 해 오셨다. 갑자기 나에게 약속을 하시는 아이의 아버지 말에, 변명에 웃어야 할지 잠시 나는 열띤 기분이 흐트러졌었다.


무엇이든 끝맺음은 좋게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 잡으며 이번엔 목소리 톤도 바꾸어서 끝맺음을 했다. 정말 내 아이를 잘 키우시려면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시라고 당부를 했다. 형제들끼리 경쟁이 아닌 우애로, 체벌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를 너그럽게 품어주라고 아버님의 노력이 당신의 자식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을 전했다. 아이의 아버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나에게 다시 한번 약속을 했다. 그러며 마지막으로 어떻게 아이를 계속 캠프에 남게 할 방법이 없냐고 물으셨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아직까지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했고 아버지는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나는 통화를 마치며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약속을 들려주라고 전화를 넘겨주었다.


나는 사서 고생을 하고 싶은가?


솔직히 내일 학교에 가서 몇 가지 처리를 해야 했었다. 호주 학생들에게 적용하는 규칙을 캠프 온 아이라고 예외 시켜 달라는, 봐 달라는 방법이 그때는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가 망설인 이유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두 가지 중 쉬운 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감싸 안고 3주 이상을 더 데리고 간다면 이 아이는 과연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성격과 행동이 바뀔 것인가?'와 '이 아이를 빼고 17명의 남자아이들과 2명의 여자 아이들만 데리고 이번을 교훈 삼아 경각심을 주며 조용히 조금 쉽게 캠프를 진행할까'라는 두 가지 생각으로 갈등을 했었다.


이 아이의 홈스테이를 빠져나오면서 아이에게 싼 짐을 내일 학교 올 때 가지고 오라고 했다. 홈스테이 엄마에게는, 다행히도 나의 절친이었기에  혹시나 내일 학교에서 이아이에 대한 증언을 요구할지 모르니 그때는 '집에서 아이가 예의 바르게 잘한다'라고 말해 달라 부탁하고 나는 늦은 시간 아들과 집으로 돌아왔었다.


사건의 결말


나는 다음날 일찍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학교 교장과 면담을 했다. 그런 후 호주 아이와 그의 부모를 만나 설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아이를 내치지 않고 캠프를 계속하게 해 주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캠프하는 4주 동안 많이 변해갔다. 나는 틈틈이 이 아이와 동생을 지켜보며 적절히 상담을 했고, 진행하는 동안 계속 다독여주고 용기를 주며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형제들은 서로를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고 돌아갈 쯤엔 형제간의 의리가 생긴 것도 보였다. 캠프를 마치고 돌아갈 때쯤에는 이 아이의 독기 가득했던 눈빛은 선하게 웃는 얼굴로, 눈빛으로 많이 부드러워져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캠프를 마치면


매번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행동과 말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먼저 가정에서 보고 배우며 자란다. 같이 사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의 기본 인성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모들은, 어른들은 자신이 아이들의 거울이라 생각하며 모든 행동과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모의 체벌은 아이들에게 두려움과 폭력성을 그리고 반항심을 키우게 한다. 아이에게 체벌을 가하려는 당신, 먼저 본인을 반성해 보길 바란다. 과연 지금 내가 아이에게 행하는 체벌은, 폭언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먼저 자신을 반성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멈추길 바란다. 체벌과 폭언은 아이를 키우면서는 불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선택으로 아이를 세상에 만들어 놓았으니 정성을 다해 키우자. 아이를 내가 이루지 못한 큰 인물이 되길 바라기보다는, 내 아이가 집에서 사랑받고 행복하며, 가족이 아닌 누가 봐도 바른 아이가 되도록 우리 부모들이 먼저 잘하자. 아이를 바르게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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