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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May 0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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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을 받아 든 그 순간.

지금껏 나이를 먹지만,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그 순간들을 돌아보면 대개 처음 새로운 경험을 맞이하는 찰나가 기억하기 쉬운 듯하다. 예를 들자면, 처음 길을 잃어버린 순간이라든가 처음 로마에서 젤라또를 먹던 순간처럼.



비 일상적인 기억은 대체로 그 순간의 분위기와 소리, 느낌의 일부까지도 생생하게 또는 다소 과장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편이다.


가장 최근에 남아 있는 잔상이라면 커다란 휠이다. 전체적으로는 길고 큰 프린터기 같이 생긴 인쇄기에는 네 가지의 휠이 붙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책의 낱장에 잉크를 흘려낸다. 검은색부터 찍어내는 네 개의 바퀴 위에 구워진 동판이 붙어 돌아가고, 그 틈 사이로 잉크가 흘러 종이에 닿는 원리. 기사님의 정밀한 양 조절에 따라 책 속 전체 사진의 명암이 결정된다. 요즘 시대에 이토록 수작업으로 완성되는 책이라니.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여전히 사람의 손 끝에 달려 있었다.



인쇄기에 돌아가는 판은 머릿속 예상보다 물리적으로 큰 편이다. 한 장안에 16페이지가 제본의 순서에 맞춰 앉혀져 한 장에 찍혀 나온다. 대략 책의 내용이 원고의 순서대로 머릿속에 있던 터라, 나오는 페이지들의 우연한 조합은 새로운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을 받는 기분처럼. 개별적인 페이지를 앞 뒤 없이 보다 보면, 4년을 끼고 살았던 원고조차도 낯선 느낌이 든다. 물론 생각보다 감상에 젖을 여유가 넉넉지는 못했다. 초판에 2000부를 인쇄하는데, 생각보다 페이지의 전환이 느리지 않았다. 판이 바뀔 때마다 기사님이 부르시면 눈이 부시게 환한 빛 아래서 어느 하나 놓칠세라 페이지 속의 색과 음영을 섬세하게 관찰한다.



밝기와 초점부터 빛깔의 세기까지 자잘한 디테일에 온 몸의 신경이 쏠리고 만다.

그렇게 기사님과 모든 판을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은 1박 2일. 이렇게 저자가 인쇄기 옆에서 한 권의 모든 판을 감리 보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씀해주셔서 알았다.


인쇄기에서 나온 페이지들의 잉크가 마르고, 제본소를 들러 책으로 묶여 받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 5월을 하루 앞둔 화요일 오후, 갓 나온 책 300권을 출판사에서 직접 가져다주셨다.



처음 책을 받아 들고 앉은 미팅에선 그간 벌어졌던 표지와 제목부터 책의 종이 선정까지 단계마다 숨겨진 에피소드가 사무실에 차고 넘쳤다. 실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흥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주간의 야간작업 등 여러 순간이 눈 앞을 스쳤지만, 그 모든 시간이 손에 들린 한 권의 책 앞에서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긴장감과 설렘이 온몸을 스쳤다. 그저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 보았다. 이제는 우리의 책을 당신에게 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텀블벅을 통해 인시즌의 책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지금의 계절을 살아가는 인시즌의 방법을 독자들도 직접 맛볼 수 있도록 제품과 함께 구성하기도 하고, 같이 맛볼 수 있는 테이스팅 세션을 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테이스팅 시기를 5월의 휴일에 맞추다 보니 펀딩 기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 3주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다. 다만 한 가지 쑥스러운 상황은, 몇몇 분들이 저자 싸인(?)을 말씀해 주신 부분이다. 저자...라는 말도 쑥스럽기 짝이 없는데... 싸인이라니.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꿋꿋이 이겨 내고 책 앞장에 이름과 감사인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을 처음 받는 모든 분들이 좋아해 주시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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