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무엇이든 첫 번째 기억은 중요하다.
그다음에 겹쳐질 수많은 경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아이스티는 우리 모두가 아는 복숭아 맛 가루였다. 겨울에는 코코아 가루를 타서 마셨다면, 여름철에 마실 수 있는 달달한 가루는 아이스티가 있었다. 아직'차'가 무엇인지, 녹차와 홍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던 나이부터 손쉽게 타 먹는 믹스 중 하나. 탄산이 없는 환타 같은 느낌이었던 것도 같다.
'아이스티'라는 존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이 넘어 '홍차' 문화권인 영국 옆 아일랜드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익숙했던 가루 대신 티백만 가득한 탕비실에서 이틀에 한 번 꼴로 6잔이 넘는 홍차를 타면서, 아이스티 역시 잎이 들어간 티백으로 우려내는 음료라는 인식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계절에 들어서면서, 날씨가 점점 따뜻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점심 먹고 들어 온 오후, 배부름과 나른함이 겹쳐지기 시작하면 온몸이 늘어지기 마련. 이때 기분전환을 시켜줄 수 있는 시원한 한 잔의 음료는 모든 직장인에게 필수다.
하루에도 몇 잔이나 마시게 되는 커피를 생각한다면, 이때만이라도 시원한 아이스티가 지혜롭다. 티백만 우려서는 절대로 단맛이 나지 않는 아이스티에는 설탕 대신 생과일의 향이 가득한 과실청을 곁들여 주면 더 맛있게 마실 수 있다.
제철에 나는 과일의 경우, 그때 마셔야 하는 이유가 있는 편이다. 4월이 제철인 하귤은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넉넉한 수분과 비타민을 공급해 주고, 숙취해소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도 효과가 있으며 감기나 천식에도 좋다고 하니, 요즘 같은 호흡기 비상에는 일부러 찾아 먹을 필요가 있는 셈이다.
아이스티를 마시는데 번거로운 부분이 있다면 결국 떫지 않게 티백을 우리는 과정. 그나마 전날 찬 물에 티백을 넣고 냉장고에 넣어 천천히 12시간 우려내는 냉침법의 경우는 간단한 편이다. 즉석으로 아이스티를 우려 마시자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원래 홍차잎은 팔팔 끓는 100도의 물로 우려야 하므로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어 3~5분 정도 우려 준 뒤 얼음이 가득한 컵에 부어 한 번에 갑자기 온도를 식혀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크림 다운이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홍차 속에 숨어 있는 탄닌 성분 때문에 아이스티가 뿌옇게 흐려지고 만다.
홍차를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 티백이 무슨 맛인지는 봉투 겉으로 맡는 향기 외에는 큰 힌트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처음 보는 용어들이 수두룩하다. '닐기리'나 '우바'처럼 재배지의 이름을 딴 홍차부터 홍차의 채취시기에 따라붙는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 같은 이름들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종류와 재배방법, 가공방법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홍차는 스페셜티 커피 못지않은 종류의 다양성과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홍차의 맛이란 우리는 온도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지고, 시간을 놓쳐 길게 우리면 떫어지기 마련이다.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한 잔의 특별한 커피처럼, 차 역시 전문가가 우려 주는 한 잔의 맛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대부분의 카페를 운영하시는 바리스타 분들도 차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대다수의 카페에서 하귤 얼그레이라는 이 계절에 적합한 '아이스티'레시피를 알려드려도, 탄산수에 서비스하는 '에이드'로만 널리 소비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되었다. 누구나 쉽게 마실 수 있으려면, 쉽게 만드는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셈이다. 그때부터 하귤 청과 얼그레이 홍차를 하나로 합쳐보려는 버거운 시도가 시작되었다.
만드는 사람이 쉽게 마시려면, 기존의 하귤 청과 먹는 방식은 동일하게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시럽 안에 홍차를 우려내는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면서, 서울시에서 식품으로는 드물게 R&D 지원을 받아 1년 만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완성했다. 제철 제주에서 올라온 하귤로 담가낸 하귤청에 영국산 얼그레이 full leaf tea를 풍부하게 우려낸 시럽은 물에만 타도, 직접 전문적으로 우려낸 홍차에 탄 하귤청 아이스티 맛의 90% 정도(제조사 기준)를 구현할 수 있다.
날씨가 점점 좋아지는 봄날,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자면 유달리 몸이 찌뿌둥하게 느껴지고 온 몸이 뻐근한 기분이 들곤 한다. 오히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더 피곤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쓰고 걷다 보면 야외활동을 즐기기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꾸만 움츠러들고 답답한 기분이 온몸에 스며들 때면, 스스로를 북돋워 줄 작은 전환점이 필요하다.
힘낼 수 있도록 쉬어가는 그 순간, 속 시원한 하귤 아이스티 한잔으로 분위기를 바꿔보면 어떨까. 제철과일의 상큼한 향기란, 빛바랜 일상에 조금이라도 새로운 활기를 더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직접 홍차를 우려서 만들어 보는
하귤 얼그레이 아이스티
Summer Citrus Earl-grey Ice-tea
Ingredients (1잔 분량)
뜨거운 물(100도로 팔팔 끓는 물) 100ml
얼그레이 티백 1개
티 팟에 급랭용 얼음 10개 / 아이스티 컵에 얼음 10개
*혹은 냉침한 얼그레이 티 200ml
하귤청 50g (대략 300ml 컵 기준)
하귤 제스트, 하귤 슬라이스 포함
Method
1) 뜨거운 물을 끓입니다.
2) 컵에 티백을 하나 넣고 분량의 뜨거운 물을 넣고 뚜껑을 덮어 5분간 잘 우려 줍니다.
3) 먼저 급랭용 티팟에 우려낸 홍차를 내려줍니다.
4) 아이스티로 마실 컵에 분량의 하귤 청과 얼음 10개를 넣은 다음, 티팟에 내려 식힌 홍차를 부어줍니다. 5) 하귤 슬라이스와 제스트로 장식한 뒤 밑에 가라앉은 하귤청을 잘 저어 마시면 됩니다.
* 하귤 얼그레이 시럽은 간단합니다.
하귤 얼그레이 시럽 40g + 물 100ml + 얼음 10개를 잘 저어 섞어주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