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면증의 시작
대기업도, 명문대도, 부자도 아니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1980년대. 딸만 둘을 낳은 엄마는 시댁에 가면 죄인처럼 앉아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낳은 막내아들은 어릴 때부터 몸이 자주 아파 엄마는 늘 속앓이했다. 5~7살 때 대단한 능력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뭐든 잘한다, 잘한다 격려했다. 당신 아들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특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다 혼자 진로를 정해 학업을 중단했을 때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우리 아들이 무슨 일을 해도 믿는다”고 지지해 줬다.
다소 지나치게 높았던 자존감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점차 깎여나갔다. 여자친구(현 아내)는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곧이곧대로 전하진 않았지만 무엇인가 대화가 잘 진척되지 않은 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경제력 차이가 있었으므로 여자친구네의 걱정과 불안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마침 그때쯤 여자친구가 속한 회사 팀에서도 결혼이 화두로 떠올랐다. “주위 보면 대기업 다니거나 집에서 지원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 같아. 점점 결혼하기 힘들어져.” 그녀는 점심시간에 회사 사람과의 대화를 내게 공유했다.
당시 여자친구 주위에는 결혼한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아버지 지인들의 결혼식을 보면 대기업 또는 집에서의 지원 중 하나는 충족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의도를 가지고 말을 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내용을 들은 뒤 결혼한 친구들을 돌이켜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시작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자산과 연봉 수준 등은 출발점에 서기도 어려웠다.
마음의 여유가 줄어드니 짜증이 많아졌다. 돈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들은 작게라도 시작하면서 잘 사는데 왜 너만 그러냐”는 격한 반응이 나오자, 그날 밤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대기업을 다니거나 집에 돈이 많거나 명문대를 나오거나, 하나는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우리 부모님도 시원하게 결혼하란 말을 못 하는 거 아니야. 결혼자금도 내가 더 많이 내게 생겼는데 나를 달래주진 못할망정 짜증을 내는 게 맞아?”
산봉우리가 날카롭게 잘리는 듯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반박할 수 없었으나 평생 쌓은 자존감이 깎였다는 점도 자명했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자기평가는 ‘괜찮지 않다’로 바뀌었다. 위로를 해줄 여유도 없었다.
끝끝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여자친구에게 “그럼 결혼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너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고 이는 당장 바뀔 수 없으니 그만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처음으로 파혼을 선언한 것이다. 여자친구네 집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날을 잡았지만 이대로라면 만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평소 믿지 않았던 말까지 떠올랐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부모님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나를 달래주거나 믿음을 줘야지 헤어지잔 말을 해? 결혼하자고 해놓고 헤어지잔 말이 쉽게 나와? 자기만 자존심 상하는 게 아니라 나도 자존심 상해. 그래도 어떻게든 결혼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안 드는 말 했다고 헤어지자고 그래? 예전에도 돈 얘기 나오니까 돈 많은 남자 만나라더니 맨날 힘들면 이렇게 놓는 거야?”
더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다음 날 출근을 앞두고 서로 감정만 토로하다간 새벽이 될 것만 같았다. 감정을 삭일 겸 일단 잠을 청하기로 협의했다. 휴전일 뿐 종전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전세로 집을 구할 수 없고 그렇다고 자동차를 시원하게 뽑을 수 없는 나의 경제력을 마주한 순간, 내 철학과 가치관도 함께 흔들렸다. 파혼하고 혼자 사는 게 맞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