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면증의 시작
"빨리 와. 고생했어."
싸움의 뒤는 요동치는 호수 표면처럼 불안정하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여자친구(현 아내)의 말에 퇴근 후 한 카페를 찾았다.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의 몸을 짓눌렀다. 관계를 정리할 것인지 이어 나갈 것인지, 나 역시도 어느 노선을 택하는 게 옳은지 확신이 없었다. 여자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라고 그만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게 아니야. 나는 우리 관계에 책임감을 갖고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보고 싶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조금 힘들다고 관계의 끈을 놓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해 보는 데까진 해봐야지 조금 힘들다고 파혼하자는 말이 나와? 더군다나 우리 집에 가기로 약속까지 다 해놓고.”
며칠 뒤면 여자친구 부모님을 뵙기 위해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전에 밖에서 처음 인사드리긴 했으나 집을 찾아간다는 건 또 다른 의미를 내포했다. 처음 여자친구 부모님을 뵙기로 한 날도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번에도 큰일을 앞두고 다툼이 생겼다.
“자기 말이 맞는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자꾸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야. 굳이 사람 자존감까지 깎으면서까지 날 비난할 이유가 뭐가 있어 결혼할 사이라면. 자기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걸 콕 집어서 자꾸 이야기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내 주위에는 대체로 긴 연애 끝에 함께 결혼한 친구들이 많았다. 사람의 배경보단 서로가 좋으니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크고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출신 대학이나 현재의 자산 상태가 대화 주제로 거론되진 않았다. 학교는 학생이 찾은 진로를 지원해 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은 고등학생 때처럼, 결혼은 서로 좋아해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닌 조건과 배경이 배우자 등급을 매기는 경매장과 같았다.
“자존심 상했다면 미안하고 나도 뭔가 내 뜻대로 안 돼서 말이 그렇게 나왔던 거 같아. 우리 부모님한테 인사드리기로 했으니까 일단은 약속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녀의 사과에 ‘파혼 선언’도 흔들렸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실랑이를 벌이다 나온 말이니 그리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같은 문제로 다툴 것 같았고, 여자친구 부모님이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여자친구가 먼저 고개를 숙인 마당에 일단은 한 번 더 돌파해 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나도 미안하고 신혼집 리스트 만든 거 가지고 주말에 집으로 갈 테니까 그때 부모님이랑 같이 이야기해 보자. 원하는 대로 다 못 해줘서 미안하네.” 파혼 선언을 어설프게 봉합하고 그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눴다. 함께 사과했으니 나름 이상적으로 마무리된 셈. ‘일단 고(go)’를 외쳤지만 여자친구 부모님의 반응은 또 하나의 걱정이었다.
한 차례 파도가 몰아치고 찾아온 주말은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지하철역에서 여자친구 집까진 도보로 불과 10분이었지만 훈련병 시절 행군할 때만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평가받아야 하는 삶, 상대방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나의 배경이 아킬레스건을 베는 듯했다.
여자친구 집 근처에 다다르자 “빨리 와. 우리 다 기다리고 있어”라는 여자친구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친구 역시 “빨리 와, 빨리. 걷지 말고 뛰어야지”라며 농을 쳤다. 바삐 올라간 여자친구 집에는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어머니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과일 먹으면서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윽고 식탁에 앉은 아버지는 “우리 딸이 결혼을 결심했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 나눠보자”고 말씀하셨다.
뜻밖의 환대. 금전적인 문제로 어떤 말이 오갈까 걱정이 가득했지만 ‘예비 가족’처럼 두 분이 맞이해주셨다. 다뤄야 할 민감한 주제가 많았지만 우리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두 분은 딸의 결정을 오롯이 지지해 준 결과다. 예비 장인·장모가 자존심을 상하게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한 취재원의 일화가 더는 내 이야기가 되지 않겠구나, 하는 작은 안도감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