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면증의 시작
"제가 사랑 많이 받고 컸습니다. 이젠 여자친구에게 주겠습니다."
결혼을 마음먹은 뒤로는 지인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파혼에 관한 글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이별 후 슬픈 사랑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서울 아파트 전셋값에 한참 못 미치는 1억5000만원을 해오면서 상대방에게 위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은 풍족한데 게임을 한다거나 술을 많이 마시는 상대방의 생활 습관이 마음에 안들어 결국 갈라서는 이야기도 있었다.
한 취재원이 들려준 ‘파혼 위기’도 인상 깊었다. 약 30년 전 고정소득을 얻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막노동을 다녔던 그는 여자친구 집에 처음으로 인사를 갔다. 하지만 그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자친구 부모님은 면전에서 자존심을 긁었다고 한다. 그는 가타부타 논쟁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을 나왔다. 곧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제 부모님을 설득하고 남자친구를 타이른 여자친구 덕분에 ‘공식 인사’가 진행됐고 지금은 아이가 둘 있는 가정을 꾸렸다. 자신감 하나로 살아온 그를 여자친구와 부모님이 믿어준 덕분이라고 했다.
며칠간 만든 ‘전셋집 리스트’를 여자친구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두 분 생각은 달랐겠지만 설명이 끝나기까지 말을 끊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티를 내던 여자친구도 이날만큼은 생글생글했다. 설명이 끝나자 어머님은 “준비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해주셨다. 여자친구도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내 손을 잡았다.
‘반반 결혼’이 추세로 자리 잡았지만 그마저도 못할 가능성이 짙은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의견이 많지 않았다. 특히나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녀를 평생 처음 본 남자에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안 그러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아직 우리 부모 세대의 정서는 딸은 보내는 존재, 아들은 결혼하더라도 본가에서의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나는 그녀의 부모에게 무엇을 호소해야 하는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자녀 배우자의 자산이나 배경, 지위를 따지는 부모도 있으리라. 하지만 대개는 내 자녀가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고생하지 않고 살기 바라는 마음에 ‘객관적 지표’로 볼 수 있는 스펙들은 따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가.
여자친구에게도 그러했듯 그녀의 부모에게도 내가 줄 수 있는 건 일종의 안정감이라 생각했다. 서울 전셋집을 잡을 여건은 안 되지만 귀하게 키운 딸이 나와 살면서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본가를 떠나 새로 꾸린 가정에서도 평안과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 당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가 부모님께 사랑 많이 받고 컸는데 그때 받은 사랑 여자친구한테 주면서 마음고생 안 시키겠습니다. 여자친구 행동 보면 두 분한테 많이 예쁨받고 자란 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많이 많이 사랑해 주고 잘 챙기면서 옆에서 잘 보살피면서 살겠습니다.”
꽤 진정성 있는 발언이었다고 느끼셨는지 여자친구 부모님의 표정은 한층 편안해졌다. 그때는 무슨 용기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도 그때 내 말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