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할 뻔했습니다(21) 성실한 바보

4장: 성실하게 살았는데…

by inseok
수능 공부 버금가는 결혼준비

1997년, 데스크톱이 막 대중화되던 무렵 아빠는 자녀들을 데리고 컴퓨터 가게에 갔다.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당시 100만원이 넘는 큰돈을 지불하고 집에 컴퓨터를 들였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켜지는 화면에 나와 누나들은 눈이 커졌고, 윈도 좌측 하단에 있는 ‘시작’이 무엇을 시작하는지도 모른 채 몇 번이고 마우스를 눌렀다. 일찍 컴퓨터를 접한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를 만지게 되면 겁나는 게 없었다. 지금도 아빠가 그 큰돈을 쓰면서 컴퓨터를 집에 놓았는지 이유를 모른다.

신혼집에 놓을 가전은 어느 정도 품목이 정해져 있다. 크게는 TV, 냉장고, 세탁기와 건조기, 에어컨, 공기청정기, 무선청소기, 의류관리기. 자잘하게 밥솥이나 커피 머신,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등이 있지만 일단은 큰 품목만 추렸다.


어디서 견적을 받느냐에 따라 비용은 널뛰듯 달라졌다. 홀로 하이마트와 같은 전자제품 매장을 여러 곳 둘렀다. 삼성이나 LG 등 브랜드 매장도 다녔다. 비교적 저렴한 곳들에서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 마음 편히 상담받을 수 있었다. TV나 냉장고 등 어떤 모델로 하느냐에 따라 가격 차이가 심했다.

“제휴 카드 발급받고 그걸로 결제하면 금액을 낮출 수 있어요. 저희는 '체감가'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일정 금액 이상 결제하면 포인트를 드리는데 그걸로 다시 결제하면 체감가가 낮아져요. 사모님과 함께 오세요. TV나 냉장고 같은 건 사모님들이 디자인을 많이 선택하니까 남자가 혼자 골랐다가 큰일 나잖아요.”


“아 그렇네요. 마음 같아선 제일 가격대 괜찮은 걸로 깔고 싶은데 참…. 그러니까 TV, 냉장고, 세탁기와 건조기, 에어컨, 무선청소기 보급형 모델로만 하면 800만원 정도 한다는 거죠? TV는 세리프로 해도 큰 차이가 없는 거 같고…보급형 모델이랑 비싼 모델의 기능상 차이가 커 보이지 않는데 어떤가요?"


“TV랑 세탁기, 건조기는 큰 차이 없어요. 에어컨도 마찬가지고요. 크기와 용량에 따라 가격이 달라져요. 그래도 디자인 영향 영향도 있어서 사모님이랑 같이 보시는 게 가장 좋아요. 공기청정기는 안 하세요? 요즘 공기청정기를 거의 다 필수로 하시더라고요. 의류관리기도 요즘 많이들 사시고요. 신혼집 평수는 어떻게 되세요?”

“아직 집을 못 구해서 대략적인 견적만 받아보고 있어요. 공기청정기는 기존에 있는 거 그대로 쓸까 생각 중이에요. 일단 알겠습니다. 견적서 보고 논의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잘하면 가전은 ‘내가 다 사겠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전·가구 합쳐서 2000만원가량 든다고 들었는데, 숫자를 마주하자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셋집도 못 구해가는 마당에 뭐라도 하나는 해결해야 구박을 덜 당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간 곳은 상황이 달랐다. 전자제품 매장은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백화점에 입점한 삼성이나 LG 매장은 확연히 비쌌다. 전자제품 매장과 백화점에 들어가는 모델이 달랐고, LG가 삼성보다 비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어느 브랜드든 큰 가전만 해도 1000만원이 훌쩍 넘었다. 누군가는 고작 몇 백만원 차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내겐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지금 말씀하시는 모델은 백화점엔 없고 전자제품 매장에만 있어요. 여기는 최신 모델만 취급해서 가격대도 조금 높아요. LG는 삼성처럼 세탁기 세제 자동투입 기능이 없어요. 겨울이 되면 세제가 얼어서 세제 자동투입 기능이 무용지물이거든요. 세탁 끝나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도 않아요.”


아빠 손을 잡고 처음 컴퓨터 매장을 찾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았다. 그때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직장인이거늘, 세상은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했다. ‘성실하게만 살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수능 국어 스타강사의 말이 문장이 잠시 생각을 멈추게 했다. 자신 있던 그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할까. 그 말 앞에선 나는 그저 성실한 바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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