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여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인데요?
눈을 떠 보니 경기도 가평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인 서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16살의 내게 주어진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아마 93년생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특목고 입시’ 도전의 기회다. 그때 당시만 해도, 외고 국제고 과고 자사고라는 이 두 세 글자의 단어는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학부모님들에게는 현재의 ‘BTS’ 만큼이나(?) 꽤나 핫한 곳이었다. 전교에서 한 자리에만 든다 하면, 외고 입시반에 들어갈 것을 권유하는 수많은 학원가와 특목고 합격자를 기대하는 학교 교무실의 풍경이 생생했던 2009년 고입이었다. 그랬던 그 당시의 내게 외고 입시란 서울을 가기 위한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외국어 고등학교. 사실 나는 처음에 그런 류의 학교가 마음속엔 없었다. 단지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고, 공부는 그냥 지기 싫어서 한 거지, 학업으로 뭔가 큰 걸 해내려는 열정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치열한 외고 입시 대열에 들어갔던 건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서울’ 이란 그 듣기만 해도 설레는 두 글자 때문이었다. 서울 쪽의 외고로 진학 시 분명 내겐 누구보다도 빠른 ‘인 서울’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상상이 머릿속을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상과 함께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엄마. 나 외고반 들어갈래
단지 서울에 갈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나의 브레인은 16세 때 최대치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하루 6시간은 기본으로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토플 시험은 100점을 넘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고3 때도 안 해본 대중교통에서 영어 듣기 파일 들으며 귀가하기도 아마 중 3 때 해봤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서울에 가기 위해, 대입보다 고입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열정과 함께, 불타오른 16세를 보낸 그 해의 끝 자락, 이제 입시 원서 시즌이 왔다. 서울에서 무조건 살겠다는 의지와 함께 서울권 외고를 목표로 달려온 나였다. 아 그런데 우연이 운명이 되어 버리는 시건에 직면했다. 학원 원장 선생님께서 경기도에 위치한 국제 고등학교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셨다.
에이.. 설마 붙겠어? 그냥 써보자
무심코 서울권 이전의 경기권 입시 서류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학교 건물이 번쩍번쩍하고 교복이 예뻐 보인다는 이유로 흔히 요즘 단어로 질러 버린 것이다. 원서로. 아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직면했다.
합격입니다
그렇게 나는 인 서울의 꿈을 합격이라는 단어로 풀어냈다. 그렇게 나는 불타오른 나의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물 흐르듯 상경을 하게 되었다. 아 그렇게 눈을 떠보니 나는 경기도 가평이었고, 나의 새로운 독립 라이프이자 유학의 삶의 시작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아 근데 말이다. 그때 설레는 맘으로 고등학교 입학식 전날 밤을 보내던 그때.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 버튼을 누르던 그때. 잠시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 데, 바로 그곳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 가평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그토록 상상하던 꿈 꿔왔던 아이돌을 바라보고 도시의 삶을 즐기는 그 서울의 밤이 아닌, 귀뚜라미가 울고, 밤에 고라니가 때로 뛰어다니는 그 시골의 밤. 가평의 밤이 내겐 펼쳐질 것이라는 걸. 그걸 예상치도 못했던 어린 나이의 보냈던 설레던 가평에서의 첫날밤이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