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변

1화. 계기

by 이훈보

때는 겨울. 보일러가 고장 났다.


삼 년 전부터 심상치 않던 보일러를 그때그때 달래 가며 버텨왔는데 결국 고장이 났다. 가을의 끝도 아니고 겨울의 초입에 떠나버렸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은 강 건너의 빌딩 불빛이 선명하고 강의 폭만큼 춥다. 공기는 모두 러시아에서 왔단다. 입김을 확인하며 집으로 가야 했다.


텀블벅 리워드를 포장하기 위해 박스를 주문하고 잘못 고른 카드 봉투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방안의 냉기가 느껴졌다. 짜르르 한 기운이 닫힌 현관 너머 블록을 덮고 횡단보도를 질러 따뜻한 카페의 구석. 엄지발가락 끝까지 전해진다. 등의 온기가 무색하게 발바닥이 찹다.


코로나로 사람이 없는 카페에서 양해를 구하고 택배 포장을 준비한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일하기는 편하겠다 싶어 입맛이 썼다. 은인과의 손익이 이렇게 대치된다.


짐을 풀고 포장의 단계를 정립하고 입맛을 다신다. 왼손 검지에 테이프가 몇 번을 다녀가야 할까. 생각보다 꽤 할 것 이 많았고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될 양이야.'라고 되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모든 서사를 스스로 마쳐야 한다는 괴이한 순교자의 신념 같은 것도 있었다.


다만 티를 내지 않고 나아가자. 그것이 뻔뻔함의 완결이 될 것이다.


어쩌자고 나는 이런 짓을 벌였을까. 무슨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수학에 재능이 없어서 이과대에서 문과대로 전과를 한 주제에 책을 쓰겠다고 일을 벌였을까. 그것도 인문학 비슷한 어떤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쓰겠다고 하면 그게 소설이나 에세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시작과 끝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소설과 극본 시는 모두 여러 응모에 걸쳐 쓴 맛을 봤기에 마냥 팔겠다고 내놓아서는 면목이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책의 주변의 한 꼭지에 그때 탈락했던 글들이 더해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순수 문학 서적은 아닐 것이니 슬그머니 빠져나갈 여지를 둘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박스 안에 들어있는 두꺼운 책들을 생각한다. 478페이지.


정말이지 쓰는 동안은 전혀 몰랐다. 저게 저렇게 두꺼울 줄은...


편집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게 478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웃고 있었지만 몹시 부끄러워 고개를 돌려 표정을 감춰야 했다.


"너는 대체 얼마나 외로왔기에 저걸 혼자서 저렇게 쓰고 앉아 있었던 거냐."


다 식은 아메리카노를 들이켠다.


포장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으니 벽의 냉기가 다시금 종아리에 닿는다. 벽에서 떨어져 쓰지 않던 남색 요가매트를 펼쳐 앉았다. 다이소에서 오천 원을 주고 들여온 녀석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물이 담긴 핫팩을 끌어안고 코끝에 걸린 한기를 가늠하며 다짐한다.


포장을 마치면 꼭 이 이야기를 써야지...


제목은 <책의 주변> 그늘에 인간에 도달하기 까지를 쓰자.


첫 문장은 "때는 겨울. 보일러가 고장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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