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은혜 도망은 도망.

<책의 주변> 2화

by 이훈보

돈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줄도 모르고 수업에서 또 도망쳤다.


니은자 모양으로 생긴 C동 건물에는 총 3개의 계단이 있었다. 하나는 대학 물리 수업이 있는 702호와 가까운 후면 계단. 여기는 4층부터 6층까지 미대생들의 짐을 쌓아두는 영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계단이다. 나머지 두 개는 건물의 중앙에 연결되어 있는 메인 계단으로 학생들과 교수님은 대부분 그쪽의 계단을 이용했고 모든 이의 동선에 맞춰 자판기도 그쪽에 있었다.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성실한 이들은 모두 가운데로 모였다.


떠나는 나는 당연히 후면 계단을 택해야 했다. 계단 참의 먼지도 벽의 허름함도 부끄러움에 높은 완성도를 더하기 때문이다.


1교시 내내 창밖을 보다가 호수공원으로 결정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그리고 조금 있으면 서쪽으로 해가 질 테니까.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해가 떨어지는 호수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가방을 싸고 주변을 충분히 둘러본 뒤 후면 계단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와 마주쳤다. 금색 뿔테 안경을 쓰고 물리를 가르치던 그는 김이 채 사라지지 않은 따뜻한 커피를 호호 불며 내가 보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호수공원에 갑니다."

"네 다녀오세요."


아직 자판기 앞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벌써 커피를 뽑아 들고 와 뒤편 계단에 서 있었으니. 나는 그보다 결정도 느리고 행동도 느렸던 셈이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목례를 한다. 공손하고 느릿하게 그리고 조금은 미안하고 약간은 설레는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와 나의 인연은 벌써 2학기째. 나는 1학기에 제대로 된 시험을 보지도 않고 D-를 받았다. 1학기 성적표에서 유일한 D- 그의 선처로 0.00이라는 흔하디 흔한 학점이 아닌 0.032라는 유니크한 학점을 딸 수 있었다. 그의 작은 선행이 나에겐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나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이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며 감탄을 했으니 어찌 그의 수업을 다시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도 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솔직히 이전까지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는 나의 일방적인 추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그 대화로 깨달았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순순히 (물론 내가 그의 위치였다면 나 또한 그랬겠지만) 나를 보내줬다.


은혜는 은혜 도망은 도망.


그의 인자한 미소와 손끝에서 피어나던 따뜻한 커피의 향을 뒤로하고 나는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수업을 마치지 않은 덕분에 해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게 아는 이 하나 없는 호수공원을 괜히 혼자 걸어 다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는 스케이트 보드를 보며 아주 잠깐 그의 인사를 떠올렸다. 사뿐하고 경쾌한 인사였다.


2학기는 어김없이 F.


잠시나마 열심히 해 볼 마음을 먹게 했던 그


그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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