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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ide Den Jan 03. 2023

영화관에서 한국어 번역이 불편한 이유

영어 칼럼

넷플릭스, 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이 등장하며 우리는 어느새 자막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한국어 영상을 볼 때조차 내 모국어가 한국어이고 소리가 잘 들리는데도 나도 모르게 자막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막 없는 콘텐츠를 볼 때는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신경쓰며 더 집중해야 하기도 하지만, 자막이 있다면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영상을 편하게 시청 할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 영화를 보러 갈 때 자막이 없는 스크린에 오히려 낯섦을 느낀 적도 있다. 그만큼 자막은 편리하다. 무엇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따금씩 외국 영화에서 번역된 한국어 자막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번역이 지나치게 친절하기도 하고, 그 문장 안에 번역가의 주관적인 의역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독해라 하면 누구나 '직독직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이 영어를 읽을 때 의역없이 순서 그대로 읽는 방법이랄까? 사실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다. 한국어는 주체의 행동이 뒤에 나오고 영어는 행동이 먼저 나온다. 두 언어는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어 순서로 영어를 해석하는 것은 사실 어리석게 들리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 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영어 과외를 할 때, 나에게 가장 뒷 페이지에 있는 해설본은 마치 구세주와도 같았다. 완벽하게 의역이 되어 있는 해설본을 보고 나면 내가 해석하지 못하는 문장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설본조차 어떤 문장은 의역이 지나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영어 독해와 번역은 명확히 다르다. 번역에는 언어와 문화가 함께 담겨있어야 한다. 각각의 문화는 서로 다르고 문화를 모른체 문장을 해석한다면 100%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문화와 맞게 번역을 해줘야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우리 문화에 맞게 번역해야만 완벽한 번역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번역 방식은 구식이다. 자막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을 시기 외국영화가 TV에 반영될 때면 영화 안 배우들은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형, 누나, 동생으로 변신한다. 그들의 언어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나 문화는 모두 사라진다. 서로 반말이나 써가는 버릇없는 캐릭터들을 우리 방식대로 바꾸니 마음 놓고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는 외국 콘텐츠를 이전보다 더 쉽게 접할 수 있고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 예전만큼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전혀 모르지도 않고, 다른 문화를 오히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영화관에서는 아직도 그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인다.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앵? 굳이 왜 저렇게 해석한 거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심지어 "왜 의미를 마음대로 바꿔?"라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내가 번역가만큼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번역가는 누구나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짧고 쉬운 문장조차 자기 취향에 맞게 의역한다. 예를들어 최근에 본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의 딸이 동성이라 평소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이루어지는 대사이다.


"I only cook enough food for three people, now I have to cook more."


직역하자면 


"3명 먹을 음식만 준비했는데, 더 해야 되잖아." 


대충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번역은 이랬다.


'"3인분했는데 말이나 하고 데려오지." 


크게 차이를 못 느낄수도 있지만 영어 자체에는 마음에 안드는 제 3자가 눈앞에 함께 있기 때문에 대놓고는 아니지만 살짝 비꼬며 불평하는 느낌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한글 번역은 그냥 번역가 마음대로 쓸데없는 의역을 해놨다. 이 엄마는 여자친구가 온다는 걸 미리 말 했어도 마음에 안들었을 거고 제 3자를 앞에두고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하지도 않았던 캐릭터이다. 그냥 한국 정서에 맞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냥 있는 그대로 해석했어도 한국 정서에 안 맞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내 글을 읽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뭐야? 네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고 불편하면, 그냥 자막 안 보고 영화 보면 되잖아?"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자막을 읽는데 너무 익숙해졌다. 영화관에서 자막이 나오는 이상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자막을 따라 읽어가게 된다. 번역가가 자기 마음대로 써내려 간 사심 가득한 환상을 읽게 되는 것이다. 



난 대학교 때 영문학을 공부했다. 영문학을 다니면서 내가 느낀 건 딱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아! 영어영문학과는 영어를 배우는 학과가 아니었구나. 그리고 두 번째, 영문학과에서 문학작품의 해석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말고사 답안지는 교수님이 판단한 문학 작품의 해석을 정성스럽게 꾸며서 작성해야지만 높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해석의 자유를 운운했다가는 정말 학교 생활이 영원히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난 이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가가 본인등판하여 직접 설명하지 않는 한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 문학은 누구나 개개인의 해석의 자유가 있고 여러 해석이 서로 맞물려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장르가 된다. 영화도 똑같다. 내가 영어 번역을 직독직해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의역은 최대한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다른 문화를 배제하고 우리 문화식으로 접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우리는 내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 번역가는 왜 불필요한 의역을 해서 관객이 누려야 할 해석의 권리를 뺏어가려는 것일까? 나는 번역가 개인적인 입맛에 혹은 한국인 입맛에 맞춰 떠 먹여주는 달콤하고 그럴싸한 번역보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담백한 번역의 영화를 관람하고 싶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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