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대처하는 법
우리의 존재는 애초부터 깃털처럼 가볍다. 우리가 오고 가는 것은 모두 우연이기에, 굳이 여기에 있을 이유나 필요같은 건 없다. 맞는 말이다. 냉소적으로 보면 포스트잇처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삶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그런 삶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나 ‘자기 찾기’로 이런 삶을 포장한다.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생활 방식이 이와 같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사는 도시는 마치 진공 청소기같다. 도시는 누가 누군지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일하는 에너지 덩어리일 뿐이다. 오히려 그런 불편한 사실을 신경쓰지 않은 인간, 어디로 전근 명령이 떨어져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 사람, 그 어디에도 뿌리박지 않는 인간. 현대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나도 한때 ‘자기 찾기’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해외 여행의 기류에 합류했다. 해외 여행은 상당히 재밌다. 물론 사람의 성격과 불확실성을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여행 과정은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는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라 놀라운 일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5번 이상 여행을 하면서, 뭔가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움과 특별함들은 무뎌지기 시작한다. 특히 ‘자기 찾기’는 3번째 여행 정도에서 거의 다 얻을 걸 다 얻었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에 대한 과도한 로망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떠나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고, 정착하는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걸 눈치챈 건 꽤 오래 지난 후였다. 정확히는 성장의 원동력은 ‘책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관계가 우리의 존재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런 것들이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이었다. 여행은 단지 그런 것들을 잠시 떠나 그 존재를 인식하는 계기일 뿐, 그 자체가 결론은 아니었다.
우리의 존재를 무겁게 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 자신이 선택한 짐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삶이 헬륨 풍선처럼 손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 짐을 짊어진다. 불편하고 필요하지 않은 짐들이다. 그럼 왜 그런 짐들을 짊어지는 건가?
내가 썼지만, 이 질문은 시작부터 잘못됐다. 왜냐하면 짐을 짊어질 당시의 우리들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 이 짐들을 짊어질 때, 즉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 맺어야 할 이유를 미리 고민하는 인간은 없다. 그냥 한다. 오히려 그 이유는 하고 나서야 나중에 알아챈다. 그건 “성장”이다.
인간의 불필요한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한 책임감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한없이 가벼운 인간은 성장하지 않는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기실 성장해야 할 이유같은 건 없다. 계속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살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는 질문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 같다(이는 나 자신에게도 몇 년 동안 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도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 성장이란 시선의 차원이 달라지는 과정이다. 성장은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성장 이후에 사람은 판단 기준이 바뀐다. 판단 기준이 달라진 사람에게 "기존의 판단 기준으로 저를 설득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 자체를 바꾸는 것이 성장인데, 성장 이전의 기준으로 설명해달라는 건 모순이다.
말이 돌고 돌았지만, ‘성장’이란 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후적” 과정이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세상에는 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아는 것들이 있다, 아니 매우 많다. 오히려 하기 전에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존재다. 관객이 있어야 가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처럼, 타인을 배제한 ‘자기 자신’은 불가능하다. 관계들을 경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는 착각은 지금 가장 많이 유포되고 있다. 뒤르켐의 <자살론>은 개인적 결단인 자살이 사실은 사회적 변수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뒤르켐은 산업 혁명 이후의 사회가 공동체의 붕괴로 인해 개개인들이 사회적 승인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자살의 큰 변수라고 파악했다.
무거운 관계를 불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성장은 필요나 비용의 세계 이외에도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가 글로 써도 설득되지 않을 걸 알고 있다, 애초에 사후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그 무게를 끌어안기를 바란다.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나’ 자체가 바뀐다. 그런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을 성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런 ‘짐’들은 마치 배의 "닻"처럼 우리의 무게중심으로서 우리에게 의미를 끊임없이 부여한다. 그러니 질문은 이제 ‘나는 무엇인가?’에서 ‘나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로 레벨 업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