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것을 함부로 단순화하지 않는 미덕
프랑스의 철학자 보부아르는 한때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남자가 여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대화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녀의 생각이 바뀐 건 그녀가 실제로 그런 남자, 사르트르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렇다고 모든 남자가 사르트르 같은 꿈의 남자는 아니다.
대다수의 여자와 남자도 이렇게 자주 만나도 서로 갈등하는데, 만나지도 못한 트랜스젠더는 어떨까? <Disclosure>에서 사적으로 트랜스젠더를 아는 미국 사람들은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절대 다수인 80퍼센트는 트랜스젠더를 만나지 않았거나, 만났어도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고 알리지 않았거나의 경우다. 바로 내가 그렇다. 트랜스젠더의 이해가 피상적이고, 거의 전무한 이 사람. <Disclosure>가 노리는 ‘이상적인’ 시청자다.
다큐멘터리 <Disclosure>는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를 매우 뛰어나게 선택했다. 트랜스젠더와 같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고, 인식이 흐릿한 소재를 이끌고 이야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Disclosure>는 흐릿하고 추상적인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대중문화의 이미지라는 익숙하고 구체적인 도구로 실루엣을 그려낸다. 영리한 전법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인터뷰이(인터뷰에서 대답하는 사람)들은 처음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시킨 대중문화 속 캐릭터를 말한다. 이른바 “내 이야기” 찾기다.
아이는 자라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거나 본다. 아이는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매료되어 어느새 자기 자신을 투영한다.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하거나, 닮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아이는 “이게 바로 내 이야기야!”라고 정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한다.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단지 책을 읽히려는 것 이외에도 자기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둘러보고, 선택하고, 감정이입하는 등 인격 형성에 중요한 과정이다.
옛날의 “내 이야기” 후보들이 설화, 신화, 전설 등이었다면, 현대의 “내 이야기” 후보들은 TV, 영화 등의 대중문화다. <겨울왕국>을 보고, 안나 혹은 엘사를 꿈꾸거나, <아이엠스타>를 보며 아이돌을 꿈꾸는 등 “내 이야기”의 후보들은 어른들이 보기에 조금 유치해보이지만, 그 밑에는 어린이들의 소망이 있다. 예를 들어 소녀를 주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들은 대개 변신을 한다. 마법소녀들은 어린 여자 아이가 여자 어른으로 변신하곤 한다. ‘어른들이 모르는 내 모습은 이런 거야’ 혹은 ‘빨리 자라서 저런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마음을 겨냥한 “내 이야기”들이다(물론 변신 장난감을 팔려는 스폰서 완구회사의 속셈도 있다).
“내 이야기”의 후보인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유년 시절의 세계관을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유년 시절의 사람이 만나는 세계는 매우 좁다. 가까이는 가족,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인 친구를 포함한 동급생, 교사 그리고 학원에서 만나는 친구들 정도가 인간관계의 태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간접 경험, 대중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책도 있겠지만,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봐야 할까?'를 알기 위해 책을 펼치는 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다(일단 내가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그보다는 영화, TV, 만화 등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여러 매체를 통해 기울어지고 부풀려진 세계관을 끊임없이 발신한다. 이 기울어진 세계관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러도 좋다. 영화 속 예를 들자면, 흑인 남자 코미디언들의 통과의례가 드랙 퀸인 것은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됐다. 미국에서 흑인 남자는 과도한 남성성의 상징이고 백인 여성을 사냥하는 야수 이미지였다. 대중문화는 흑인 남자를 쉽게 다루기 위해 남성성을 제압하는 수단으로 드랙 퀸이라는 통과의례를 만들었다. 차갑게 말하면, 드랙 퀸은 흑인남성 젠더의 중성화 수술이다.
다수가 아닌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대중문화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 즉 개개인이 구별되지 않는 덩어리로서의 군중을 시청자로 겨냥한다. 대중문화는 개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서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다. 귀족이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예술가는 그 의뢰의 보답으로 만든 르네상스의 귀족문화와 달리 대중문화는 큰손 제작자들이 다수의 대중을 타겟으로 한 기성품이다. 그 와중에 소수자의 이야기는 묵살된다, 아니 소수자의 이야기는 할리우드의 입맛에 맞게 제작된다.
트랜스젠더가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보여지는가는 현실 속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사람들에게 암시한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컨트롤하는 특권을 갖는다. 더구나 사적으로 트랜스젠더를 만난 미국사람이 20퍼센트 밖에 안 되니, 트랜스젠더 인식에 대한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거의 전권에 가깝다. 가장 그 영향력이 도드라지는 지점은 트랜스젠더의 특성과 고민을 ‘지워버리는’ 것에 있다. 정보 및 교육의 가장 교활한 힘은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지에 있다. 인간의 지식이 아닌 무지를 조작하는 능력이다.
영화 속 미디어들은 트랜스젠더의 ‘수술’을 조명한다.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어떻게 절개해서 생물학적 성을 바꾸는 수술과정은 가장 자극적이고 프로그램의 중심 소재다. TV를 다같이 보며, ‘수술한 티가 난다 안 난다, 너무 감쪽같다, 진짜 여자/남자 같다’ 등을 평가하며 트랜스젠더 수술 결과로서의 실험체로 바라보게 된다. 인터뷰이들이 그런 토크쇼들은 “서커스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트랜스젠더를 인격체로 보는 관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의 사회적 차별과 폭력은 지워진다. 대중문화는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의 눈을 돌려 무지를 조작한다.
<Disclosure>는 미디어 속 트랜스젠더의 묘사 방식을 파헤치며, 트랜스젠더와 주위 사회집단 사이의 관계를 조명한다. 주위 사회집단은 단지 다수의 사람들만 해당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성소수자들도 트랜스젠더의 주위 사회집단에 포함된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좋지 않다. 아니 가장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 여기서 게이들이었다. “소수자들이니까 같은 소수자들과 같이 연대하는 거 아니야?”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약자 사이들의 연대를 주장하지만, 연대를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연대하지 않는 현실을 반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소수자를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할 지 몰라도, 그들 집단 사이의 차별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소수 집단은 다수에게 차별받는 고통과 이 차별이 끝나지 않는다는 좌절로 인해 피로감과 증오가 쌓인다. 그 증오를 자신보다 규모가 더 작고 더욱 차별받는 집단에게 쏟아낸다.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 여성을 여자의 몸을 갖고 싶은 남성으로, 동성애자들은 커뮤니티 일원을 뺏어가는 괘씸한 집단으로 트랜스젠더를 경계한다. “이런 녀석하고는 같은 취급 받기 싫다”로 요약되는 혐오감, 니체는 이 혐오감을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다. 증오와 혐오의 내리갈굼이다.
사실 <Disclosure>에 대해 말할 것이 10개가 있다고 치면, 위와 같이 칭찬할 것은 9개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한다면 이 글이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나머지들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시간 이내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총괄적이고 디테일한 위상과 차별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는 흔하지 않다. 사견이지만, 이 영상은 고등학생에게 트랜스젠더 문제에 대한 입문으로 보여줘도 부족함이 없다. 내가 앞으로 말할 부분은 <Disclosure>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과 트랜스젠더 이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소수 의견’이다.
<Disclosure>는 초반에 트랜스젠더들이 문화의 주류에 서게 된 것을 기뻐하는 한편, 현실 속 트랜스젠더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영화는 이를 ‘트랜스젠더 노출의 역설’이라 부른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일원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걱정이다. 영화는 그 ‘역설’이 있다고만 말하지, 왜 ‘역설’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그 비워진 부분을 내 나름의 가설로 채우고자 한다.
‘트랜스젠더 노출의 역설’은 기실 트랜스젠더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혐오범죄라는 거대한 카테고리에 속한다. 혐오범죄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트랜스젠더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의 순서라고 본다. 혐오범죄는 왜 일어나는 걸까? 참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세계화가 우리의 자유와 불안을 동시에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 이후의 세상은 단순했다. 자유주의 미국 편인가, 공산주의 소련 편인가.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한 다음, 세상은 자유주의의 영원한 승리로 나아갔다. 그리고 세계화는 말 그대로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 국경은 실선에서 점선이 되어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자유롭게 나라와 나라 사이를 넘나들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가고, 평화의 시대가 오는 듯했다. 자유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 세계화의 빛을 보았다. 그러나 세계화의 그림자로 국경과 국가는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국가 같은 건 그냥 우리가 만든 약속이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다. 말 그대로다. 국가는 일종의 약속으로 환상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짜가 아닌 환상에 우리 인간이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서로를 묶어줄 환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거대한 환상인 국가를 대신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구심점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민족, 종교, 지역, 성 정체성에 대한 혐오 등이 그렇다. 201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한국에 사이비 종교가 강력해지고, 세계 전반으로 동성애 혐오가 강력해지는 등의 이유는 “국민국가”가 뒷방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는 여우가 왕이다.
국민국가의 이빨이 빠지게 되니, 소규모 환상으로 모인 집단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트랜스젠더가 사회 전면으로 나선 것과 혐오범죄가 늘어난 것은 세계화가 낳은 자식들이다. 세계는 분명히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촉진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자유를 억압하기도 한다. 9.11, 시리아 내전, 샤를리 에브도 테러, 혐오범죄 등 21세기의 끔찍한 사건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자유를 억압하는 사건들이 예전의 사건들과 다른 점은 그 적과 그 장소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 일어나는지, 게릴라처럼 잡히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21세기에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장소가 자유로워졌다.
<Disclosure>의 위대한 미덕은 자기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정했다는 것이다. 대개 트랜스젠더 등 차별받는 소수자를 이야기하려다 보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만큼 사회의 차별이 은폐되어 있고,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촬영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만들었으니, 의도치 않게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Disclosure>는 자기 자신은 미디어 분석을 통한 트랜스젠더 다큐멘터리일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현실 속 트랜스젠더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다음 사람의 몫이라며, 바톤 터치를 한다. ‘다음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혹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까?
<Disclosure>는 간접적으로 교육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대중문화가 은폐했던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폭로(Disclosure)”하는 것이 이 영화 자신의 몫일 것이다. 나 또한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 훌륭한 교사는 나라의 기둥이라는 클리셰를 진심으로 믿는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를 반대편에게 가르치려는 방식으로는 대화를 이끌 순 없다. “너네는 아무것도 몰라, 너네들은 왜 이렇게 약자의 고통을, 목소리를 듣지 않는 거야?”는 식으로 꾸짖는 말이 사회를 더 괜찮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꾸지람의 화법으로 주장하고 표현한다면, 아무리 옳은 내용도 듣지 않을 것이다. 꾸짖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었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넣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지 혹은 잘못을 짚지 않고 건너뛰는 사람이 타인의 잘못을 품고, 대화할 수 있다고 경험상 나는 믿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100% 옳다고 생각한다면, 대화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꾸지람의 표현 방식은 마치 법정의 재판관 같은 말투다. 반대편은 의심받는 피의자고, 나 자신은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재판관이다. 재판장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화해와 치유의 장소랑은 조금 멀지 않은가.
자신의 악의와 잘못의 가능성을 돌다리 두드리듯이 음미하는 것이 타자와 대화하는 것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반드시 옳다는 것을 증명할 때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다를 곱씹을 때, 대화의 문은 열리고 사회는 그나마 나아질 수 있다. 번잡하고 지루한 음미과정을 견디는 것이 의외로 현실적인 개선방법이다. 배배 꼬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알렉산더 대왕 같은 명쾌한 해법을 나는 의심한다. 쪼그려 앉아서 복잡한 매듭을 만져보고 살펴보는 일, 그게 ‘다음 사람’으로서 내가 할 몫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